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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익 Jun 12. 2023

황혼의 두 노인

멋진 가로수가 있는 순례길을 지나서 멀리 도시가 보인다. 이 도시는 “메리데라”이다. 도시로 들어가는 석 다리를 건너서 도심으로 순례길이 나 있다. 그 도심의 횡단보도 앞에서 며칠간같이 걸어온 두 노인을 만났다.


먼 곳에서 온 듯한 두 노인은 어깨가 굽었지만 걸음은 매우 빨랐다. 등에 멘 가방은 간단한 물건을 넣을 수 있는 작은 것으로 물병을 달고 다니는 것이 특이하다. 메고 걷기에 적당한 작은 가방이다. 그리고 지팡이를 짚을 나이임에도 지팡이 없이 걷고 있다.

오늘도 두 노인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 

어제와 그저께 이틀 연속 따라가다가 노인들이 너무 빨리 걸어서 놓친 것이다. 두 노인은 아마도 같은 동네에서 자고 나보다 늦게 출발하고 도착은 빨리하는 것 같다. 

시내를 따라가는데 두 노인이 맥줏집으로 들어간다. 하루에 한 번만 쉬고 걷는 것 같은데, 지금 가는 곳이 한번 쉬는 곳이다. 나도 맥줏집에 들어가서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한 노인은 콜라를 시키고, 다른 분은 빵을 시킨다. 나는 맥주를 시켰다. 한참 뒤에 일어나는 두 노인을 따라 일어났다.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곳을 노인들은 나란히 걷는다. 나도 열심히 따라 걷지만, 상당히 빠른 보폭이다. 

마을에서 어미 소를 만나 두 노인들은 소를 한참 바라보면서 서서 쉬는 여유도 부린다. 소를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둘 사이에 공감하는 추억이 있는 오랜 친구사이처럼 보인다. 

다시 언덕으로 올라간다. 노인들이지만 오르막길도 그렇게 속도가 줄지 않는다. 따라 올라가는 내가 숨이 차다. 앞에 가는 한 여자분을 추월해서 두 노인은 지나간다. 순례길이 48.354Km 남았다는 표지석을 지나간다. 다시 두 노인은 남자 한 분과 여자 한 분을 추월해서 지나간다. 

마을로 들어서면서도 속도는 줄지 않는다. 멀리 남자 한 분이 가고 있다. 이 남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추월을 한다.


동네를 벗어나 숲길을 가면서 또 여자 한 분을 지나서 두 노인은 걸어간다. 뒤를 따라가기가 힘이 들지만 계속 따라 걷는다. 

그런데 두 노인은 이제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걷고 있다. 뒤를 돌아보는 것을 잊은 사람들처럼 뒤는 보지 않는다. 

두 노인은 옛 순례길을 걸었던 성지 순례자가 환생해서 걷는 것 같다. 저렇게 나이 든 노인들이 지팡이도 없이 오르막도 힘 있게 걸을 수 있는 것은 옛날 순례자의 환생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 내리막을 지나서 오르막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노인들은 지치지 않고 계속 걸어가지만 나와는 거리가 벌어지고 있다. 오르막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지만, 두 노인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다시 내리막이 나왔을 때 노인들은 상당히 멀리 가고 있다. 오늘도 두 노인을 따라 걷지를 못하고 뒤로 처진다. 

마을에 소들도 한가로이 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옥수수를 심은 밭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적한 시골 풍경이 계속되는 순례길은 한적하고 조용한 길이다. 이제 또 다른 도시가 보이기 시작한다.

두 노인은 벌써 도시에 들어가 숙소를 찾고 있을 것이다. 오늘 묵을 도시는 “아르주아”이다.


걷고, 먹고, 자고, 그리고 일어나서 다시 걷는 순례길도 끝나가고 있다. 

산티아고의 도착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고 의미 있는 말로 표현도 할 수 있지만, 걸어온 날들이 동네 한 바퀴 걸은 것이 아니라 먼 길을 걸어왔다. 

늘 상 보는 아침 태양이지만, 오늘은 동쪽에 안개가 많아서 둥근 모양이 선명하게 보이면서 떠오르고 있다. 

이곳은 소가 많이 사는 목장 지역이라서 목장의 아침이 싱그럽다. 소들은 해 뜨는 아침 녘에 풀을 열심히 뜯는 것 같다.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순례길은 잘 만들어져 있고 시원한 숲길이 대부분이다. 이번에는 큰 대왕 참나무 가로수가 보인다.


시원한 숲길을 걸어가면서 얼마 남지 않은 순례길에서 내가 무엇을 느끼고 얻어 가는지 생각해 본다. 

한참을 생각해도 특별한 것도 없었고, 생각나는 것도 없다. 그냥 이제까지 걸어온 것이고, 또 그렇게 힘들었거나 고생한 기억도 없다. 

물론 하루를 걸으면 마지막에는 다리가 아프고 발걸음이 천근같이 여겨졌던 때는 몇 번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날도 특별히 기억되는 날은 없다. 

마음속에는 어떤 것이 쌓여졌을지는 모르지만, 굳이 마음에 느낌으로 남는 것이 없고, 그런 것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지금 걷는 걸음을 무겁게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무엇을 느끼려고 또는 얻으려고 걸어온 것이 아니라, 그냥 길이 있어서 걸은 것으로 마음을 정리하니까 편하다. 

그래도 걸은 것은 사실이고, 그것으로 족하다.


잘 다듬어진 순례길 마지막 코스에서 순례객들도 많이 늘어났다.

순례길 중간에 있는 까미노의 가리비 문양과 조롱박이 새겨진 비석에는 신발과 각자의 소원을 기원하는 내용이 적힌 돌들이 가득하다. 

더디어 10Km가 남았다는 표지석이 나왔다. 여기서도 순례객들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기념사진을 많이 찍고 있다.

오르막이 계속되고 있다. 내려갈 때는 별로 내려가지 않고 오르막은 긴 것 같은 느낌이다. 얼마 남지 않아 곧 목적지가 나올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지친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완만하다고 순한 길이라 했는데, 마지막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만만히 보지 말라는 것 같다. 긴 오르막에서 반대로 오는 순례객들이 있다. 이분들은 산티아고 콤포 스텔라 성당을 도착해서 다시 온 곳으로 가는 순례객이 수도 있다.


산티아고를 넘어가는 고개에 도착해 보니까 큰 나무 그늘에 많은 순례객들이 쉬고 있다.

충분히 쉰 순례객들은 긴 내리막을 내려가서 산티아고 시내에 들어갈 것이다. 내려가는 숲길 사이로 멀리 산티아고 시내가 보인다.

그리고 다시 숲길을 지나 한참을 내려오니까 산티아고 입구에 오래된 돌기둥과 석상들이 순례객을 맞이한다.


이제 산티아고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지만, 콤포 스텔라 성당의 첨탑은 보이지 않는다. 산 너머에 있을 것 같다. 시내에 들어오니까 도로에 가리비 표시도 확실히 잘 되어 있다. 물론 이 표시는 산티아고 콤포 스텔라 성당을 향한 표시일 것이다.

시내 초입에 순례객을 지키는 기사의 동상이 당당히 서 있다. 가슴이나 방패에 기사 표시가 선명하게 나 있다. 이 도시가 순례객의 도시라는 것이 곳곳에 있다.

멀리 도시 건물 사이로 성당이 보이기 시작한다.


갑자기 낯익은 뒤 모습이 나타난다. 마지막 여럿 날 오래 같이 걸어오다가 사라진 두 노인이다. 아직도 씩씩하게 지팡이도 없이 걷고 있다.

순례길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마지막엔 콤포 스텔라 성당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두 노인을 만난 것이다.

서로 다시 만나는 것이 반가운지 말은 통하지 않지만, 한참을 마주 보면서 웃었다. 그리고 기념사진을 찍고 순례자 인증서를 같이 받고서 작별을 했다.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할 인연이지만 서로 온 곳으로 잘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콤포 스텔라 성당 광장에는 노병들이 열병식이 한창이다. 지붕에 특이한 조각이 있는 건물과 주변 건물을 구경하고, 다시 콤포 스텔라 광장으로 돌아오니까 열병식이 끝나고 즐거운 음악이 나온다. 브라질 순례객들이 춤을 추면서 즐기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텅 빈 광장에 순례를 마친 사람들이 눕거나 앉아서 성당을 바라보면서 걸어온 길을 생각하는 것 같다


28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쳤지만, 어제 생각한 것처럼 여기 순례길이 있어서 걸은 것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처음 시작하는 피레네산맥을 넘을 때, 안개 걷힌 광활한 광경에 가슴 트이는 기쁨을 맛보았고, 끝없는 밀밭을 걸으면서 고독함과 외로움도 느꼈지만 많은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힘들 때도, 마음 벅찰 때도 있었지만, 이 길은 우리가 사는 인생길과 비슷한 길이었다. 길은 순하고 이곳과 닮은 순박한 길이었다.

내가 걸어온 아름다운 산티아고 순례길은 앞으로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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