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종익 May 04. 2023

산돼지도 누가 농사하는지 안다



산골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찬 공기가 옅어지더니 훈훈한 바람이 부는 시절이 돌아왔다. 들에는 마른풀 사이로 새파란 싹이 올라오는 것이 보이는 계절이 되었다. 

부지런한 농사꾼들이 들판에 보이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던 골목에 바쁜 걸음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을 보니까 봄이 온 것이다. 농사가 시작된 시골의 봄은 이제 힘 빠진 노인 외에는 또다시 한 해를 시작하기 위해 모두 바삐 움직이는 것 같다. 주변에서 모두 농사를 시작하니까 덩달아서 농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시골에서는 농사를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아 무슨 농사하는 것이 좋을지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본다. 


어린 시절에 옛집에서 살던 일이 추억 속에 남아있다. 

할아버지와 다른 식구들이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을 먹었던 일이 떠오른다. 어두워지는 저녁 무렵에 그렇게 더웠던 한낮에 비해서 시원한 기분이 나는 저녁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가족들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모여서 저녁을 먹었다. 마당 한구석에는 젖은 풀과 마른나무로 모깃불을 피워 놓고서 저녁을 먹으러 둘러앉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혼자서 독상을 받고, 남자 어른들은 또 다른 상으로 자리를 잡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옆으로 앉아 낮에 있었던 이야기도 하면서 어둠이 내려앉는 마당에서 저녁 먹었던 때가 생각난다. 그런 그리운 가족들이 아련하고 행복했던 모습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농사일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다가온다.

온 가족이 담배 모판에 앉아서 가식을 할 때도 즐거워 보였고, 가을날 논에서 벼를 수확하여 마당으로 옮겨 타작하던 풍경을 생각하면 행복한 생각만 앞서는 것이 농사일이다. 농사일이 그렇게 추억과 낭만이 있는 일로 기억하면서 시작했지만, 해보니까 너무 노동이고 지루한 일이다. 


수년 전에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은 친구가 아랫마을에 산다.

구정이 지나고부터는 친구는 과수원의 사과나무에 늘 매달려 있은 것처럼 보인다. 봄이 오기 전에 사과나무 가지 치기를 하기 위해서 사과나무에 붙어서 오랫동안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과수원을 지날 때면 친구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혼자서 봄이 올 때까지 과수원 가지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시골에서는 철 따라 할 일이 있어서 심심치 않고 외로운 생각이 들 새가 없다. 계절에 따라 해야 할 일이 이어져 넘치는 것이 농사일이다. 

환갑이 넘은 나이이지만 아직도 혼자 사는 친구이다. 환갑이 넘어서 혼자서 살지만 그래도 짝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언젠가는 본인에게 맞은 사람이 나타나서 알콩달콩 사는 것이 꿈인 친구이다. 이제는 환갑이 지났으니까 노인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짝을 찾기 힘들다는 마음이 들 때이지만, 자기는 예외로 언젠가는 자기에게 맞는 짝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사는 것이다. 아직도 사람은 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구가 과수원 사과나무에 늘 매달려 있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 농사일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농사를 지으면 몸을 움직여야 하고, 할 일에 집중하니까 외로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농사일도 남들이 하니까 따라서했던 것보다, 외롭지 않으려고 시작한 것도 있었다. 코로나는 아직도 한창이니까 멀리 가지 못하고 끝나는 그때까지 기다리면서 농사할 생각이었다. 할 일이 있어야 시간이 잘 가고 몸이 힘들어야 피곤해서 생각도 단순해지는 것이다. 


농사하는 사람들은 나이 들어서 돈보다는 소일거리로 하는 사람도 있지만, 엄청난 땅을 경작하는 사람도 많다. 많은 농사를 하는 사람은 기계와 외국 인부를 이용하기 때문에 농사를 경영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시골 분위기에서는 농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주목을 받고 그 사람의 주장이나 말에 힘이 실린다. 어느 곳이나 그곳에서 주된 일을 잘하는 사람이 그곳의 주류가 되는 것이다. 시골에서 살려면 농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고 농사 잘하는 사람이 최고이다. 


요즈음의 젊은 농사꾼들은 차 타고 다니는 것이 가장 중요한 농사일이다. 

농사를 많이 하는 농부는 더운 한낮에는 쉬고 선선한 아침저녁으로 일하는데, 농기계를 운전하거나 차를 운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농토로 외국 노동자를 태워서 옮기는 일과 심을 작물이나 수확한 것을 차로 운반하는 것을 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크게 농사하기 때문에 가격이 높으면 대박이 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외국 노동자들의 품값도 못 얻는 경우도 생긴다고 한다. 이런 시골 분위기에서 놀 듯이 농사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고 시작했지만, 일도 손에 익숙지 않고 소출도 시원찮아서 흥이 나지 않았다. 


시작한 농사는 손쉬운 논농사를 했다.

지금 이곳 시골에서는 가장 쉬운 농사가 논농사이고 다음이 콩 농사이다. 그다음은 과수원이고 다음은 배추 농사, 수박 농사 순서이고 가장 어려운 농사는 고추 농사이다. 

쉽다는 논농사도 트랙터나 이양기가 없으니까 기계가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하니까 별로 힘들지 않다. 물론 그 품삯과 기계 빌리는 값은 지불해야 하니까, 그만큼 소득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쉽게 농사지으니까 전화기로 농사짓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전화를 무엇을 해 달라고 하고서는 그 삯도 전화로 지불하는 것이다. 그래도 논으로 들어가는 논물을 관리해야 한다. 

모든 것을 기계로 할 수는 없다. 비료를 치는 일이나 모판을 옮기는 일은 손으로 해야 하고, 논둑을 정리하는 일도 직접 해야 한다. 그런 일을 할 때면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을 쓰기 때문에 힘이 들고 단순한 일이니까 흥미도 별로 없다. 


논을 갈기 전에 비료 치는 일은 기계를 빌릴 필요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직접 했다. 초보 농부가 비료를 얼마나 쳐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경험 많은 노인에게 물어서 했지만, 전년도에 배추를 한 논에는 비료를 덜 쳐야 하는 것까지 물어보지 못했다. 작년에 무엇을 농사했는지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비료는 전년에 배추를 했던 논이므로 아직 땅에 비료 성분이 남아있으므로 조금 덜 쳐야 하는데, 보통 치듯이 친 것이다. 처음에는 비료기가 많아서 벼가 잘 자라 초보 농부가 농사 잘 지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벼는 갈수록 웃자랐다. 태풍이 오면 벼가 누울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다른 방도를 찾아보았지만, 확실한 처방이 없었다. 오직 태풍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벼가 익어가면서 태풍이 올 시기가 되었지만, 태풍은 오지 않았다. 

그런데 비가 많이 올 때가 한 번 있었다. 그때 벼는 거의 누워 버렸다. 다른 논은 벼들이 꼿꼿하게 서 있는데, 초보 농부 논에만 누웠다. 멀리서 보아도 누운 벼가 누구 논인지 구분이 될 정도였다. 만일에 태풍까지 왔으면 더 비참한 꼴이 되었을 것이다. 


초보 농사꾼의 논에 벼가 누웠는데, 그곳에 또 불청객이 찾아왔다. 논둑이 넓어서 그곳에 여름에 옥수수를 심어 놓았다. 심어 놓으면 추석 무렵에 한 번은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옥수수는 잘 자라서 수확할 무렵이 되었는데, 산에서 산돼지가 내려와 옥수수를 다 먹어치우는 사태가 발생했다. 원래 산이 가까운 곳에는 옥수수 같은 당도가 있는 작물을 심으면 산돼지가 내려온다는 것을 몰라서 심은 것이다. 

옥수수를 다 먹은 산돼지는 다시 논을 돌아다닌 것이다. 옥수를 찾아서 다닌 것인지 온 논이 산돼지가 지나간 자리는 모두 쑥대밭이 되었다. 산돼지와 인연은 다른 논에도 있었다. 그 논에는 큰 산돼지가 죽어 있어서 그것을 너구리가 다 파먹고 등뼈와 머리만 남겨두고 둔 것도 있었다. 초보 농사꾼이 농사하는 것을 산돼지도 아는 것 같다. 


봄에 파종해서 여름이 지나 가을에는 황금물결을 이루는 낭만적인 생각을 머릿속에 그리고 농사했지만, 현실은 힘들고 재미없는 농사일이다. 

농사하면 자유롭고 다른 사람의 간섭도 받지 않으면서 즐거운 일이 될 것이란 기대도 했었다. 농사일은 다른 사람의 시선도 의식하고, 비교도 되는 일이었다. 농사를 천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힘든 노동이고 보람을 얻지 못한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아야 좋은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희망이 있을 때가 좋은 날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