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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익 Oct 23. 2024

서해랑 길 35일차

장항읍 아침이 밝아 왔다.

며칠 전부터 오늘은 비가 온다고 예보가 돼 있다. 창문을 열어서 확인하니까 아직은 내리지 않지만, 곧 내릴 분위기다.

일단 출발하고, 비가 내리면 그때 어떻게 할 생각이다. 아직 걸으면서 큰비를 맞은 적은 없었다. 

어제 숙소 주변 장항읍에 저녁을 먹기 위해 나갔다. 식당 간판이 걸려 있지만 장사를 하는 곳은 찾기가 어려웠다. 찾아서 들어가도 주인이 없거나 식당을 하지 않았다. 겨우 한곳을 찾아서 갔는데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편의점에 불이 환하게 밝혀져 들어가니, 물건이 얼마 남지 않았다. 폐업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모두 인구가 줄기 때문일 것이다.

출발해 가는 길에도 녹슨 기찻길이 보인다. 장항읍 현주소를 보는 듯하다.


직선 도로 길을 걷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차들은 무척 다닌다. 아침 일찍 걷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간간이 운동복 차림으로 운동하는 사람은 지나갔다. 

장항 공단 길을 지나서 작은 터널을 통과해서 해변의 송림 길로 걷는다. 해변 송림은 너무 울창하고 곰솔들이 잘 자라 멋진 곳이었다. 

계속 가면서 하늘을 쳐다본다. 비가 내릴 것 같은데 내리지 않고 있다. 비를 맞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대비도 없이 그냥 비가 올 때까지 걷고 있다. 하늘이 올 것 같이 인상만 쓰다가 말 것이라는 희망도 있다. 


송림 해변의 송림 숲에서 나와 작은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의 몇 집을 지나서 잔디를 잘 가꾸어 놓고 예쁜 집이 나온다. 

한참을 구경하면서 나도 고향 집도 예쁘고 실용적으로 개축할 생각을 해본다. 예전에 사람은 일생에서 자기가 살 집을 한 번은 지어봐야 한다는 말을 어른들이 했었다. 나는 그런 집을 지을 수 있는 곳이 있다. 

마음에 생각하는 집을 지어볼 생각도 있고, 이렇게 여행 다니는 것도 생각하다가 다니는 것으로 마음이 가 그렇게 하고 있다. 일단 걸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다닌다는 마음이다. 마치 유한함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마음의 여유는 생각지 않고 있다.


작은 마을을 지나서 물 빠져 갯벌이 보이는 다리를 건너서 다시 큰 마을 길에 들어섰다. 

마을의 집들 사잇길을 걸으면서 집 구경을 하며 걷는다. 

집 텃밭에 심어 놓은 마늘이 벌써 파랗게 자라고 있다. 김장 배추도 검푸른 빛을 띨 정도로 싱싱하다. 이곳에는 집집마다 대봉 감나무가 있다. 더 익으면 따서 홍시를 만들어 먹으면 겨울철 과일 중에서 으뜸이다.

지나는 마을 길에는 빈집도 있다. 그 빈집의 마당에는 호박 덩굴이 차지하였다. 

마지막에 만난 것이 칸나를 재배하는 밭이다. 지금은 꽃이 지고 늦게 핀 꽃들만 간간이 보이지만, 함께 만개한 칸나 꽃밭은 온통 붉은빛일 것이다. 


다시 해변을 지나면서 배들이 많이 모아 놓은 곳에 들어섰다. 그곳에 정자가 있어서 들어가 쉬었다. 쉬는 동안에 그동안 참았던 비가 갑자기 내리고 있다. 장대비가 순간 퍼 붙는다. 만일 내가 정자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 비를 맞았을 것이다. 

그 비는 곧 그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비를 피해서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다.

다시 긴 농노를 걷고 있다. 걸으면서 지금 비가 쏟아지면 어디 피할 곳이 있는지 둘러본다. 주변에는 없었다. 그래도 까마득히 보이는 마을에 갈 때까지 비가 오지 않으니라 생각을 한다. 

농노 길 중간쯤에 갔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뛰어가도 될 거리가 아니다. 돌아갈 거리는 넘었다. 그래도 조금 오겠지 하면서 걷는다. 이번에는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내리는 비를 가지고 있는 우의로 배낭과 머리를 가렸지만, 사정없이 맞는다. 

이제까지 큰비 맞지 않았다고 생각한 운이 이제 다한 것이다. 운은 어느 사람에게 몰리지는 않는 것 같다. 넓은 들판의 농노 길이 그렇게 멀게 느껴진 것도 처음이다. 가도 끝나지 않는 길이었다.


비를 다 맞고 서해랑 길 57코스 종점 마을에 도착할 때쯤, 그렇게 오던 비가 그친다. 

종점 마을에 들어서니까 바로 경로당이었다. 고향에서도 경로당에 자주 놀러 갔지만, 노인을 만나니까 동료의식을 느낀다. 젖은 옷을 대강 물을 짜고 의자에 앉아서 쉬었다. 옆에 노인에게 말을 붙여도 친절하지 않고 퉁명스럽다. 경로당의 온수를 얻어먹으려 해도 주기 싫어하는 표정이다. 늙으면 인심이 박해진다고 하는데 그런 모양이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지만, 문제는 실천일 것이다.


비가 갠 경로당 앞에는 누렇게 익어가는 들을 앉아서 여유롭게 바라보는 개 한 마리가 있다. 저런 여유로운 모습을 개가 보여준다. 

오랜 시간 그렇게 앉아 있던 개가 일어나 갈 때도 천천히 걸어 마을로 들어갔다. 마지막에 쫓기듯 가지 말고 천천히 가라는 것을 경로당 앞에 있던 개가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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