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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익 Jun 08. 2023

끝없는 밀밭 길을 걷는 노부부

팜프로나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부지런한 노인들이 일찍 일어나서 떠날 채비를 하니까 알베르게는 평온이 깨져 잠을 깰 수밖에 없다. 나도 잠을 깨 누워있기보다는 그냥 준비해서 밖으로 나왔다. 오늘도 내가 가야 할 순례길이 있기에 일어난 것이다. 순례를 떠나기 위해서 분주히 준비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보이고 생기가 넘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 같은 분위기여서 나도 몸에서 활력이 나오는 것 같다. 할 일이 있는 사람이 오래 살고, 아침에 일어날 이유가 있는 사람이 건강하게 산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아침이다.

알베르게에서 조금 나오니까 어제 시민들이 그렇게 탄성 지르던 도심에는 지금은 아무도 없이 쓰레기만 남겨진 거리를 순례객들이 지나가고 있다. 팜프로나 도심의 순례 표시는 바닥에도 있고, 건물벽에도 방향을 가리키고, 간간이 팻말도 서 있어서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아직 가로등이 빛나는 거리를 순례객들은 줄을 맞추어 가는 듯하다.

 

도심을 벗어나니 끝도 없이 펼쳐진 밀밭을 걸어갈 때 아침 해가 떠오른다. 떠오른 해가 그 넓은 밀밭을 비추기 시작하고 순례객들은 밀밭 사이로 난 길을 걷고 있다. 멀리 고성이 보이는 밀밭은 중세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끝없는 밀밭이 펼쳐진 끝에는 큰 산이 가로질러 서 있다. 그 위에는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데 이 평온한 들판에 어울리지는 않은 인공적인 구조물이다. 오늘은 저 풍력발전기가 있는 산을 넘어야 목적지가 나온다. 

그 산을 향해서 순례객들은 산을 넘으려고 오르막을 올라가고 있다. 그 오르막이 그렇게 가파르지 않다. 그 산 밑에는 이 넓은 밀밭을 가꾸는 농부들이 사는 집들이 평화롭게 자리하고 있다. 

 

부지런히 가는 순례객 중에 뒤에서 보니까 배낭에 순례객의 표시인 가리비도 나란히 달고, 스틱도 같이 짚으면서 나란히 가는 남녀가 있다. 걸음걸이로 보아서는 나이가 든 노부부 같아 앞으로 가보니까 예상대로 나이가 많은 노인 부부였다.

두 분은 같이 빠르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뒤로 처지지도 않으면서 걷고 있다. 서로를 의지하고 순례길을 걷고 있다. 

늙은 부부가 나란히 걷는 순례길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의 돌아보는 듯한 아름다운 모습이다. 조용히 미소 짓는 할머니 모습에서 세상은 좋은 곳이라 말하는 듯하다. 

걸어가는 걸음도 서로 발을 맞추어서 가면서 짚고 가는 스틱도 같은 동작이다. 간간이 서로를 보면서 웃기도 하고, 세상에 둘만이 가는 것 같은 길이다. 

 

고개에 올라오는 길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르막이라 쉽지는 않았다. 이렇게 고개를 올라오면 먼저 온 사람과 늦게 올라온 사람들이 모두 모여 쉬고 있다. 이 언덕은 “알토 델 페르돈”으로 용서의 언덕이라고 불리고 있다. 여기서 기념촬영도 하고 만남의 장소이다. 

고개 정상에서는 올라온 길도 보이고 앞으로 갈 길도 보이는 풍광이 좋은 곳이다. 이제 올라온 만큼 내려가서 다시 순례길을 걸어간다.

 

고개에서 내려온 길도 밀밭 길이다. 

아직 밀이 익지 않아서 푸른빛을 띠지만, 익어서 밀밭이 황금빛으로 물들면 이 순례길도 풍성한 순례길이 될 것이다. 

끝없는 밀밭을 걸어오다가 멀리 성당이 있는 마을이 보인다. 마을 성당의 탑과 밀밭이 보이는 길이다. 

오늘의 순례길은 밀밭을 걷는 순례길이다. 의미 있고 걸을 만한 순례길을 걷는다. 끝없는 이어지는 밀밭 길에서 순례의 의미를 생각하고 넓게 펼쳐진 밀밭 사이로 걸어가는 순례자는 이어진다. 

 

인생을 마지막까지 일하다가 마친다면 그것도 행복할 것이다. 평생 하던 일로 끝까지 일하다가 삶을 마감한다면 만족스럽고 즐거운 삶인 것이다. 

이 순례길이 끝나고 또 다른 곳으로 여행할 것이다. 그렇게 보내다가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농사이다. 농사를 지어서 그 수확물을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물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기 위해서 농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게 베푸는 것이고 나름 마음의 만족도 올 것 같다. 

 

다시 오르막이 계속되는데 멀리 노란 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것이 보인다. 

노란 꽃은 마드리드에서 등산 갔을 때 많이 보았는데, 거기서는 꽃이 지고 있었다. 지금 여기 꽃은 이제 한창 피고 있고 향기도 상당히 진하다. 멀리서 보면 이른 봄에 피는 개나리와 흡사하다. 아마 이곳이 마드리드보다 북쪽인 것 같다. 고개를 올라가자 도로를 따라 난 순례길에 노란 꽃길이 만들어져 있다. 

노란 꽃길에서 보이는 마을의 성당의 지붕과 멀리 큰 산에 햇볕이 밝아오는 광경은 서양화 같다. 그 성당이 있는 마을을 지나서 다시 밀밭이 나오는데 벌써 거의 익어가는 밀밭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밀밭에서 또 다른 마을이 아름답고 평화롭게 자리한 것이 멀리 보인다. 그 마을을 향해 올라가는 순례객들의 모습도 마을과 같이 한 폭의 그림이다.

 

한참이나 뒤에서 올 것 같던 다정하게 순례하는 노부부는 어느새 앞에서 가고 있다. 노인들이지만 걸음걸이가 보통이 아니다. 앞서가던 노부부들이 멈추어 서서 가리비 표시를 찾는 것 같았다. 간혹 표시가 있어야 할 곳에 없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때는 가리비 대신에 노란 화살표를 그어 놓을 경우가 많다. 이번에도 노란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나는 노부부와 같이 나란히 걸어갔다. 

한참을 가다가 보니까 두 분은 오던 길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리비 표시를 보지 못했고, 노란 표시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시 가리비를 확인하러 가는 것 같았다. 바로 전 노인들이 헤맬 때는 노란 화살표 두 개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혼란을 줄 수 있는 표시이다. 

“화살표를 함부로 긋지 말라”라는 말을 하고 싶다. 

잘못 그은 화살표가 순례객에 치명적일 수가 있다. 화살표를 보고 길을 잘못 가도 다시 올 수도 있지만, 낙오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화살표가 특히 숙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표시한 경우가 많고, 노란 페인트 화살은 공식적인 표시가 아니라 순례객을 돕기 위해서 길에 표시되어 있다. 이런 화살을 함부로 그어서는 안 된다. 

 

어제 묵었던 도심을 벗어나면서 아침 해가 구름 사이로 밝게 떠오르고 있다. 오랜만에 떠오른 해를 본 것이다. 아마도 저 해는 고향에서 보던 해와 같은 것일 것이다. 

오늘도 날이 밝아오자 걷는 길은 온통 밀밭이었다. 

밀밭을 지겹도록 걷다가 보니 멀리 삼각산 밑에 작은 마을이 보인다. 그 마을에 성당 건물이 보이니까 아마도 그곳을 지날 것이다. 

계속되는 수많은 밀밭을 보다가 새로운 밀밭을 보았다.

밀밭이 아니라 밀 산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비록 높지는 않지만, 산봉우리가 세 개나 있는 밀 산이 있었다. 그 넓은 산에 밀이 자라고 있다. 

 

순례길은 앞서가던 사람과 만나기도 하고 뒤에 오는 사람이 앞서 나가기도 한다. 걷다가 여러 사람이 가기도 하지만, 혼자서 걷고 있을 때가 많다.

이제 같이 가는 사람도 없이 밀밭 길을 혼자서 걸어간다. 늦은 오후 무렵에 길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한 마음과 기쁨이 찾아온다. 내가 자유로워진 기분이다. 이런 상태를 내가 여행하면서 바라던 느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순례길에는 노인들과 젊은이가 함께 가는 길이다. 그냥 보기에는 노인들이 훨씬 많아 보인다. 이 순례길은 과거를 돌아보는 길이기도 하지만, 미래를 설계하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성지를 순례하면서 믿음을 굳건히 하고, 옛 믿음의 선조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노인들이 이 순례길을 많이 찾는 이유가 살아온 것을 돌아보고 자기 삶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고 노년의 시간에 자기와의 만남의 시간을 갖기 위함일 것이다.

젊은이들이 이런 순례길은 걸으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더 좋을 길이라 생각하지만, 현실은 노인들이 더 많은 것을 보면 삶이 고단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저녁에 쉴 곳은 로그로뇨라는 제법 큰 도시이다. 

멀리 오늘 유숙한 로그로뇨가 보인다. 노인들이 순례길을 젊은이들과 비슷한 시간에 숙소에 도착하는 것은, 쉬지 않고 계속 걷기 때문이다. 젊은이의 보폭과 속도의 차이를 쉬지 않고 걷기 때문에 비슷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도시의 알베르게도 성당 주변에 있었다. 

로그로뇨는 에브로 강이 중심으로 흐르고 다리를 건너기 전에 잘 된 조경과 도로 옆에 색깔별로 핀 장미가 인상적이다. 오늘 묵은 알베르게는 순례길에 도시마다 지정된 공식적인 곳이다.

 

숙소에는 첫날 피레네를 넘으면서 만나서 여러 번 같이 걸어온, 프랑스 아줌마가 벌써 와서 말은 통하지 않지만 반가워한다. 알고 보니까 나와 동갑이다. 

곧이어 노부부가 도착을 했다. 노부부는 정답게 손을 잡고 들어오면서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인사를 한다. 순례를 마치고 쉴 시간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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