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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시간

by 안종익

한 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구정이 지나고 2월도 중순을 향한다.

누군가 한 해를 달력과 같다는 말을 했다. 새 달력을 걸어 놓고 첫 장을 떼어 내면, 언제 가는지 한 장씩 떼어지는 것이 그렇게 쉽게 떨어져 어느새 한 장이 남는 12월이 된다고 했다. 너무 축이 빨리 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빨리 가는 세월의 시간이 넘어가는 달력에 비유한 것이다.


이제 정월 대보름이 지나 농사일을 준비하는 늙은 농부들에게 습관적인 희망이 일어날 것이다. 추운 한풍에서 따뜻한 기운을 느끼면 나이 든 가슴에도 기대감이 부풀어진다. 올해는 파종하면 대풍이 들것 같다는 바람이 마음을 희망으로 채운다. 그런 믿음으로 시작하여 힘든 여름을 지내면 한 해의 반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반은 시작한 농사일을 이어서 마무리하는 세월이다. 그리고 찬 바람이 불면 또 한 해가 갔다고 노인들은 아쉬워할 것이다.


노인정에 가면 나이 들면서 고집과 나름의 성격으로 같은 마음이 되기는 거의 어렵다. 그래도 일치하는 것은 세월이 빨리 간다는 말에는 누구나 동의하면서 공감한다. 노인들은 젊었을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도 같은 마음이다. 그러면서 합창하듯이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한다. 제각각 노인들 마음이 일치하는 생각은 세월이 빠르다는 것이다.

노인들의 오랜 경험과 전원 찬성하는 말이니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지나간 세월이 빠른 것은 느낌이고, 그 느낌에 아쉬움이 들어있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어릴 때 노인이던 사람은 별난 사람이나 순한 사람이나 지금은 모두 돌아가셨다. 그때 그 노인들 앞에서 고분고분하던 청년들이 이제 노인이 되어있다. 그때 청년보다 지금 노인들이 적다. 예전에 골목에 뛰어놀던 어린아이들이 이제 힘쓰는 청년이 되어서 활발히 다니고 있다. 다시 골목에는 새 아이들이 놀고 있다. 이것도 세월이 지나간 확실한 흔적이다. 때로는 세월의 실수로 깊은 산속에 수백 년을 사는 노인이 있을 것 같은 상상도 해 봤지만, 세월은 실수가 없었다.


어릴 때 노인정을 지날 때 드나들던 노인들 모습이 선하다. 아직도 택호와 모습이 그려진다. 그 뒤 객지에서 오래 생활하다가 노인정에 간 적이 있다. 시간을 뛰어넘어 30년 만에 노인정에 간 것이다.

그곳에는 기억 속 노인들이 거의 그대로 있었다. 순간 그곳은 시간을 멈춤 느낌이다.

아직도 얼굴을 보니 택호가 떠오른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른 면도 보였지만, 거의 비슷한 얼굴과 풍기는 인상이 같았다. 그곳에는 간혹 낯선 노인의 얼굴도 보였다.

그러나 노인정에 앉아 있는 노인들은 그 옛날 노인들의 아들들이다. 노인들은 돌아가시고, 자식들이 늙어서 아버지가 있던 자리에 온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아버지의 모습으로 닮아간 것이다. 물론 다른 모습으로 늙은 사람도 있었지만, 그분도 자세히 보면 옛 어른의 인상이 보였다.

그래서 30년 세월이 지나간 노인정에서 처음 순간에는 놀랐다. 또 다른 세월의 흔적이 노인들의 얼굴에서 본 것 같았다.


흔히 말하길 세월의 시간이 20대는 20Km, 30대는 30Km, .. 60대는 60Km, 70대는 70Km로 지나간다고 말한다. 같은 속도의 세월이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를 설명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의 뇌는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하는 일은 잘 기억하지 않는다고 한다. 반복적 일을 하면서 지나는 시간은 기억하지 않으니까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간 것이다.

나이가 들면 한곳에 머물러 반복적인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루에 하는 생활이 같은 패턴으로 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이다. 노인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어느새 저녁이라고 말한다. 그 사이에 생활은 늘 하던 일을 반복적으로 한 것이다. 아침과 저녁은 그래도 큰 변화의 시간이니 기억나고, 한 달이나 한 해도 같은 이치로 빨리 지나가는 것이다.

산책이나 운동도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한 사람들은 느낄 것이다. 산책길에 같은 것은 기억하지 않지만, 변화된 것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인다. 여기서도 늘 하는 산책은 시작과 끝만 기억에 남는 경우가 보통이다. 즉 새로운 것을 경험해야 뇌도 기억하고 시간의 속도도 느리다고 느끼는 것이다.

어릴 때는 처음 보는 것이 많아서 뇌가 기억할 것도 많고, 나이가 들면 여러 번 본 것은 뇌가 별로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젊으면 새로운 것을 보고, 머리가 기억할 것도 많으니까 시간이 느린 느낌이고, 나이가 들면 새로운 것이 적으니까 뇌도 기억하는 것이 적어 시간이 빨리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여행이나 새로운 일은 시간이 길어지는 느낌인 것이다. 긴장과 호기심이 많으면 머리는 더 많은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실제로 여행을 하다 보면 늘 새로운 것에 눈이나 머리가 바쁘다. 그 시간도 보통 세월의 시간과 같고, 늦게 간다는 것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도 하루 지나면 머릿속에 기억나는 것이 보통 때 보다 많아진다. 그러다가 일주일이 지났는데, 어느 날에는 그 일주일이 몇 달이 지난 느낌이다. 낮 선 곳을 여행하면 많은 날이 지난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여러 번 여행에서 새로운 것을 경험한 시간이 일상생활시간보다 느리게 간다는 것을 체험했다.


시간을 열심히 짜임새 있게 이용하자는 마음을 먹어도, 같은 일을 반복하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주면 시간이 길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시간은 같은 것이다. 단지 느낌이다. 누구에게나 세월의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그러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이다. 속도의 차이를 이야기하지만 느낌의 차이이고, 세월의 시간은 공정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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