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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익 Jun 08. 2023

믿음이 있는 순례자

별생각 없이 앞에 가는 이탈리아 남자 두 분을 따라서 갔다. 두 분은 걸음이 빨라 앞서가고 뒤에서 계속 따라서 걸어갔다. 내 뒤에는 또 다른 분들이 여럿 따라온다. 

가리비 표시나 화살표를 보지 않고 앞에 가는 사람만 믿고 따라가는 것이다. 뒤에 오는 사람도 나를 따라서 계속 오고 있었다. 상당한 거리를 갔을 때 앞에 가는 두 사람이 길을 찾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는 벌써 많이 길을 벗어나서 제법 먼 거리를 온 것 같았다. 내 뒤에 오는 사람들도 같이 모여서 순례길을 찾았지만, 가리비 표시나 화살표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일행이 여러 곳을 헤매다가 지나가는 차를 세워서 순례길을 물어 다시 순례길로 돌아왔다. 길까지 잃고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가 왜 여기를 걷는지? 걷기 연습을 하는지, 순례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얻으려는지? 마음이 복잡해 온다. 지금 와서 또 갈등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마음이 그러니까 발걸음도 무겁다. 

다시 큰 숨을 쉬면서 맑은 공기라도 실컷 마시자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끝까지 걸어보자는 것으로 마음을 추슬렀다. 


어제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밭들을 보면서 걷다가 보니, 멀리 소 한 마리 모형이 산 위에 우뚝 서 있다.

높은 곳에 서 있는 소는 아래를 보면서 순례객들이 제대로 걷는지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멀리 있는 마을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스페인은 소를 못살게 하는 나라이다. 투우에서 피가 솟구치고 끝내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을 환호하는 나라이다. 이러한 투우 경기를 관광상품으로 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지금은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서 투우 경기를 하지 않는 도시도 생겨났다고 한다. 팜프로나에서는 시가지로 소 때를 모는 것을 축제까지 하고 있으니까 어느 나라보다 소를 괴롭히는 나라이다.

산 위에 소 모형은 그동안 괴롭힌 소에 대한 미안함을 표시하기 위해서 만들었으면 다행이다. 


소 모형이 멀어져 가는 곳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576Km 남았다는 표시가 있다.

전체 거리가 800Km인데 제법 온 것 같다. 사실 시작을 하면 사람들은 끝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 순례길도 끝이 있으니까 가는 것이다. 

이 길을 걸으면서 마음이 부드러워지려고 노력은 하지만, 아직 내 마음은 부드러워지려고는 하지만 부드러워지지는 않는다


하룻밤 묵는 곳은 “나예”라는 시냇물이 흐르고 언덕이 있으며 풍광이 좋은 곳이다.

뒷산 가장 높은 곳에 십자가가 서 있었다. 여기서 “소 도밍고” 성당까지는 20Km 남았다. 

다음날 너무 일찍 출발해서 어두워 순례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 빛으로 간신히 찾아가고 있는데, 앞에 밝은 랜턴이 가고 있어 따라 붙였다. 중년 남자가 큰 배낭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다. 서로 처음 보지만, 순례길 이른 새벽에 같이 가면 동반자가 되고 길동무인 것이다. 겨우 국적은 주고받았지만, 자기 이야기들을 열심히 하지만, 서로가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 남자의 포르투갈 사람이고 순례자의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어두운 새벽에 포르투갈 남자의 헤드 랜턴으로 한 시간 이상 걸으니까 날이 밝아온다. 오늘은 하늘에 온통 구름이어서 날이 더 늦게 밝아 왔다. 

그래도 뒤돌아보니까 하늘과 대지 사이에 틈이라도 생긴 것 같이 밝은 긴 줄이 새벽하늘에 나타난다. 포르투갈 남자도 그 광경이 신기한지 뒤돌아서 오랫동안 구경했다. 

날은 서서히 밝아오고 아직은 하늘에는 구름으로 덮였지만, 내가 묵었던 숙소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십자가가 육안으로도 잘 보인다. 포르투갈 남자가 그 십자가를 핸드폰으로 촬영을 하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서 찍었다.


그런데 내 핸드폰은 성능이 별로인지 그 십자가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내 핸드폰을 포르투갈 남자가 보고는 무어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 번 되풀이하고 손으로도 설명하니까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의 핸드폰에 산 위의 십자가가 나타나지 않아도 당신의 머릿속에 그 십자가를 기억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믿음이 돈독한 사람이 마음에서 나오는 말인 것 같다.

이 포르투갈 남자는 진정으로 성지순례를 하러 온 성직자인 것 같았다. 메고 있는 배낭을 들어보니, 너무 무거워 무게가 얼마냐고 물으니까 15Kg이라고 했다. 그런 엄청난 배낭을 메고 고행의 길을 걷는 순례자인 것이다. 


첫 마을이 나타나자 포르투갈 남자는 그 마을 성당으로 들어가면서 다음에 보자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마을을 내려오다가 갑자기 강렬한 햇볕이 구름 사이로 나와서 비추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오래 비추지는 않았지만, 그 햇볕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마치 순례객에게 천지창조의 순간을 보여 주려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러나 잠깐 비춘 햇볕이지만 비친 곳이 유난히 밝아 보인다.

변함없는 밀밭 길을 걸어가면서 마음의 평온함을 느껴지고 한없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어제와는 마음이 완전히 다른 것이 너무 신기하고 이렇게 마음이 쉬게 변하는 것이 정상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 자신을 긍정하는 마음이 생기고,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평온을 얻고 만족하면서 살면 된다는 생각이 든다. 

두 개 마을을 더 지나서 소 도밍고 성당 마을이 나왔다. 이 마을의 성당은 다른 곳보다 규모가 크고 여러 조형물이 있다.


이 소 도밍고 성당 마을을 지나서 지루한 순례길이 계속된다. 

오늘 가려는 베로라도 마을까지는 다섯 개의 마을을 지나야 도착할 수 있다. 이제 마을을 지날 때면 순례길을 찾는 요령이 생긴다. 순례길은 그 마을의 성당을 꼭 지나기 때문에 성당 쪽으로 표시를 찾으면 된다. 큰 도시가 아닌 곳에서는 마을에 성당의 종탑보다 높은 건물은 없었다. 아마도 더 높게 짓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심지어 종탑보다 지대가 높은 곳에 건물도 없는 것 같다.

마을은 계속 나왔고, 밀밭도 계속되었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늘 옆에서 같이 걷는 밀밭도 익어가는 것 같다. 걸어가는 길에 밀밭이 익어가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베로나도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힘이 들어 마지막 마을에서 오늘 유숙하려고 했지만, 숙소가 마땅치 않아 힘들지만 걸어갔다. 또 마지막 길이 도로 바로 옆으로 난 길이다. 6Km 이상 도로 옆길을 달리는 차 소리를 들어가면서 걷는 길은 고통스럽다.

이렇게 힘든 길을 걸어가면서 길이 있으니까 걷는다는 것이나, 시작했으니 끝까지 간다는 것을 넘어서 무엇인가 얻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힘이 드니까 힘든 만큼 얻고 싶은 것이다. 언 듯 생각나는 것이 삶은 진지하다는 것을 깨닫고 가는 것이다. 삶에서 어떤 때라도 진지하게 살아야 할 것 같다. 


날씨가 이 나라에서 자랑하는 돈키호테처럼 변덕이 종잡을 수가 없다. 아침 일찍이 날씨가 좋아지더니 오전 내내 온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서 흐렸다.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이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기온이 내려가면서 순례객들은 거의 긴 옷을 입고 걷고 있고, 페팅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더니 오후에는 날씨가 화창하게 맑아지더니 더워서 반팔을 입게 만들고 있다. 


이 순례길은 혼자 걸어야 제격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어제 한 구간을 추월해서 얼굴 익은 사람이 없기도 하지만, 오늘도 혼자서 출발해 걸어간다. 여기 순례길은 그렇게 힘이 들지 않고 숨이 찰 정도로 아니니까 걸으면서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길이다. 생각을 많이 하려면 다른 사람을 신경 쓰거나 방해받지 않고 혼자서 걷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러니 산티아고 순례길은 혼자 걷기에 어울리는 길인 것 같다.


또 하룻밤 묵어갈 마을이 들 중간에 붉은 기와지붕이 모여 있다. 들어가는 입구는 이름 모를 꽃이 만개해서 순례객을 맞이하는 것 같다. 오늘도 한 구간 더 걸어서 또 다른 순례객을 만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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