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종익 Jun 11. 2023

구름 따라 걷는 길

수녀들이 운영하는 알베르게는 가격도 저렴하고 너무 친절한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걷는 순례길은 한쪽에는 가로수이고 다른 쪽에는 밀밭이 이어지는 직선 길이다. 

이 구간은 단조롭고 풍경도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사진을 촬영해 놓으면 가로수와 밀밭이 거의 비슷해서 구분이 안 되는 곳이다. 이 길은 너무 긴 직선 밀밭 길이니까 그냥 생각 없이 걷다가 쉼터가 나오면 쉬고 다시 걷기만 하는 길이다. 

종교인 순례자들에게는 옛 성인을 생각하는 기회가 되겠지만, 비신자에게는 같은 모양의 단순하고 한없이 지루한 길이다. 걸어도 걸어도 보이는 것은 밀밭이고 하늘이다. 

지금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한 곳에 몰려있다. 소나기라도 뿌릴 기세이다. 

실제로 구름이 무거워 보인다. 멀리 보이던 구름이 다가오더니 갑자기 소나기를 뿌리기 시작한다. 


잠시 뒤 비가 그치고 검은 구름은 사라지고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이 보인다. 아직도 끝이 가물거리는 밀밭 길을 걸어간다. 이 길은 걸어도 줄어들 것 같지 않은 길이지만 그래도 기계적으로 걸어간다. 

다시 햇볕이 내리쬐는 길을 혼자서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간다. 햇볕은 강하지만 바람이 불어주어 걷기는 시원하고 하늘은 무척 넓어 보인다.

그늘이 없는 길을 오직 그림자를 동행 삼아 끊임없이 걷고 또 걸었다. 왜 걷는지 생각도 할 필요도 없고 길이 있으니까 걸어가는 것 같다. 

다시 검은 구름이 몰려있는 구간이 머리 위에 떠 있다. 오늘은 하늘의 구름이 뭉쳤다가 다시 흩어지고 각가지 모양의 조화를 부린다. 하늘의 구름이 미세먼지도 없이 끝없이 변화하는 것을 보니까 스페인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인 것 같다. 


끝없는 지평선만 보이더니 멀리 마을의 종탑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온 길이 밀밭만 계속되는 17Km를 걸어온 것이다. 그 옛날 이 길을 걸었을 순례자들도 끝도 보이지 않는 직선 길을 걸었으면 깨달음을 얻고 돈독한 신앙심을 마음에 다졌을 것이다. 이 지루한 구간에서 오늘날 순례자들도 무엇인가 생각할 것이지만, 나는 별로 생각나는 것은 없고 지루하고 다리 아픈 구간이라는 생각뿐이다. 


점심은 길 걷는 중간에서 배낭 속 준비한 빵과 참치 통조림을 빵 사이에 넣어서 먹으니까 든든한 한 끼가 된다. 사실 벌써 집을 떠 난지 두 달 가까이 되지만, 아직도 김치나 된장 생각이 나지 않고 어느 나라 음식이든지 입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일단은 여행자의 조건에 하나는 맞은 것이다. 


지금은 걸어가면서 보이는 밀밭은 벌써 황금빛을 띠고 있다. 처음 밀밭을 볼 때는 푸른 밀밭이었는데 걷기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나고 보니까 밀들도 익은 것이다.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밀밭 길을 걸으면서 하늘에 있는 구름을 보면 마음이 후련함을 느낀다. 구름 모양이 제각각이지만 계속 변하는 것이 볼만하다. 실제로 이곳은 넓은 들판과 하늘만 보이는 곳이다. 

하늘은 구름 모양만 보아도 지루하지 않을 정로 맑은 하늘과 구름들이 떠 있다. 이렇게 흰 구름만 떠 있지만, 어느 순간에 검은 구름이 몰려올지는 모른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376Km 남았다는 표시가 보이는데 벌써 반 이상 온 것이다. 

원래 스페인은 옥수수가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그동안 옥수수밭을 보지 못하다가 여기서부터 옥수수밭이 보이기 시작했다. 옥수수밭에 물을 주는 시설을 설치해놓고 있다. 넓은 밭에 시설의 규모도 엄청나다.

서양 사람들의 보폭이 확실히 긴 것 같다. 같이 출발해도 한참을 걸어가면 뒤로 처지는 경우가 많다. 오늘도 나이가 많고 흰 수염이 무성한 노인과 같이 출발을 해서 갔는데, 갈수록 거리가 멀어지더니 마침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앞서 나간다.

나이 들어도 걸음걸이가 무척 빠른 것이다. 따라가려고 해도 어려울 것 같아 그냥 내 페이스대로 걸었다. 

한참을 가다가 오랫동안 한국말을 할 기회가 없어서 입이 심심했다. 마침 반대편에서 반대로 걷는 순례객 두 명이 오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저 앞에 노란 조끼를 입고, 흰 수염이 많은 노인을 봤어요”라고 큰소리로 물었다. 그것도 두 번을 반복해서 물었다. 

순례객은 주의 깊게 듣더니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제스처를 한다. 당연히 모를 것이다. 우리말로 물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료해서 장난을 친 것이다. 그러고는 “부엔 까미로”했다. 


현재에 만족을 못 하고 불편한 마음이 있는 것은 아쉬웠던 과거를 잊지 못해서 그런 경우가 많다. 과거의 미련과 집착이 현재를 괴롭히는 것이다. 

잊기 위해서 노력해도 잘 잊히지 않고 과거의 좋았던 일은 기억나지 않고, 나빴던 것은 꼭 기억나는 것이다. 

만일 이 순례길을 아픈 상처를 잊으려고 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아픈 상처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걷는다면 차선이고, 그 아픈 상처를 곱씹어서 상처를 터뜨려 끝없이 아파하면서 걷는 것이다. 그리고 상처가 시간이 가면서 아물게 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상처를 완전히 드러내어 내성을 갖게 하고, 여기서 또 다른 희망이나 상처를 잊을 수 있는 긴 시간을 걷는 것이다. 


순례길을 걷고 맥주를 한잔 하는 것도 여독을 풀기 위해서 먹기도 하지만, 다른 것은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외로워서 한잔 하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이고 외로움 존재라고 말은 하지만, 혼자 있으면 외로운 감정을 오는 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혼자 있는 연습을 하고, 자존감을 키우고, 고독을 즐겨야 한다고 말이나 생각은 하지만, 찾아오는 외로운 감정은 어떻게 할 수 없다. 

지금 혼자 걷는 순례길이 외로운 길이라는 알면서 간다. 혼자 걸어가는 걷는 이 순간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걸어가면서 외로움을 느낀다. 아무래도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이고 어느 정도 외로움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가고 있는 순례길은 레온으로 가고 있다.

레온은 스페인 서북부의 중심도시이고 옛 레온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걷다가 옆을 보니까 밀밭과 옥수수밭이 섞여 있는 들판 길에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끝없이 서 있는 순례길이다. 

오랜만에 숲길이 나오고 다리와 시원한 강물이 흐르는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도 상당히 큰 지만, 레온이 가까워지니까 그에 따른 위성도시인 것 같다.


한참을 가다가 천둥소리가 들린다. 하늘을 보니까 바로 위에 먹구름이 지나가고 있다. 

이곳은 이런 검은 구름이 있으면 비가 한차례 내리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아마도 천둥까지 치는 것을 보니까 비가 올 것 같다. 어디 비를 피할 집을 찾았으나 이곳의 집은 처마가 없어서 그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비를 피할 수가 없는 건물들이다. 

멀리 큰 도로 밑으로 터널이 보인다. 바삐 뛰어가니까 터널에 도착하자마자 소나기가 내린다. 터널 안에서 내리는 비를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늘만 소나기를 두 번 만났다. 

내리던 비가 그치니까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이 날씨가 화창해지고, 구름도 흰 구름이 되었다.


다시 길을 걷는데 레온에 거의 다 온 것 같다. 작은 언덕만 넘으면 레온인 것 같은데 언덕 밑 마을에 성당이 보인다. 그 성당에는 꼭대기에 십자가 위에 새집이 지어져 있다.

높은 곳을 좋아하는 것은 성당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새들도 높은 곳을 좋아하는 것 같다. 성당 십자가 바로 밑에 새집을 지어져 있다. 시골 성당의 가장 높은 십자가 종탑 밑에 새집이 있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레온 시내에는 성당과 높은 건축물도 있고, 복잡한 곳이어서 알베르게를 찾는데 쉽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다른 순례객이 가는 곳을 따라가서 숙소를 잡았다. 레온 시내는 시민들과 순례객들이 어울려서 시끄럽게 볼만한 곳이 많은 도시이다. 


 


 


 


 








작가의 이전글 아들아 천천히 걸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