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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익 May 13. 2023

걷고 나서 만나는 막걸리

해파랑길을 걸으면서 생각하는 것이 과거인 경우가 많다. 과거를 생각하는 것은 필요 없는 일이고, 현재의 집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길을 걷은 것은 과거를 생각하는 길이고, 과거를 생각해야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해안 길은 걷다가 돌아보면 방금 전까지 걸어온 길이 모두 보인다. 돌아본 길은 초승달 모양의 해안선이 마지막까지 아득하게 보이면서 먼 길을 왔다는 것을 실감하기도 한다. 어쩌면 해파랑길은 과거도 생각하고 뒤도 돌아보는 길이기도 하다. 

지금도 어떤 의미라도 찾으려는 희망으로 걷지만,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의미를 찾으면서 살아갈 것이다. 


모포 항에 도착하고 항구가 끝나면 장길리 마을로 가기 위해서 데크로 만든 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 계단이 햇볕이 잘 들고 바람도 막아주고 있었다. 발도 아프고 거기서 앉아서 휴식을 취하면서 신발도 벗고 발을 풀어 주었다. 고성까지 완주할 마음은 있지만, 이 발에 이상이 생기면 허사이다. 불안한 마음에서 걷는 중간에 이렇게 발을 풀어주고 달래는 것이다. 지금 마음은 이 발이 허용하는 데까지 갈 예정이다. 바람 불지 않고 햇볕이 따뜻한 계단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운치가 있다.


장길리 마을을 지나다 보니까 유모차가 나란히 정렬되어 있었다. 근처에 할머니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아마도 주변에 경로당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주변에는 아무리 찾아도 경로당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몇 걸음 더 가니까 양지바른 곳에 정자가 나왔다. 그곳에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것이다. 오늘 노인 일 자리하는 날인 것이다. 

나도 할머니 구경하고, 할머니들도 이른 오전에 배낭을 메고 가는 나를 신기한 것처럼 구경한다. 


구룡포항은 대형 선박이 정박해 있고 과메기 항구였다. 과메기 관련 큰 건물들과 항구는 활기를 느껴진다. 구룡포항의 마지막 부분이 해파랑길 13코스가 끝나는 지점이다. 

구룡포항을 지나서 해안선을 따라가면 한반도의 가장 동쪽 끝이라는 석병리가 나온다. 양식장 너머로 동쪽 끝을 표시하는 지구 모양의 표지석이 서 있다. 양식장이 사유지라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호미곶의 해맞이 광장에 도착하니까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상생의 손이다. 상생의 손은 지면을 통해서는 여러 번 보았지만 직접 보기는 처음이다. 갈매기가 손가락에 앉은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갈매기 앉지를 않는다. 기다리다가 주변을 보니까 태크로 만든 길 끝에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소년의 동상이 있다. 아이의 손가락에는 희망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 손가락을 이곳에 온 사람들이 너무 만져서 반질반질했다.


호미 반도 해안 둘레길의 하선대는 바다 위에 떠있는 작은 바위섬으로 선녀들이 내려와서 놀았다고 해서 하선대라고 한다. 동해의 용왕이 매년 칠석날 선녀들을 초청하여 이곳에서 놀았는데,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선녀를 왕비로 삼고 싶었으나 옥황상제가 허락하지 않아, 바다를 고요하게 하는 등 인간을 위해서 일하자 옥황상제가 감복해서 허락했다고 한다. 용왕과 선녀가 자주 이곳에 놀러 온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이곳에서도 한참을 더 가면 선바위가 나오면서 해안 길이 끝이 난다. 


연오랑세오녀의 테마공원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설을 토대로 포항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잘 만들어져 있었다. 위치도 좋고 바다가 너무 넓게 보이는 곳이다. 멀리 도구해수욕장이 보이고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 넓은 백사장에서 대규모 상륙 훈련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해수욕장 길은 마지막이 보이는 듯한 길이지만 너무 긴 직선 길이다. 그래도 계속 갔지만 아무리 가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이다. 이곳은 군부대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중간에 빠지는 길도 없었다. 그렇게 걸은 시간이 두 시간 이상이다. 


도구 해수욕장을 지나서 오늘 점심 해결해야 할 것 같아서 부근 식당을 찾았다. 혼자 들어가니까 식사 안 된다고 거절을 두 번 당하니까, 마지막 집에 가서는 불쌍한 표정으로 물어보니까 불쌍한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점심을 주었다. 메뉴는 주인이 정해 준 물회 한 가지뿐이라고 했다. 돈 주고 사 먹는 점심도 이렇게 힘든 곳이 있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생각나는 좋은 사람의 덕목은 친절과 배려인 것 같다. 


송도 해수욕장을 한참 걷다가 보면 S 모형의 전망대에서 좌측으로 해파랑길이 표시된다. 좌측으로 도로를 건너서 시내로 들어가면, 얼마 가지 않아 큰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는 동빈 다리인데, 여기서는 포항의 구항이 한눈에 보인다.

다리를 건너서 우측으로 구항 길을 따라서 계속 내려가면 포항 여객선 터미널을 끝으로 이번에는 좌측으로 길이 나 있다. 좌측에 보이는 곳이 영일대 해수욕장이고 이 길도 직선 길이다. 영일대 해수욕장이 끝나는 데까지 거의 직선 길을 가면 되니까 길을 찾는데 신경을 쓰지 않고 구경이나 생각에 잠기면 되는 구간이다. 


해파랑길을 이제 절반은 오지 못했지만, 300킬로 가까이 걸어왔다. 나를 돌아보고 의미를 찾으려고 시작한 길이지만, 아직은 별로 느껴지는 것이 없고 다리만 아프다.

아마도 해파랑길을 끝까지 걸어도 느낌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지금 젊은 나이도 아닌데, 너무 많이 걷는 것이 무리가 될 것 같고 건강에 나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도 생각해 볼만하지만, 계속 걷고 있다. 뚜렷한 목적 없이 일단 시작했으니까 그냥 가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해파랑길을 걷는 것이 인생길과 비슷하다. 인생도 시작되었으니까 끝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무엇을 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태어났으니까 살아가는 것이다. 


날씨가 포근해서 그동안 계속 쓰고 다니던 털모자를 벗어도 춥지를 않았다.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여기까지 걸을 때 한 번도 벗지 않고 썼던 털모자이다. 추운 날도 이 털모자를 쓰고 걸으면 추위를 막아 주었다. 오늘은 모처럼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간 날이다. 

그런 털모자를 벗고 걷다가 한참을 지나서 떨어뜨린 것을 알았다. 어디서 떨어뜨렸는지 모르지만, 돌아가서 찾을 수만 있다면 가고 싶은 마음인 모자였다. 추울 때 가장 필요했던 것인 만큼 아쉽고 아까운 생각이 든다. 내일이라도 추워지면 다시 모자를 사야 할 것 같다. 그 모자는 십 년 이상 겨울이면 쓰던 모자였는데 잃지 않아야 할 것을 잃어버렸다. 


걸으면 오후에는 다리도 아프고 힘이 드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중된다. 마지막에는 다리의 무게가 천근이 된다는 말을 실감한다. 

몸도 피곤하고 빨리 숙소를 잡아서 쉬고 싶은데, 예약한 숙소를 방향을 잘못 잡아서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지도를 보고 정확한 위치를 찾아서 갔다. 숙소로 가는 길에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유명한 순대 국밥집이 보였다. 그 집에 들어가고 싶지만 일단 숙소를 찾아야 하니까 부지런히 걸어서 숙소로 갔다. 짐을 풀고 그 순대 국밥집이 생각나서 다리는 아프지만 한 그릇하고 쉬려고, 약간 멀지만 지친 다리를 끌고 힘들게 갔다. 옛날에 먹던 순대 국밥을 한 그릇 먹으면 피로가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렵게 온 순대 국밥집이 오늘 쉬는 날이다. 

엄청 실망스러웠지만 돌아오다가 뼈 해장국집이 있어서 그곳에 들어갔다. 몸이 지쳐 너무 힘이 들었지만, 해장국을 주문하고 이 지역에서 만드는 막걸리를 시켰다. 

부산에서는 “생탁”이 좋았고, 울산에서는 “태화루”가 좋았다. 전국적으로 오랫동안 유통될 수 있는 막걸리보다는 그 지방에서 나오는 유통기한이 짧은 생막걸리를 좋아한다. 

이곳에는 “영일만 친구”가 있었다. 걷고 나서 먹는 막걸리 첫 잔이 목을 넘어갈 때 세상없는 맛이고 피로가 그 한 잔에 풀리는 것 같다. 

하루 마지막에는  좋아하는 막걸리와 만났다. 그 시원한 맛은 피로도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시간에는 작지만 만족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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