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종익 Jun 07. 2024

서해랑 길 30일차

한낮의 더위가 심해 가능하면 이른 아침에 걷는다.

더우면 얼굴에 열기가 올라오고 모자로 햇볕을 가리지만, 한낮에는 정수리에 열이 나는 것을 느낄 정도이다. 일전에 만난 분은 한낮에 걸을 때 모자와 양산을 쓰고 다녔다.

멀리 아침 해가 산 위로 붉게 떠 오른다. 이런 해가 오르는 장면을 보면 새로운 날의 시작과 작은 희망을 느낀다.

들길을 조용히 걸으면서 앞으로 내가 살아갈 자세를 생각해 본다. 일단은 조용하게 타인의 관심에서 벗어나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처럼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면서 마음의 바람을 갖지 않는다는 것도 생각해 본다. 어떤 식으로도 명확하게 선을 그은 것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걷는다.


아침의 들판의 작물들을 보면서 걷는 길은 역시 조용한 길이다. 그렇게 바쁜 일이 없는데도 뜨겁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걷고 싶어 부지런 떤다. 

석하 마을에 아침 햇살이 들면서 여기는 보리밭이 황금빛이다. 

늘 그렇듯이 마을을 지나가도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다시 도로 길로 가서 들어선 마을이 구암 마을이다. 구암 마을에는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이 있는 곳이다.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바둑판 모양의 남방식이라고 한다. 

지석묘군 옆에 있는 집은 접시꽃이 만발한 골목길에 고양이들이 놀고 있다. 

구암리를 지나서 분장 마을도 지나고 이제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 길을 걸어간다. 들판은 모내기를 한 논이 대부분이지만, 아직 준비하는 곳도 많이 보인다. 간척지도 아닌데 평야같이 넓은 들판이다. 

넓은 들판 사이로 큰 수로 같은 강이 흐른다. 이 강물이 넓은 들판의 젖줄인 것 같다. 


들판을 걸으면서 요즈음 애로사항이 하나 더 늘었다. 깔따구들이 기승을 부려 눈 뜨기가 힘들다. 이 깔따구들은 눈이나 귀에 들어 올려고 하니까 매우 성가시다. 

끝없는 들판을 깔따구들과 싸우다가 들판 끝에 마을을 만났다. 대초 마을이다. 그런데 마을에 들어서면 깔따구들은 없어진다. 


대초 마을을 지나면서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있다. 집 마당에 빨래 장대가 보이는 것 같아서이다. 돌아와 본 빨래 장대는 대나무로 만든 작은 것이지만, 잃어버린 옛 추억이 떠오르게 한다.

엄마가 빨래 장대를 내려서 빨아온 옷들을 일일이 펴 빨래줄에 널고는 다시 긴 빨래 장대를 세워서 옷들이 땅에 닿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게 해서 말렸다. 빨래 장대는 바람에 빨래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도 잡아주기도 하는 긴 장대였다. 그리고 그 빨래 장대 끝에 잠자리가 앉아 있는 풍경이 떠오른다. 

늘 어릴 때 삶 가운데 있던 것들이 잊힌 것들이 많다. 

우연히 지나는 길에 예전의 빨래 장대에 비해서 볼품없는 대나무 빨래 장대이지만, 엄마와 옛 추억을 생각게 한다. 

길은 부안읍으로 가까워지면서 익숙한 도시의 거리이다. 부안읍에 들어와서 매창공원을 지난다. 매창은 조선시대 부안 기생이면서 여류시인이었다. 

공원은 잘 꾸며져 있어 부안 시민의 휴식처로 사용되고 있고, 그곳에 “나 부안 왔다”는 문구가 친숙한 고장처럼 느껴진다. 

부안읍 내를 계속 걷다가 사림 공원으로 올라간다. 집과 도로들을 걷다가 시원한 나무숲으로 들어오니까 걷기 수월하다. 

공원에는 이제 수국이 만개하려고 준비하는 중이다. 시원한 공원길의 마지막에는 부안이 한눈에 들어오는 포토존이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밑부분에 적혀 있는 글귀가 멋있다. “나, 당신, 지금, 여기...”

그리고 만난 것이 부안군청이다. 이곳이 49코스의 종점 표지판이 서 있는 곳이다. 


다시 시작하는 부안군청에서 읍내를 걸어서 가면 석정 문학관이 나온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앞에 있는 작은 공원은 쉴만한 곳이다. 이곳은 선은 마을이다.

이곳에서 서해랑 길 리본이 있는 곳으로 간 길은 풀이 너무 자라 걷기가 어려운 곳이 나오고 왜가리들이 집단으로 사는 곳을 지날 때는 그 배설물을 맞을까 봐 급하게 지나쳤다. 

길은 뜨거운 햇볕과 같이 걷다가 고마제 저수지를 만난다. 여기서부터는 저수지를 따라 걷는 길이다. 고마제 저수지에는 연꽃의 군락지도 있었고, 

저수지 변에 풀을 뜯는 말이 있어 가까이서 보려고 가니까, 조형물이었다. 

저수지를 가로질러 다리도 놓여 있는 크고 긴 고마제이다. 저수지에는 데이지 꽃이 한창 피었다가 지고 있는 시기였다.

고마제 저수지를 지나면 궁월마을이 나오고 여기서 농로를 따라 한참을 걸으면, 장동마을이 나온다. 장동마을은 큰 마을이고 부안군에서 마지막으로 지나는 마을이다. 

부안은 볼거리가 많은 곳이고, 항구마다 특색이 있는 고장이다. 서해랑 길도 좋은 곳으로 잘 만들려고 애쓴 흔적이 보이지만, 해안을 걷는 코스가 군인들이 사용하던 곳이기에 걷는 길과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장동마을을 지나서 도로를 따라 걸어가면 동진강을 만난다. 

동진강을 건너면 50코스 종점의 표지판이 있는 곳이 보인다. 동진강물은 부안과 김제의 넓은 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강이다. 

지금 50코스까지 800.9Km를 걸어 왔다. 

여기서 요즈음 낮에 걷기가 힘이 들어 다음을 기약하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돌아갈 집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오늘은 현충일이다. 다음은 가을이나 겨울에 올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서해랑 길 29일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