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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익 Dec 10. 2023

도서관을 다시 찾는 노인들

수십 전 이른 새벽에 인왕산이 보이는 도서관에 갔었다. 

벌써 여러 사람이 출입문 앞에 줄을 서 있다. 문을 열면 자유 열람실 표를 받아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이다. 자유 열람실은 책이 비치된 곳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가져와 보거나, 본인들이 가져온 책을 보는 곳이다. 이렇게 일찍 온 것은 구석이나 창가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좋은 자리에 앉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도서관 문이 열리자 열람표를 받아 빠른 걸음으로 가장 선호하는 열람실로 갔다. 가장 좋은 열람실은 조용하고 모두 열심히 공부하는 곳이라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 열람실이다. 이런 열람실은 보통 고정적으로 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여기는 몇 년씩 오는 사람도 있어, 1년 정도는 오래 공부한 측에 들지 못한다. 

그렇게 새벽같이 온 열람실도 벌써 자리가 잡혀 있는 곳이 있다. 지난밤에 퇴실할 때 책을 그대로 놓아두고 가서 아침에 다시 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책만 놓고 간 것이 아니라 압정으로 칸막이에 신문이나 종이를 붙여서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원칙은 열람실을 퇴실할 때 자기 물건을 모두 가지고 가야 한다. 그래야 다음날 일찍 온 순서대로 본인들이 선호하는 곳에 앉은 것이다. 

그런데 도서관을 몇 년씩 공부하는 사람들이 좋은 자리에 책을 놓고 가거나 종이로 자기 자리 표시를 해 놓은 것이다. 오랜 시간같이 도서관을 찾는 사람끼리 암묵적으로 자기들끼리 자리를 사유화해서 쓰고 있었다. 

간혹 민원이 들어가 도서관에서 어느 날 밤에 칸막이 책상 위를 깨끗하게 정리해서 일찍 오는 순서로 앉게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도서관에 오래 다니는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 도서관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대체로 일찍 나오고, 밤에 놓고 가는 책도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은 책을 놓고 다녔다. 


도서관의 자유 열람실은 오랜 시간 취직 준비를 하는 젊은 사람들이 오거나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다. 더러는 취직한 사람들이 승진 공부하기 위해서 찾는 곳이기도 했다. 

그 칸막이 안에는 힘들게 본인들이 하려는 공부와 씨름하고 고민하는 곳이다. 시간을 아까워하면서 젊음 시절을 좁은 공간에서 지내면서 희망 고문을 당하고 있는 곳이 이곳이었다. 그래서 몇 년을 이곳에 보내고 성공하면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애쓰는 곳이었다. 


나도 때로는 새벽녘에 일찍 도착하기 위해서 택시를 타고 가기도 했고, 저녁에는 도서관 문을 내릴 때까지 공부하고 늦은 밤에 돌아오던 곳이었다. 그렇게 일찍 찾았던 도서관에서 놀고 싶은 것을 참고 재미없이 보냈던 곳이었다. 지난 세월이지만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의 날이었다. 그 시절 자유 열람실에는 치열하게 경쟁하는 곳이지만, 희망이 있는 곳이라 조용하면서도 의욕이 넘치던 곳이었다. 


한참을 공부하다가 나오면 뒤편에 쉬는 곳이 있다. 

이곳에 모여서 담배 피우는 사람은 담배도 피우고, 담소를 하면서 보낸다. 그렇게 말은 많이 하지 않았지만 한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이니까 만나면 반가웠고, 무슨 공부를 하는지 서로 묻기도 했다. 그러다가 서로 필요한 수험 정보도 교환하고 공부하는 방법이나 성공과 실패한 것들을 나누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 시절 도서관은 취업이나 입학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장소였다. 


평소는 그렇게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 이용하다가 학교에 시험 시즌이 다가오면 학생들이 몰려들어서 자리가 없었다. 그때가 되면 학생들이 새벽같이 나오거나 극성스러운 학부모들이 아침 일찍이 도서관에 줄을 대신 서는 것이다. 다른 자유 열람실도 많았지만, 그곳도 모두 만석이었다. 그럴 때면 잠시 자리를 비운 곳도 자리를 잡은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공부하다가 비워주고, 다시 다른 자리로 옮겨 다니는 학생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때도 오랫동안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유 열람실에는 학생들이 잘 들어오지 못했다. 자리들을 거의 정해져 있었고 분위기 그랬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책이 비치된 열람실은 여기에 있는 필요한 책을 보려고 오는 곳이다. 이곳은 사람들이 많지 않고, 늘 조용한 곳이었다. 이런 곳에는 취업 준비나 입시 준비하는 사람들은 거의 오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열람실에는 도서관에서 나이 든 사람들이 보이는 곳이었고, 그런 사람들은 학문에 관심이 많은 포스였고,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여기도 젊은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필요한 자료를 찾으러 오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가장 많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정기 간행물이나 신문 열람실이었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들어와 주로 신문을 읽고, 도서관을 만남의 장소로 약속해 오는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었다. 


정년을 하고 작년에 다시 그 도서관을 찾아갔다. 

아직은 그 자리에 예전 나무들이 있다. 중간에 있던 분수도 그대로이다. 이제는 나무들이 더 자라서 공원 같은 분위기이다. 멀리 인왕산이 보이는 안견의 기념탑도 그 자리에 서 있다. 많이 자란 나무 사이에 놓은 옛 벤치에는 젊은 청춘들이 즐겁게 담소도 하고, 간간이 나이 든 노인들이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도 보인다. 건물도 변한 것이 없다. 수십 년의 시간에도 변하지 않는 풍광이 반갑다.


오랜만에 머릿속에 그려지는 도서관을 찾았다. 

예전에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자유 연람실을 찾아서 가니까, 이제는 서교로 변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아직은 그 공간이지만 칸막이 책상은 사라지고, 장서가 꽂힌 책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때 그렇게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공부하던 취업 준비생들은 아마도 정년도 지나 퇴직하고 노인이 되었을 것 같다. 


뒤 건물의 자유 연람실도 어떻게 변했고, 요즈음은 어떤 공부를 하는지 궁금해서 그곳을 찾았다. 그 자유 연람실에 사람들이 예전처럼 많지도 않았고, 하는 공부는 입시나 취직시험공부보다는 전문서적을 보는 사람이 보이고 어린 학생들도 간간이 학교 공부를 하는 것 같다.

자유 연람실에는 사람이 많지 않고, 자리가 많이 비어 있다. 자유 열람실도 예전에 비해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거기서 책을 보는 사람도 절반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이곳에 와서 공부하지 않아도 다른 곳에서 하는 곳이 많아졌는지, 아니면 공부를 그렇게 옛날처럼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인지는 모르겠다. 이제 도서관은 원래대로 책을 찾거나 읽고 싶은 것을 보러 오는 곳이 된 것 같고, 자기가 가지고 온 책으로 자기 공부하러 오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예전에 도서관에 왔을 때 이용하던 식당으로 갔다. 식당 건물도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이제는 벽 쪽에 혼밥 할 수 있는 일인 식탁이 추가된 것 같다. 그 시절 구내식당에서는 이곳 메뉴를 이용하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도시락을 싸 와서 이곳을 이용했었다. 날씨가 추우면 싸 온 도시락과 여기서 파는 뜨근한 국물이 있는 가락국수를 시켜서 같이 먹기도 했다. 그때는 도시락을 싸 와서 식당에서 먹던 사람들이 절반은 넘었다.

지금은 거의 식당 메뉴를 시켜 먹고 있다.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 먹는 사람을 찾아보려고 둘러보니까 겨우 한 두 사람이 보인다. 도시락을 싸 와서 먹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니까, 정겹고 옛날에 희망을 갖고, 공부하던 시절이 생각나게 한다. 잠시 가슴이 저며오면서 그 생각들이 그리움으로 변한다.


식당에서 나와 도서 열람실로 올라갔다.

도서 열람실에는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책을 보는 젊은이들이 보였지만, 나이 든 노인들이 절반은 넘었다. 노인들이 도서관을 찾은 것이다. 노인들이 남는 시간에 도서관에 와서 보고 싶은 책도 읽고, 시간 보내기 좋은 곳이다. 여름이면 에어컨이 시원하고 겨울이면 난방으로 따뜻한 도서관에서 보고 싶은 책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방해하는 사람도 없고 비용도 들지 않는 곳이다. 온전히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질 수 있는 곳도 이곳이다. 


세월이 흘러 도서관의 풍속도도 변하는 것이다. 

젊은이보다 노인들의 비중이 늘어난 도서관의 풍경은 낯선 모습이다. 

옛날 새벽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일선으로 물러나 아마 지금 이곳에 온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내가 돌아와서 이곳을 찾은 것처럼 이곳에서 또다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희망을 갖고 찾았던 도서관을 이제는 마음의 편안함과 시간을 보내려고 찾아온 것이다. 


노인들이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부담 없고 좋은 곳이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희망찬 마음으로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은 그래도 젊은이들이 희망을 찾으려고 애쓰며, 앉아 있어야 어울리는 곳이다. 그렇지만 노인들도 이곳에서 인생을 돌아보는 장소로는 적당하다. 나이 들어서도 바쁘게 정신없이 사는 것보다 조용히 마무리하고 아름다운 미소가 있는 얼굴을 만들어 가는 곳으로 도서관이 나쁘지 않다. 


취업이나 입시를 위한 전쟁터 같았던 도서관이 이제는 조용히 과거를 돌아보고 나를 찾아서 돌아온 노인들이 많이 오는 곳으로 변하고 있다. 

이 도서관은 아직도 시끄러운 도심 가운데 있지만, 사람들이 여유를 가질 수 있는 한적한 곳이다. 주변은 그렇게 변화가 많아도 이곳은 아직 수 십 년 전과 같이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 오히려 나무들이 더 자랐고 도심의 소공원이 되었다. 

과거의 열정과 추억이 있는 도서관을 다시 올 수 있는 것이 감사했다. 젊을 때 희망에 부풀어 준비했던 노력과 열정이 아직 가슴에 조금은 남아 있는데, 이제 모든 것이 종료될 시간으로 가고 있다. 다시 그런 열정을 일어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곳에 돌아오니까 예전에 나도 희망과 열정으로 살았던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이 나의 청춘이었다. 

다시 도서관을 나오면서도 오래된 시멘트로 만든 분수대에 아직도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옆 연못에 있는 물레방아는 돌고 있는 것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정독도서관  #노인 #열람실 #구내식당 #고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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