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동네에서 남자로는 가장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이다.
허리가 굽어 펴지지 않을 것 같은 노인은 허리는 땅을 향하고 간간이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서 마을 정류장으로 간다. 정류장에는 할머니 한 분이 벌써 나와 버스를 기다린다. 정류장에 도착한 노인은 먼저 도착해 있는 할머니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한다. 그러자 나이가 더 젊은 할머니는 인사를 받으면서 ‘장에 가냐"라고 묻는다. 노인은 할머니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할머니가 친척으로 항렬이 높은 것 같았다. 정류장에서 만난 두 분은 인사 외에는 별다른 말없이 읍내 오일장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가 도착하고 할머니가 먼저 오르고 노인이 뒤를 따른다.
버스는 다음 마을에서도 손님이 있었다. 오늘은 읍내 장날이어서 손님이 다른 날보다 많다. 인근 면사무소 마을을 거쳐서 읍내로 가면서 노인은 무심하게 창밖을 보면서 의자 손잡이를 꼭 잡고 있다. 손님 중에 아는 사람을 만난 할머니는 시끄럽게 농사 이야기를 하고 있다. 버스 기사나 승객들은 할머니들의 시끄러운 대화 소리도 늘 들어온 풍경인지 표정 없이 듣고 있다.
읍내 정류장에서 내린 노인은 굽은 허리를 하고, 시장 쪽 골목길을 걸어간다. 예전에는 걸어가는 이 길에도 양쪽에 시장에 물건을 팔려고 나온 상인이나 촌 할머니들이 있던 곳이었다. 지금은 차들만 주차해 있고 아무도 없다.
정류장에서 안경 가게 사거리를 지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장이 서는 곳이지만, 여기도 간간이 상인들이 점포를 펼치고 있어서 빈자리가 너무 많다. 오래전에 시골 아주머니들이 가지고 나온 물건을 팔기 위해서 장터에 자리 잡기 위해 애쓰던 때가 상상 못 할 정도로 자리가 많다.
이 시장 골목 우측에는 길게 만들어진 상가건물이 서 있다. 여기에 노인이 장날이면 늘 들리는 곳이 있다. 이곳에 상가건물의 주인이기도 하면서 읍내에서 돈이 많기로 소문난 노인이 사무실로 사용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읍내 노인들이나 촌에서 버스 타고 온 노인들이 장날이면 모이는 장소이다. 벌써 수비에 있는 노인 두 명은 와 있고, 주인 노인이 가운데 의자에 앉아서 오는 노인을 큰 소리로 반긴다. 장날마다 보는 노인들이지만 그래도 반갑고 오일 간이지만 편안했는지 안부를 묻는다. 노인이 온 지 얼마지 않아 읍내에 사는 노인들도 들어오면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읍내에 있는 노인들은 장날이 아니어도 자주 찾아오는 곳이지만, 장날이면 노인정에 가지 않고 여기에는 나온다. 주변 시골에서 나오는 노인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장날에는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상가 주인 노인은 별명을 많이 갖고 있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많아서 젊어서부터 술이나 먹으면서 여자만 밝힌다는 말을 듣고 살지만, 돈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아는척했다. 그래도 한때는 인간성이나 행동거지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시장 상가건물에서 나오는 수입이 있고 돈이 있으니까 속으로는 사람 취급은 안 하지만, 지나가면 아는 척은 해주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상가 주인 노인을 말할 때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잡놈“이라고 했다.
상가 사무실에 모인 노인들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장날마다 모인다. 모이는 노인들이 다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올 만한 노인이 오면 잔치판이 벌어진다.
이때도 상가 노인이 주도적으로 노인들에게 돈을 얼마씩 걷는다. 그 받은 돈으로 점심도 해결하고, 한 잔씩 하는 것이다.
상가 노인이 돈이 많아서 간혹 자기 사무실에 모인 노인들에게 대접도 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다. 젊어서부터 돈을 지갑에 한 뭉치씩 넣고 다니면서 술 먹는 곳에서는 지갑에 돈뭉치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절대로 쓰지는 않았다. 돈을 보여주면서 많다는 자랑만 하고, 쓰지는 않은 이상한 놈으로 통했다.
그래도 지금은 선심 쓰듯이 사무실을 내놓은 것만도 대단한 것이다. 이제 노인이 되어서 이것도 하지 않으면 상가 노인 주변에는 사람들이 거의 모이지 않을 것이다.
노인들이 이렇게 장날이면 상가에 모이는 것도 여기 오면 색다른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상가 노인은 젊어서부터 여자를 좋아해서 항상 돈으로 여자를 따라다녔다. 다른 사람에게는 돈 안 쓰는 짠돌이처럼 살았지만, 여자에게는 돈을 썼다고 한다. 그러니 늙어서도 주변에 있는 다방 아가씨들과 잘 알고 지내고, 늘 차 배달을 시켜서 장사를 시켜 주니까 좋아하는 것이다.
노인들이 장날에 모이면 그 젊은 다방 아가씨들을 불러서 같이 술도 먹고 놀 수 있으니까 이곳에 모이는 것이다.
상가 “잡놈” 노인은 이제 늙어가니까 “잡놈”이라는 소리는 덜 듣지만, 그래도 아직 여자를 대하는 실력은 여전하다. 이 상가 노인이 젊어서는 여자를 따라다니다가 읍내에서는 남들이 보는 눈도 있고, 뒤를 돌아서면 욕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래서 읍내가 아니고 가까운 다른 도시로 여자를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한다. 다음날에 묵은 여관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 여관에 일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신고를 한 것이다. 여관방에서 얼굴에 특히 입 주변에 피투성이가 되어서 누워있은 “잡놈”이라고 불리던 남자를 발견하고 사람이 죽었다고 신고한 것이다. 그래서 조사한 결과는 입과 얼굴에 묻어 있는 피는 여자가 달거리 할 때 나오는 것으로 만취되어 혼자 누워 있었던 것이다. 그때 상가 노인은 “잡놈”의 진가를 절정으로 보여준 것이다.
장날 모인 노인들은 얼마씩 낸 돈을 가지고 상가 노인은 일단 자기가 좋아하는 다방 아가씨를 부르고, 장터에 가서 안주와 술 사 오라고 시킨다.
바닷가에서 올라오는 대게와 겨울이라 제철인 과메기도 사서 안주로 해서 술판이 벌어진다. 노인들은 거의 술은 먹지만, 몇 잔 하지 못한다. 그래도 상가 노인은 아직 평소에 몸이 좋아서 술이 가장 세다. 힘든 농사일도 하지 않고 자기 몸에 좋다는 것을 먹고살았기 때문이다.
그 술판은 완전히 상가 노인은 주도하면서 다방 아가씨도 자기 옆에 앉혀 놓고 술을 먹는다. 그렇게 노인들이 모이면 젊은 아가씨들의 손도 만지고 싶고, 탱탱한 얼굴도 가까이서 보고 싶으니까 아가씨들을 몇 명 더 부른다. 노인들은 장날이면 젊은 아가씨를 보는 맛에 상가 노인 사무실에 모이는 것이다.
아가씨들은 노인들과 같이 놀아주면 한 시간에 2만 5천 원이 받는 것이 통용되는 가격이다. 아가씨들은 아저씨들보다 노인들을 상대하기가 쉽고, 잘만 애교 부리면 촌에서 나온 노인에게 신사임당 할머니가 그려진 지폐도 얻기도 한다.
장날에 상가 사무실에 가는 아가씨들은 상가 노인이 불러 주어야 오기에 상가 노인이 손버릇은 나쁘지만, 대놓고 싫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상가 노인은 그 방면에는 타고난 제주가 있는 것 같다.
노인은 그렇게 상가에서 서너 시간 놀다가 시장이 파할 무렵이면, 다시 노인이 늘 들리는 다방에서 가서 단골 주인아주머니와 한참을 농담을 한다. 이 다방도 장날이면 늘 들리는 코스이다.
노인은 장날이면 아무리 바쁜 농사철에도 나 와야 살아 있는 것 같다. 장날에 버스 타고 갈 때부터 기분이 다르고, 장터에 와도 예전 장날 냄새는 나지 않지만, 그 장터를 걷는 것만도 좋은 것이다. 노인은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서 이제 장날 올 날도 많지 않을 것 같다. 동네에서 노인보다 나이가 덜먹은 노인들도 이제 술을 먹지 못하지만, 노인은 아직도 소주 반 병은 먹을 수 있다. 남들은 매일 장에 가는 노인을 장돌뱅이라고 말하지만, 장날이 좋아서 갔던 것이 이제는 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보면 노인이야말로 진짜 장골뱅이고, 마지막 장돌뱅이인 것이다.
장날 읍내에 가면 몇 년을 봤던 노인들의 소식도 들을 수 있다.
친하게 지내던 노인들이 아니면 어느 날 보이다가 보이지 않으면, 기억력이 없어 안 보이는 것을 느끼지 못할 때도 많지만, 죽었다는 소리는 듣는다. 그 소리를 들으며 그때는 어디 살던 노인이고 누구였다는 것을 기억해 낸다.
오일장에 자주 나오는 노인들은 오일장에 보이지 않으면 얼마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린다. 노인도 그런 소식을 지금 읍내에 만나는 노인들에게 멀지 않아서 들려줄 것이다.
오늘도 오일장에 나오면서 다음 장에 못 갈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만, 장날에 이렇게 버스 타고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 노인이 되었으니까 남들보다 잘 살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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