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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익 Jun 10. 2023

아들아 천천히 걸어라

아침에 세면장에 가서 거울을 보니까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물론 내 얼굴이니까 낯이 익지만, 그보다 내가 아닌 낯익은 얼굴을 보는 것 같다. 어릴 때 본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았다. 내 얼굴이 할아버지를 닮아 간다는 것을 느낀다. 

1905년 병오생 할아버지는 수염이 많지 않았다. 많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흰 수염이 내가 순례길을 걸으면서 자란 흰 수염이 비슷한 것 같다. 

나이 들어가면서 조상을 닮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렸을 때 본 늙은 할아버지의 모습을 오늘 세면장 거울에서 다시 보는 것이다. 


순례길의 아침은 밝아오고 있다. 오늘은 화창한 날이 계속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늘 해가 나와야 바르던 선크림을 오늘은 아침에 바르고 출발한다. 오늘은 같이 묵었던 일행 한 분과 같이 말동무를 하면서 걸어간다.

처음에는 밀밭이지만 얼마 안 가서 산길로 접어든다. 산길도 오늘은 돌길이라서 걷기가 조심스럽다. 한참을 올라가니까 산길의 고개 정상에 도달했는데, 그곳에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서 있다. 여기는 가장 높은 곳에는 늘 십자가 있어야 할 자리인 것 같다. 


같이 가던 일행도 정상에서 뒤로 처져서 다시 혼자 걸어간다.

순례길에서 아침에 출발하는 시간은 다르지만, 보통 저녁이 되면 같은 알베르게에서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같이 출발을 해도 걷다가 보면 떨어지기도 하고 앞서가기도 하면서 보통 혼자 걷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순례길은 저녁에는 같은 숙소에서 만나니까 서로 인사하는 반가운 동행 길은 것이다. 동행이 있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고 보통은 혼자 걷는 것이 대부분이다.


순례길에 같이 가는 동행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고 서로 의지하면서 걷기 때문에 외롭지 않을 것 같다. 동행을 하는 사람은 부부가 많고, 친구나 가족이 같이 가는 경우가 더러 있다. 혼자 가면서 걷는 순례길이 좋을 수도 있지만, 실제는 같이 걸을 사람이 없어서 혼자 걷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같이 걸으면서 마음이 맞으면 즐거운 길이 되지만, 그 반대가 되면 그 길이 끝나는 시간까지 짜증 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순례길에서 같이 걷는 것은 속도를 맞추고 서로를 배려하면서 떨어지지 않고 걷는 길이다. 그렇게 같이 걸으면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면 걷기가 힘든 것이다.


순례길에 같이 걷는 길은 의미 있는 동행이다. 

오래 같이 산 부부가 서로를 배려하고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걷는 순례길은 의미 있고 멋있는 길이고, 뜻 맞은 친구와 같이 젊은 청춘을 이야기하고 걷는 길은 희망의 길이다. 또 부모님을 모시고 걷는 길은 부모님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흐뭇한 길인 것이다. 

순레길에 가장 많은 것은 부부 동행이다. 그것도 나이 많은 노부부의 동행이 많다는 것은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서로를 이해하고 부족한 것을 채워 주면서 옛 이야기하면서 걷는 것 같다. 나이 든 노부부가 웃으면서 걷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고, 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허리 굽은 남편을 위해 배낭을 메고 걷는 노부인이 늘 남편에게 가는 눈길에는 정겨움이 있었다.


밀밭은 아직 푸르지만 제법 밀알이 알이 차 가고 있다. 그 푸른 밀밭이 바람이 부니까 푸른 물결이 파도처럼 치고 있다. 한차례 푸른 밀밭 물결이 치고 나가고, 다시 치면 파도치는 것과 비슷하다. 멀지 않아 이 푸른 물결이 황금물결이 될 것이다. 


지금 가는 곳은 스페인 북부에 있는 옛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던 부르고스로 가는 길이다. 부르고스에 들어가는 순례길이 도로 길인데, 한없이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다. 이 도시가 다른 도시와 다르게 순례객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표시가 잘 보이지 않는다. 부르고스 대성당에 가는 중간에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멋있게 만들어 놓았다. 부르고스는 강 따라 걷는 길도 멋있고 나들이 나온 사람도 많다. 그런데 순례길 표시는 정말 인색하다. 순례객들이 우왕좌왕하는 더러 모습이 보인다. 

부르고스 대성당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한잔하면서 즐기고 있다. 그 광장에 있는 순례객 조형물은 걷다가 지쳐서 숙소를 찾기 전에 순례객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브르고스는 스페인에서도 큰 도시인데, 순례길에 대한 표시가 드물어 아침에 출발하면서 도시를 헤매지 않고 벗어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브르고스 아침에 씩씩하게 길을 잘 알 것 같은 브라질 아줌마들의 뒤를 따라서 길을 걷는다. 한참을 가다가 브라질 아줌마들도 불안한지 행인에게 길을 묻는 것 같다. 한참을 와서 이제는 돌아갈 수가 없어서 믿고 따라갔다. 브라질 아줌마들이 길을 바로 찾기를 바라는 마음만 갖고 따라가는 것이다. 거의 한 시간을 순례길을 찾아서 걸어가는데, 가는 방향이 계속 직선이어서 방향은 맞는 것 같은데, 순례길 표시는 보이지 않는다.

브라질 아줌마들은 순례길을 찾으려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애를 쓰는데, 바로 20여 미터 뒤에는 금발의 젊은 여성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다. 그냥 앞에 사람이 길을 잘 찾을 것이라고 믿고 따라오는 것 같다. 귀에는 이어폰을 낀 것이 아마도 속 편하게 음악을 듣고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따라만 온다. 얄미울 정도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태평하게 걷고 있다. 아직도 순례길 표시는 발견하지 못하고 부지런히 걷고 있다. 그러다가 브라질 아줌마들이 환성을 지르고 있다. 순례길 표시를 발견한 것이다. 늘 보던 표시지만 무척 반가운 표시이다. 

그때까지 젊은 여자는 아무런 동요 없이 이어폰을 끼고 계속 따라와서 자연스럽게 순례길을 가고 있다. 아마도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가는 것 같다.

노래 들으면서 여유 있게 가고 있는 젊은 여성의 모습을 보니까, “소풍 같은 인생”이란 노래가 생각난다. 젊은 여성은 그렇게 소풍 가듯이 인생은 즐겁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여유롭게 걷는 모습이다. 

우리는 살면서 희로애락을 다 겪어야 한다.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을 다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슬플 때는 울어야 하고, 기쁠 때는 기뻐하지만, 성날 때는 성을 내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지나는 마을 벽에 ”부엔 카미노“가 붙어 있다.

”부엔 까미노“ 는 스페인 말로 좋은 길이란 뜻이다. 순례자들은 서로 지나면서 이 말로 인사를 한다. 이 마을을 지나가다가 마음속에 들리는 소리가 있다.

“익아 천천히 걸어라” “세상 급할 것 없다, 천천히 걸어라”라는 모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평소 급하게 사는 날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이렇게 걸으면서 모친이 생각나고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세상의 연은 단순해서 가까이 오래 같이 산 사람이 가장 오래 기억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보면 기분이 바뀌는 것을 느낀다.

우울했던 마음도 어느새 밝은 마음으로 바뀐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렇게 마음이 쉽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순례길을 걸으면서 체험한 것이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기분 좋은 마음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끝없는 밀밭 길을 걸어가니까 멀리 성당의 모습이 밀밭 끝에 보이는 것 같다. “보아딜라” 마을이다. 성당을 지나 마을을 벗어나니까 넓은 들판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있다. 큰 강은 아니지만 많은 물이 아래도 흘러가고 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수로가 계속 이어지다가 어느 곳에 가니까 다시 방향을 바꾸어서 끝없이 직선으로 수로가 이어진다. 바꾸어진 방향을 따라서 한참을 가다가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에서 순례길은 수로를 따라서 계속 직선으로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직선 수로를 따라서 걷는다. 

순례 표시는 없지만, 순례길은 보통 직선으로 만들어져 있고 수로를 따라가는 것이 직선이라서 의심하지 않고 계속 수로를 따라서 걸었다.

계속 가도 순례 표시는 보이지 않아 약간은 의심했지만, 직선 길이니까 표시를 생략한 것으로 생각하고 계속 걸어갔다. 

다시 도로와 만나는 곳에서 순례 표시를 찾아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길을 잘못 왔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너무 멀리 와서 아까운 생각이 나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서 돌아가지 않고 가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곳에서는 길을 잃으면 지나는 사람에게 “까미로”만 외치면 사람들은 잘 가르쳐 주고 있다. 

이른 아침에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다행히 낚시하는 사람에게 물어 순례길 합류하는 길을 알았다. 순례길에 합류해서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 숙쓰러워 조용히 앞만 보고 걸었다. 마치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순례길에 돌아오니까 혼자서 걷는 것보다 순례길을 같이 걷는다는 소속감을 느끼면서 마음이 편하다. 실제로 순례길을 걷는 지금은 어떤 곳에 소속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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