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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은 길

by 안종익

길이 있어서 걸었다.

이른 아침에 맑은 공기와 산에서 내려오는 햇볕이 보이는 길을 가는 기분은 맑다. 멀리 보이는 산등선에 붉은빛이 감도는 곳이 붉어지다가 환한 해가 올라온다. 이른 아침에 걷는 길에서 보는 일출은 낯익은 해지만, 올라오는 분위기에 늘 처음 만난 해처럼 새롭다.

아침 길에서 만나는 일출은 새로 시작하는 걷기와 같이 또 하루를 선물받았다는 마음으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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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이어진 길을 걸으면서 지나는 걸음은 모두 새로운 것이고, 이제까지 보지 못한 것을 보는 즐거움을 길에서 느낀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걸음은 살아있음이 확인하는 듯하고 다음은 아련한 희망이 가슴에 자리했다. 즐거움도 함께 있지만, 시간이 가면 고단함도 늘어가는 길이었다. 그 고단함은 다리의 무게가 늘어나는 것으로 알려왔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걷는 길은 즐거움이었고, 생각지 못한 것 봤을 때 한참 바라보았다. 새로 지나는 동네는 호기심으로 동네 골목길에 들어갔다. 골목길에서 담장 너머 보이는 집안을 구경하고, 마당에 잘 키워진 나무와 꽃들을 보는 재미는 길에서 얻은 즐거움이다.

그 길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나 지나치고, 사연과 추억이 담긴 얼굴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길에서 같은 방향으로 가다가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모두 자기 길 따라 열심히 가고 있는데, 나도 내 길을 걸었다.


계절에 따라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친숙한 진달래가 오랜 이웃을 만난 것 같았고, 도롯가에 진하게 핀 노란 개나리는 지난해 보고 처음 만난 벗이었다. 여러 곳에서 만난 벚꽃은 자연 터널처럼 도로 길을 덮어 놓은 곳도 있었다. 그곳에서 내리는 꽃비를 두 팔 벌리고 환하게 웃고 달리면서 그 봄을 마음껏 즐기려고 했었다. 온 들에 유채꽃이 피어 그곳에 청춘들이 즐거워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사진 남기는 것이 부러웠고, 나도 유채밭에 들어가 한없이 거닐었다. 가을에 코스모스로 덥힌 들판은 너무 잘 만들어 놓았던 꽃밭이어서 어린 시절 학교 앞 코스모스 길이 떠올랐다. 길에서 이름 모르는 꽃들도 수없이 보고 무심히 지나치면 걸었다.

걷는 길에서 오래된 고목은 늘 어디서나 만나는 볼거리이다. 주변에서 가장 오래 자리를 지킨 나무는 수백 년을 그 자리에서 지나는 길손을 맞이했고, 지금도 보호수가 되어 눈길을 받았다. 때로는 처음 보는 나무나 작지만 잘생긴 나무는 길에서 걸음을 멈추게 했다.


걸어가는 길에서 주위를 돌아보며 여유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걷다 보면 넘으려는 고개나 정상만 바라보고 주변 구경은 잊고 걷기도 했다. 그래도 정상에서 후련한 마음으로 아래를 바라보면서 올라온 길을 돌아볼 때, 아득히 보이는 지나온 길은 성취감으로 잠시 행복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정상에서도 마음을 살피고 여유롭게 쉬어야 하는데, 무엇이 급한지 그냥 바삐 내려온 길도 여러 번이었다.


아직은 걸어야 할 길은 많이 남아 있고, 걸을 수 있다며 다시 걷고 싶다.

오후 길에 끝날 무렵이면 다리가 무거워지고 힘이 들었다. 이때 마음으로는 목적지가 멀고 길게 느껴지는 때이다. 힘들고 먼 느낌이 드는 마지막 무렵은 다리가 무거워 한 발자국 옮기기도 힘들었다.

걷는 길에서 다시 아침이 와 일어나면 다시 활기를 얻어서 걸었다. 아침에도 처음은 다리는 아프고 무겁지만, 걷다 보면 어느새 다리가 풀리고 힘이 들어가면서 활기차게 걸었다. 그러다 다시 오후가 되면 걸음걸이가 느려진다. 느려지고 힘든 길이 반복되지만 그래도 걷을 수 있는 시간이 행복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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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길에서 어릴 때 꿈꾸던 동화의 나라로 가는 길같이 끝이 보이지 않는 밀밭 길을 걸었다. 저 끝에는 아름다운 성이 있고 요정들이나 만화 같은 사람을 만나리라 기대도 머릿속에 만들어진다.

스페인의 작은 마을 알베르게에서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길 떠날 준비로 거울을 보니, 그 속에 할아버지 얼굴을 보였다. 거울 속에 내 얼굴이 할아버지 얼굴과 비슷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내 얼굴이 그리운 사람 얼굴로 닮아가고 있었다. 다시 걷는 길에서 할아버지가 ”천천히 가라“라고 말하는 것 같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삐 가나“고 하는 듯했다. 할아버지 얼굴로 되기까지 세월은 너무 빨리 지났지만, 이제부터라도 ”천천히 살아“라는 좋은 세상 이치를 알려주었다.

그 길에서 만난 남미의 두 노인은 마지막 산티아고 성당 앞에서 같은 길을 걸어서 완주했다는 기쁨으로 함께 웃고 즐거워했었다. 다시 만날지 못할 노인들의 웃는 모습이 추억으로 남아 있다.


히말리아 오르막 산길을 걸으면서 설산에 오르는 짐을 지고 가는 짐꾼 중에 맨발에 떨어진 슬리퍼를 신고 가는 소년이 애처롭게 보였던 기억도 있었다. 그 길에서도 마차푸차레의 미봉을 구경하면서 감탄을 하고 마지막 ABC 트레킹 정상에 오르는 날 설산에 눈이 내리는 광경에 낭만을 느끼기도 했었다. ABC 산장에서 짐꾼들의 구슬픈 합창 소리가 아직도 귀가에 아련히 맴돈다. 짐꾼들의 노래는 다소 즐거운 리듬이었지만, 그 분위기나 가락이 설산을 오르는 고달픔이 배여 있었다.


처음 시작한 해파랑길에 마지막 여정에서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지는 것은 세상의 원망과 아쉬움이 마음속에서 갑자기 흘러나왔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눈물이 오랫동안 그치지 않을 때, 다시 돌아본 인생길이었다. 남파랑 길에서 오전에 산길을 걷고서 다시 오르는 오후 산길에 산허리로 돌아가는 길이라 믿고 시작했지만, 끝없는 등산길에서 지쳐 한 걸음도 움직이기 힘든 체력으로 간신히 정상으로 올랐다. 그 산은 아직도 잊지 못하는 거제도 가라산으로 체력의 한계까지 간 등산길이었다.


제부도에서 대부도가 멀지 않을 것 같아 겨울비 내리는 길을 십 리나 걸었다. 몸과 다리는 무겁고 신발은 비에 젖어 시렸다. 그래도 지도에 본 숙소가 보일 때는 마음에 걷는 걸음이 가벼웠다.

그 숙소가 문을 닫았다는 표시를 보았을 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다시 겨울비를 맞으면서 제부도 입구로 돌아가는 길은 가장 피곤한 순간들이었다. 겨울비 맞으면서 걷지 않아도 될 두 시간을 걸어서 제자리에 온 서해랑 길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때는 길이 너무 힘들어서 걷고 싶은 마음도 잠시 사라졌다.


걷는 길은 새로운 것을 만나는 시간이다.

낯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사람들로 그냥 지나치면 다시 만날 일 없는 스치는 인연들이다.

지나는 길에 개들도 자주 만난다. 만나면 반가운지 요란스럽다. 그 개들도 날 처음 만나는 사람이다. 걷는 길에서 공연히 제 자리에 있는 개들을 내가 지나면서 짖게 한 것이다. 지나는 길손에게 개들은 자기 영역을 거의 빠짐없이 알린다.

때로는 지나는 길에서 개가 짖을 때가 지났는데 짖지 않아 궁금해서 돌아볼 때 개와 눈이 마주치면 서로 어색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무심코 가는데 모퉁이에서 보이지 않던 개가 갑자기 나타나 큰소리로 짖으면 놀라서 정신이 번쩍 날 때도 있었다.


조용한 시골 바닷가 마을 길에서 지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마을 양지바른 곳에 햇볕을 쬐거나, 시원한 큰 나무 그늘 더위를 피해 쉬고 있는 노인들은 자주 만났다. 지나는 낯선 과객이 신기한지 한동안 시선을 고정하는데,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하고, 왜 왔는지도 알고 싶은 눈 들이다. 그냥 말없이 바라보기도 하지만, ”쉬어 가라“ 하는 노인이 있으면 한참을 이야기할 때가 쉬는 시간이었다.


지나는 길에 유난히 평화스럽고 바람을 막아주는 아늑한 곳은 머물고 싶은 곳이다.

뒤에는 산으로 막혀있고 앞에는 바다가 시원한 곳도 있지만, 마을이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곳이 그런 곳이다.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면서 쉴 곳을 찾아가 고단한 몸을 쉬게 하고 싶어서 종종걸음으로 걸어갈 때, 이런 곳을 만나면 들어가 쉴 보금자리를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걷는 길에서 쉴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지친 몸으로 저녁이 다가올 무렵, 하룻밤 쉬어 갈 곳 찾을 때가 힘들고 고단했었다.


지는 낙조를 보면서 고단한 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한다. 낙조는 걷고 난 후에 걸어온 길을 생각하며 바라보는 마무리와 같은 것이다. 마치 내일은 새로운 날이 시작되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기약하는 시간이다. 낙조는 서해랑 길에서 많이 만난다. 해는 동해에서 서해로 지기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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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걸어서 행복한 시간이었고 새로운 것을 만났던 기회였다.

그 길을 걸어 앞서 걸어간 많은 사람 중 나도 한 사람이 되었다. 세상은 아름다웠고 살만한 곳이라는 것을 길은 알려주었다. 아침 길에서 밝게 뻗어나는 빛의 아름다움에 미소 짓고, 붉게 물들인 저녁 하늘에 넘어가는 낙조도 길에서 멈춰 보았다. 아직 가보지 못한 길의 기대보다 지금 걷는 길에 보이는 풍광을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난 길이 있어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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