산 열매

by 안종익

산에 가면 오염되지 않은 먹을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산에는 풍성한 느낌도 들고 여유로운 면과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사어리랐다”처럼 낭만적인 마음이다. 그런 이야기 속이나 고전에 나오는 것과는 달리 먹을거리가 풍족하지는 않다. 산에는 온갖 먹을 열매가 있는 것 같지만 지금 먹어 보면 먹을 만한 것이 거의 없다. 사람이 먹이보다는 동물들의 먹이가 있는 곳이다.


현충일은 달력에 공휴일로 표시되어 있다. 초등학교 때는 달력에 붉게 쓰인 날 그렇게도 좋았다.

현충일은 국가적인 추념일이지만 학교에 가지 않아서 좋은 날이라 생각했던 시절이다. 이날은 또래들과 산 밑이나 개골에 가면 빨갛게 익어 가는 산딸기를 따 먹으러 가는 날이다. 산딸기는 보통 넝쿨에 나는 딸기와 나무에 딸리는 산딸기로 구분된다. 나무에서 나는 산딸기는 7월경에 익는다.

현충일 즈음에 나는 것은 넝쿨 딸기이다. 산딸기는 익으면 넝쿨이 온통 붉은 색깔로 덮는다. 씨알이 굵고 색깔도 더 검붉은 것이 먹음직스럽지만, 실제로는 먹어 보아야 단것과 신 것이 구분된다. 단 것이 달린 넝쿨에는 아이들이 몰린다. 그런 딸기가 더러 있었다.

이날은 꼭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었다. 집에서 놀지만 10시에 사이렌이 울리면 그쪽으로 묵념을 하라는 선생님의 지시이다. 그때는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고, 또래들은 딸기를 따 먹으면서도 몇 시가 되었는지 서로 묻고, 또 사이렌이 울리는지 신경을 쓰면서 보냈다. 그러나 보통 사이렌 소리는 듣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다가 대충 10시라고 생각하고 묵념을 하는 아이도 있고 하지 않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고는 산딸기를 계속 따던 기억이 난다.

그때에 딸기 따러 갔다가 뱀을 보는 것은 보통이었다. 뱀은 아이들이 나타나면 도망을 간다. 아이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시끄러우니까 빨리 알아채고 도망간다.

이때가 뱀이 많이 나올 시기이다. 그런데 아이들에 발견된 뱀은 여지없이 죽임을 당한다. 여러 아이들이 돌로 도망가기 전에 던져서 죽이는 것이다. 마치 누가 정통으로 맞추는지 시합하듯이 했다. 이날 뱀은 아이들을 만나면 제삿날이 되는 것이다.


오늘이 달력을 보니까 현충일이라서 옛 생각도 나고 해서 산기슭에 산딸기를 따러 갔다.

그 옛적에 온통 붉은 색깔의 넝쿨이었던 곳에는 겨우 넝쿨만 조금 있었고 산딸기는 몇 개 없었다. 그것도 그렇게 굵지 않았다. 다른 풀들은 무성하게 자라는데 산딸기 넝쿨은 거의 없었다. 농부들이 퇴비를 만들기 위해서 풀을 베어서 사용할 때는 산딸기 넝쿨은 퇴비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많았다. 이제는 풀로 퇴비를 만드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퇴비공장에서 만들어 사용하기 좋게 표장 되어 만들어진다. 그러니 온갖 풀들이 자라고 너무 무성해서 숲에 들어가기가 겁이 날 정도로 환경이 변한 것이다.

숲도 우성인 것들만 득 새하고 열성은 도태되는 것이다. 산딸기 넝쿨은 우성은 아닌 것이다.

고향 떠난 어떤 목사님도 이때가 되면 산딸기 따로 온다. 와서 먹어 보지만 별로인지 몇 개 먹지 않는다고 한다. 좋은 것을 따서 집으로 가져가서 설탕이나 꿀과 같이 먹는다고 들었다.

이분은 산딸기를 먹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추억을 따러 온 것이다. 어릴 때 먹을 것이 없었을 때는 달았던 산딸기가 지금은 달지 않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래도 그 옛날 추억 때문에 산딸기를 따서 먹기 전에 붉게 익은 딸기 덩굴이 보아도 좋은 것이다.


가을에 산소 벌초하러 갈 즈음에 빨갖에 익어가는 열매가 있다. 보리수이다.

나무가 온통 붉게 보일 정도로 열매가 많이 달린다. 이 열매도 단맛이 있는 나무도 있고 신맛이 나는 나무도 있다. 달짝지근한 단맛이 나는 보리수나무는 사람이 몰린다. 그러니 미리 맛을 보아서 맛이 없으면 따 먹지 않는다. 농부들이 늦여름에 풀 베러 산에 가서 풀짐 위에 빨갛게 익은 보리수나무를 꺾어서 오는 풍경을 흔히 보았다. 그런 보리수는 맛이 단 것이다. 미리 먹어 보니까 달아서 집에 있는 아이들을 주기 위해서 가져오는 것이다.

또 소를 먹이러 갔다가 보리수를 실컷 따 먹고 또 꺾어서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는 소를 몰고 산에 내려오는 모습도 흔한 일이었다.

지금은 보리수나무는 여전히 있지만 보리수가 열리지 않는다. 땔감을 하러 산에 가지 않아서 숲이 너무 무성해서 햇볕이 안 들어서 그렇다는 말도 있고, 나무를 하지 않으니까 보리수나무 가지 치기가 되지 않아서 안 열린다는 말도 있다. 숲의 환경이 변해서 그런 것이다.

시장에 나오는 것도 집에서 재배한 것이다. 집으로 옮겨 심어서 가꾸는 것이나 아니면 개량종인 것이다.

보리수 열매는 당도가 있어서 먹을 만했는데, 지금은 열리지 않으니까 먹을 수가 없다.

불과 몇 년 만에 옛날의 것들이 옛날의 추억으로 변할 정도로 변화가 너무 빠르다. 주변 환경이 지금도 변하고 있는 것이 보일 정도이다.


가을에 밤도 산에 가면 지천이었다. 지금도 밤나무는 있지만 벌레가 먹어서 먹을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그땐 산에 가서 밤을 줍기도 하고 없으면 나무를 털어서 그 나무 밑에서 모닥불을 해 놓고 구워 먹었다. 그 맛이 지금도 생각날 정도로 맛났다. 지금은 밤은 벌레가 먹어서 먹을 만한 것이 거의 없고, 산불이 무서워 모닥불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한다.


전에는 산에서 머루 넝쿨을 발견하면 한 소쿠리를 따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그런 넝쿨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머루 나무는 아직도 찾을 수 있다. 그런 머루 나무에 별로 달리지 않지만, 그 머루도 따서 먹어보면 단맛이 없고 쓴맛이 나서 다시는 손이 가지 않는다. 다래는 머루보다 나무가 크고 높아서 엄청 달린다. 키위처럼 생겨서 맛이 있을 것 같지만 따서 먹어보면 단맛이 있는지 없는지 잘 구분이 안 가고 시중에 파는 다래와 비교하면 못 먹을 수준이다. 그런데도 다래나무는 온 산을 뒤져야 한두 나무 만난다. 만나도 열매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의 생태계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어름도 모양이 바나나처럼 생겼지만 크기가 작은 바나나 정도이다. 어름 넝쿨 밑에 가면 엄청 달린다. 달려 있는 것을 밑에서 보면 보기에는 맛이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어름은 익으면 중간이 벌어지면서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그 벌어진 속살을 먹는 것이다. 속살이 보기에는 먹음직하다. 그 속살이 익으면 먹기 좋게 부드러워진다. 그런데 먹어보면 그렇게 달지 않고 씨가 너무 많아서 맛만 보는 수준이지 많이 먹지 못한다. 우리가 늘 먹는 바나나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맛이 없다. 어름 넝쿨은 여전히 무성하게 잘 자란다. 숲에 우성인 것 같다.


산에서 그대로 자란 열매는 이제 별로 먹을 만한 것이 없다. 사람이 재배해야 먹을 만하다.

재배의 기준은 먹을 만하게 키우는 것이지만 그 핵심은 열매의 당도이다. 달지 않은 산 열매는 이제 맛이 없어서 먹지 않는다. 그만치 과일의 종류도 많고 단맛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달지 않은 “머루랑 다래만 먹고 청산에 살던 때”의 입맛은 아니다. 그것은 옛날 먹을 것이 없을 때의 일이다.


산딸기도 당도가 높고 수확이 많은 과일나무로 개발되어서 재배되고 있다. 우리가 보통 아는 복분자가 그것이다. 보리수도 개량종이 씨알이 굵은 개량종이 많이 보급되어 있어서 예전에 재래시장 한구석에 산에서 채취한 보리수를 파는 할머니는 이제는 없다. 밤이나 머루 다래도 농가에서 품종을 개발해서 재배하고 있다.


산에서 나는 열매는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 당연하고 앞으로도 너무 많이 변할 것이다.

계속 좋은 쪽으로 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될 것 같다. 과거의 머루랑 다래랑은 추억의 맛이고 이제 산에서 나는 열매는 맛없는 것으로 느낀다. 옛날 산에서 나던 머루랑 다래랑의 맛은 추억의 맛으로 기억하고 새로운 맛난 과일들이 바다 건너서 들어온다.

산에서 나는 열매는 산에 사는 동물들이 먹는 것이고 우리가 먹기에는 우리 입맛이 너무 변하고 있다.

산열매의 주인은 이제 산에 사는 동물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지역의 볼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