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시작하면 곧 돌아오는 느낌을 있을 정도로 습관적으로 오래 걸었던 북악 스카이웨이 길이다.
오늘 마지막 오르는 길인 것 같다.
시작은 여전히 오르막으로 숨이 가쁘다. 가로등이 환히 비추는 스카이웨이 길은 조용하다. 북악산 밑에 산 세월도 사반세기가 지났다. 아침이면 늘 오르던 길을 마지막이란 기분으로 가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스카이웨이 가로등도 환하지만, 오늘이 보름날 새벽이라 북악산 위에 달도 밝다.
이곳 북악산 밑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간다. 그리고 지난 몇 년을 고향에서 보냈으니 새벽 산책길도 오랜만이다. 이제 스카이웨이 길은 다시 못 올 것 같아 오늘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나섰다.
성가정입양원 넘어 먼 산에 보름달이 보인다. 이곳은 예전에 홀로 산속에 있었지만, 지금은 주위 집들로 변화가 많다. 그래도 스카이웨이 길은 변함없이 북악산 속으로 굽어서 올라가고 있다.
골프 연습장을 지나면서 왼쪽 성북동 저택 뒤뜰 옆 스카이웨이 길에는 큰 개들이 나와 짖을 것 같아 그 울타리 쪽으로 눈이 간다. 수년 사납게 짖어대던 개들이 나올 장소를 지난 것 같은데, 조용하다. 주인이 바뀐 것인지, 개들이 변고가 생긴 것인지 개들이 없는 것 같다. 늘 짖어대던 개들이 없으니까 무엇이 빠진 것 같다.
직선의 완만한 오르막길을 가면서 예전에 만났던 산돼지가 다시 나올 것 같다.
이맘때 어둑한 스카이웨이 길에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는 큰 개 같은 것이 있었다. 걸음걸이가 개보다는 무거운 것 같은데, 나를 보더니 멈추어 서는 것이다. 나도 느낌이 있어서 그 자리에 서서 서로 마주 보았다. 다소 거리가 있어서 서로의 동태를 살피면서 가만히 보니까 개가 아니라 큰 산돼지였다. 긴장은 되지만 뒤를 보이면 안 되니까, 그 자리에서 공격해 보면 피할 생각을 하면서 한참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큰 산돼지는 길옆 산으로 천천히 들어갔었다. 그 뒤로도 스카이웨이 길에서 산돼지를 가끔 만나면 신속히 도망갔지만, 여기서 만난 그 산돼지는 그렇지 않았다.
스카이웨이 길 중간에 있는 운동기구 공원 옆길에 한 무리의 노인들이 내려온다. 아마 스카이웨이 정상까지 갔다가 오는 것일 것이다. 그중에서 예전에 같이 운동하던 사람을 찾으려고 했는데, 눈에 익은 사람이 없다. 키 큰 할아버지와 작은할머니 부부 그리고 손을 힘차게 저으며 걷던 아주머니도 보지 못했다. 새벽 운동 나온 사람들이 거의 바뀐 것 같다. 나이 들어서 운동하러 나오지 못한 사람도 있고, 다른 곳으로 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스카이웨이 길은 아침 운동하기에 좋은 곳이다. 스카이웨이 길에 가로등이 있어서 사계절 같은 시간에 운동할 수 있는 곳이다. 정상인 팔각정까지 올라갈 때는 완만한 경사 길이고, 내려올 때는 순한 내리막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악산의 공기가 서울 다른 곳보다 맑은 곳이다.
스카이웨이 길을 걸으면 봄에는 길옆 언덕에 노란 나리가 수줍게 핀다. 봄날에는 그 나리꽃을 찾으면서 걸었던 길이다. 나리꽃이 노랗게 며칠 폈다가 지기에 그 짧은 날에 어디서 피는지 찾아보았다. 그렇게 몇 년을 나리꽃 찾기를 하면서 걸으면 언제 팔각정에 도착했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해가 바뀌고 다음 해에도 그 자리에 나리꽃은 어김없이 피었다. 그때 지나면서 작년에 있었던 자리에 나리가 보이지 않으면, 한참을 서서 그 주변을 올려다보며 찾았다. 거의 어김없이 나리가 숨어있었고, 몇 년이 지나면 그 주변에 새로운 나리꽃도 나타났다. 아직 겨울이라 바위와 말라버린 잡풀만 보인다.
스카이웨이 길 위는 북악산으로 가는 곳이라 스카이웨이 길에는 철망이 쳐 있다. 북악산 밑 청와대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예전엔 사고로 철망이 손상되면 그다음 날 보수했었다. 오랜만에 오니 철망이 부서진 곳이 보인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광경이다. 아마 지금 청와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서 그런 것이다.
부서진 철망 부근에 있는 잣나무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그 잣나무 밑에서 잊지 못할 일도 있었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올 무렵이면 잣나무에 잣이 여물러 가는 시기이다. 이때 지나다 보면 잣나무 밑 스카이웨이 길에 잣송이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간혹 잣송이가 떨어질 때 지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떨어진 잣송이를 쫓아 청설모가 잣나무에서 급하게 내려온다. 청설모가 잣송이를 끊어 떨어뜨린 것이다. 그러고는 떨어진 송이를 물고 숲으로 가는 것을 자주 보았다.
어느 날 잣송이가 떨어졌다. 그때 잣나무를 올려다보니까 청설모가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먼저 가서 잣송이를 차지했다. 그러자 늦게 내려온 청설모가 나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내가 밭고 있는 잣송이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자기 것이라는 것 같다. 몇 번이나 달려드는 청설모를 쫓는 모양을 생각해 보면 신기할 것이다. 자기 먹이에 집착해 겁을 잃어버린 청설모도 있었다.
청설모는 나와 싸웠지만, 길고양이에게는 먹잇감이었다. 스카이웨이 길에서 길고양이들이 잣나무 밑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모양을 여러 번 보았다. 아마 잣송이를 떨어뜨리고 찾으러 내려오는 청설모를 사냥하려고 기다리는 것이다. 스카이웨이 길에서 생태계의 재미있는 먹이 사슬을 걸으면서 본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잣송이를 청설모가 밑으로 떨어뜨리지 않고, 잣나무 위에서 알을 뽑아 먹는 것 같았다. 잣나무 밑에는 빈 송이와 껍질이 떨어진 것을 보았다. 밑에서 기다리는 길고양이가 있다는 것을 청설모가 안 것이다.
팔각정에 도착했다. 북한산 족두리봉 위에 보름달이 넘어간다.
팔각정에는 아무도 없고 화려한 등불이 새벽을 밝힌다. 한편에 있는 느린 우체통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지금은 편지 넣은 곳을 막아놓았다. 한때는 이 우체통에 사연을 넣어 시간이 지나서 받아보면서 이곳에 왔다가 간 기념과 삶의 의미와 추억을 만들기도 했었다.
팔각정 옆의 작은 정자는 그 자리에 있지만, 낡은 정자가 되어 이곳을 다녀간 사람의 사연을 간직하는 듯하다. 정자는 서울 구경 온 사람들이 쉬기도 했고, 길고양이들이 비 오면 밑에서 피하던 곳이었다. 뒤편에 있는 조각상들은 모두 그 자리에 서 있다. 지금은 지나가는 길고양이도 없이 조용하다.
어렴풋이 보이는 사모바위와 보현봉 아래 시내의 불빛 사이로 아침 동이 터오는 듯하다.
내려오는 길에서 산중 군 막사에서 기상나팔소리가 울린다.
하루를 시작하려는 힘찬 나팔 소리는 북악산을 깨우는 소리이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희망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지난날 아련한 추억도 그 소리와 함께 산중의 먼 하늘에 퍼진다. 나팔 소리에 마음이 애잔해진다.
다시 내려가면서 사반세기를 오르내리던 팔각정을 작별하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본다. 오랜 시간 흘러 이제 팔각정에서 내려가는 것처럼, 조용히 내려가는 시기인 것이다. 내려가는 길은 힘들지 않고 금방 내려가는 것 같다.
벌써 반을 내려와 굽은 길을 돌아서니까 시내 너머로 붉은 아침 놀이 보인다. 붉은 아침놀이 붉게 옅어지면 아침이 밝아오고 해가 나올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서 붉은 아침 놀을 오랫동안 보면서 걷는다.
다시 돌아온 익숙한 작은 공원에는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았다. 공원에서 다시 내려온 스카이웨이 길을 돌아봤다. 오랜 세월같이했던 길이지만 다시 오지는 못할 것 같다. 아쉬운 이 길을 또 다른 이가 걸을 것이다. 이 스카이웨이 길은 아침 운동하기에 너무 좋았던 길이었다.
길에게 간다고 인사는 하고 싶었다. 길도 오래 다니면 정이 드는 것이다. 여기서 길과 이별한다는 생각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북악 스카이웨이를 오래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