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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익 Jun 04. 2023

피레네산맥을 넘어서

프랑스 작은 마을 생장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마드리드에서 기차로 팜플로나로 이동해서 다시 버스를 타고 생장 마을에 도착했다.

숙소를 정하기 전에 산티아고 패스포트를 발급하는 곳을 찾아 비용을 주고 발급받았다. 여러 안내서와 순례길을 걷는다는 표식인 가리비 조개껍데기를 받았다. 

산티아고 패스포트는 순례지마다 스탬프를 찍으면 마지막에는 산티아고를 순례했다는 증서를 준다고 한다.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지만, 이것이 있으면 공식적인 알베르게(숙소)에 묵을 수 있다고 하니까 받아 둔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을 했다.

이 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보다, 그냥 길이 있으니까 가겠다는 것이다. 

보슬비가 내리는 아침에 순례자들은 저마다의 숙소에서 나와 걸어가고 있다. 각자가 어떤 생각으로 걷는지는 모르지만, 이 길은 모두가 걷고 싶어서 걷는 것이다. 

이른 아침에 안개가 자욱한 오르막을 조용히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면서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옛날 성지순례를 떠나는 순례자의 모습도 이와 같았을 것 같다.

나도 순례자의 마음으로 안갯속을 천천히 걸어간다. 

걸어가는 순례객 중에는 나이 든 부부도 있고 젊은 사람도 있다. 젊은 사람들은 여행 온 마음으로 즐거운 표정으로 걷지만, 나이 든 노인들의 얼굴에는 진지함이 보인다. 모두가 무엇인가 기대하면서 이른 아침에 걷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었지만, 시작하면서 드는 느낌은 내가 이 길을 왜 걷는지 알고 싶다. 지금 분위기는 이 길을 걸으면서 의미를 찾을 만한 기분이다. 원래 이 순례길을 걷기 위해서 유럽에 온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지금 걷고 있다. 

신앙인으로 믿음을 돌아보기 위해서 걷는 것도 아니다. 이 순례길을 걸으면서 마음의 안식과 평온을 얻고 경건한 신앙인으로 살고 싶은 심정은 천주교인들의 마음일 것이다. 나는 무신론자에 가까우니까 그런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 길을 걸으면서 힘이 들어도 내가 흔히 말했던 “생고생”이니 “개고생”이란 말은 쓰지 않으려고 한다. 성지 순례길을 걷는 최소한의 예의일 것 같다.

그래도 이 순례길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걷고 싶다.


오르막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오르막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사이에 있는 피레네산맥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이 코스가 인기 있는 것은 이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피레네산맥 코스가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이곳에서 많이 출발한다고 한다. 

그런 아름다운 코스가 안개가 끼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흰색 천지이다. 그러나 오르막이 완만해서 오르기도 편하고 내 취향에 맞은 걷기 좋은 길이다.

이런 길을 걸으면 나를 돌아보기 위해서 걷는다고 잘 아는 지인에게 이야기했더니, 돌아오는 말이 내게는 낯이 붉어진다. “너는 맨날 돌아만 보니” “아직도 돌아볼 것이 있나”였다. 

그 말이 왜 멋쩍은지 안다. 너무 많이 돌아보면서 살아온 것 같고, 이제는 나름의 방향이 서야 할 시기인데 아직도 같은 타령이니까 그런 것이다. 돌아보는 것도 희망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러니 이제는 내려놓아야 할 때이다. 

 

이곳은 안개가 걷히고 나니까 그 풍광 너무 좋다. 걷고 있으니까 마음이 힐링되는 기분이다. 이 높은 곳에 곡선으로 이루어진 산들이나 푸른 초원과 계곡 속에 있는 구름이 멋진 그림이다. 이 풍경화는 구름이 산 사이에 갇혀서 머물고, 구름 사이에 솟은 완만한 산 위에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구도이다. 

구름 위에서 양들이 풀을 뜯는 모습이 얼마나 멋지고 보기 좋은지는 이 길을 걸어봐야 알 것 같다. 이 길은 순례길이기도 하지만, 누구나 걸으면 감탄이 나오는 자연이다. 

지금 걷는 것은 모든 것을 접어두고 좋은 길을 트레킹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피레네산맥 길에 순례에 관한 표지판이 있었다. 그 표지판을 보려고 안경을 찾으니까 안경이 없었다. 숙소에 안경을 놓고 온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안경을 세 번째 잃었다. 안경이 없으면 인터넷도 못 보고 여행에 엄청난 지장을 주는 것이다. 그런 실수를 또 했을까 하는 자책과 혼란에 빠진다. 한참을 짜증스러운 상황으로 빠지다가 생각을 바뀌기로 했다. 

다음 숙소에 가서 안경을 사면 된다는 생각과 노트북이 안 보이면 햇볕에 나가서 자판을 보면 된다는 마음을 먹고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다. 더 이상 스스로 자책하고 우울하거나 기분 나뿐 상황을 유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상황은 인정하고 좋은 쪽으로 마음을 먹는 것이다.


길은 프랑스를 넘어서 스페인으로 들어섰다. 길은 비슷하고 직선 길을 걷다가 스페인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피레네산맥을 넘어서 첫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첫날 숙소는 성당을 개조한 것으로 단체로 남녀 구분 없이 순서대로 침상을 배정하고 각자 알아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다. 첫날 묵은 알베르게 내가 잔 방에만 50명 이상인 것 같다. 

아침이 되니까 새벽잠이 없는 노인들이 많아서 일찍 일어나서 출발도 빨랐다. 어둑한데도 남들이 출발하니까 나도 생각 없이 따라나섰다. 아직도 달이 떠 있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일찍 출발해야 햇볕이 덜 따가울 때 다음 숙소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한참을 가서 날이 밝아서 들판을 보니까 고사리가 온 들에 널려 있다. 고사리가 벌써 너무 자라서 모두 핀 상태였다. 여기 사람들은 고사리를 먹지 않는 것 같다. 고사리를 보니까 갑자기 모친이 생각난다. 모친은 고향에서 고사리 철이 되면, 남보다 일찍 고사리밭에 가려고 동네 또래 할머니들과 경쟁하던 모습이 선하다.


이 길에서 순례하는 모녀가 민들레 홀씨를 꺾어 불면서 아이들처럼 깔깔거리며 즐거워한다. 그 웃는 소리가 온 들판에 펴져도 그 웃는 소리가 시끄럽지 않고 정다운 소리로 들린다. 

오르막길은 있지만 그렇게 급하지 않고, 오르막을 오르면 평편한 길이 오랫동안 계속 이어지는 힘들지 않은 길이다. 이 길을 순례자가 아니라도 많이 찾는 것은 아름답고 걷기 좋은 길이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순례객들이 “부엔 카미노”라는 인사를 잊지 않고 하고 지나간다. 그 말이 익숙지 않아 나는 “하이”로 대신한다. 

그 옛날 순례자들은 지금처럼 잘 만들어진 스틱이 짚고 다니질 않았을 것이다. 순례자들은 이 길에 있는 나뭇가지를 주어서 짚고 다녔을 것이다. 그래서 짚고 다니기 적당한 막대기를 주어서 짚었다. 그 옛날 순례자를 생각하면서 허리도 약간 굽혀서 걸어도 본다. 


다음 목적지인 주비리 마을에 가까워질 때에 찔레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 찔레꽃이 코스모스 꽃처럼 큰 것이 눈길이 끌었다. 도착한 주비리 마을은 제법 큰 개울이 흐르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다음날은 주비니 동네 어귀에서 시작해서 팜프로나까지 갈 예정이다. 순례객들은 벌써 많이 출발하고 있고, 아침에는 힘이 남아도는 때이므로 씩씩한 모습들이다. 

한참을 간 시골 순례길에서는 그라 피트가 그린 그림이 있다. 그라 피트가 그린 낙서 그림을 예술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있지만, 낙서를 통해서 어떤 불만을 표시하는 것 같아 보인다. 예술이라는 느낌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팜프로나 도심으로 들어가는 순례길은 일직선으로 나 있었다. 그 순례길을 가다가 잘 만들어진 플라타너스가 보인다. 플라타너스인데 인도 양쪽에 자라서 서로 가지가 붙어 버린 신기한 나무가 되어 있다. 플라타너스는 곧게 자라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모양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팜프로나의 도심에 지정된 알베르게는 도심의 성당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벌써 걷기를 마친 많은 순례객이 알베르게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긴 줄을 서 있다. 나도 그 뒤에 줄을 서서 입장했다. 


팜프로나 도심에는 공연이 한창이고, 이 도시는 소 떼가 시가지를 달리는 투우로 유명한 산 페르민 축제가 열리는 장소이다. 소 떼가 이 거리의 건물 사이로 몰려나오면 장관일 것 같다. 

팜프로나 중심가는 축제 분위기였다. 사람들이 붐비면서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나는 오늘은 맥주를 한잔할 생각이다. 맛난 소고기 튀긴 것을 시켜 놓고 맥주까지 주문해서 먹었다. 지금 이 도시는 젊은이들이나 순례객들이 모두 도심에서 축제를 즐기면서 즐겁게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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