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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이야기

by 안종익

어렸을 때 설이 다가오는 마지막 오일장에서 엄마가 돌아오면 거기에는 새 옷이 있었다. 한번 맞는지 입어보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것을 벗어 놓고 설날 아침에 입어라고 한다. 그 새 옷이 마음에 들어서 빨리 입고 싶어도, 설날이 오기까지는 보거나 만지기만 했었다.

설날 전까지 집안에서도 음식 준비로 바빠하는 것이 보였고, 분주한 분위기는 설이 기다려지고 설레는 날들이었다.


설 전날 밤에는 잠을 안 올 것 같지만, 그때는 눕기만 하면 잠이 들어 이른 아침 분주한 소리에 일어났다. 그동안 세수를 잘 하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씻어야 했다. 새해 첫날에 씻지 않는 것은 엄마가 그냥 두지 않았다. 기억 속 설날 아침은 어김없이 추웠다. 세수하러 뜨거운 물에 찬물을 타서 수돗가에 놓으면 세숫대야 안에 물은 뜨겁고, 세숫대야 가장자리에 손을 대면 얼어 손이 붙었다. 그래도 빠르게 몇 번 얼굴에 손이 왔다 갔다 하면 끝이다. 엄마는 고양이 세수한다고 소리치지만, 벌써 방에 들어가 얼굴을 닦고 있었다.

그때 그동안 만져보고 쳐다만 봤던 새 옷을 입어본다. 약간 큰 것 같은데 엄마는 아주 잘 맞는다고 한다. 내년까지 입힐 심상이다.


아직 어둠이 걷혀가는 때였지만, 세배 갈 수 있는 동생들을 데리고 큰할아버지 집이 있는 골목길로 올라갔었다. 골목도 얼어서 딱딱하고 추워 손 시려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간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도 그때는 잘 넘어지지 않았고, 빨리 따라오지 못하는 동생을 뒤돌아보며, 빨리 오라고 소리쳤다.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으려는 큰할아버지 방문을 열고는 "세배한다"라고 하고서 바깥에서 절을 한다. 다시 다른 방으로 가 아재에게는 방에 들어가 세배했다. 큰할아버지와 아재는 세뱃돈을 잘 주지 않았다. 간혹 아재가 세뱃돈을 주는 그 해는 운 좋은 날이었다. 그러고는 할아버지가 사는 집으로 가 세배를 하고 여기서는 잠시 방으로 들어가 몸을 녹였다. 할아버지부터는 세뱃돈을 받았다. 또 다른 곳 세배도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마친다. 세배하는 사람에 어른에 따라 방문 밖에서와 방 안에서 하는 세배는 미리 엄마에게 이야기를 들어서 구분할 줄 알았다. 설날 아침에 마을에서 세배하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자주 만났다.


엄마가 세배하라고 시킨 친척들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 부엌에는 엄마와 작은 엄마가 차례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 시간이다. 그래도 부엌을 찾았다.

이유는 작은 엄마는 세뱃돈을 주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침에 먼저 세배를 했고, 작은 엄마는 차례 준비로

우리 집에 내려와 처음 만날 수 있는 곳이 부엌이었다. 세뱃돈을 확실히 받을 수 있기에 설날 세배에서 중요한 사람이었다. 작은 엄마에게 세배한다고 하고, 부엌에서 넙죽 절을 했었다. 그러면 차례가 끝나고 세뱃돈이 나왔다. 그렇게 바빴던 세배도 끝나고 차례를 지낼 때까지 한가한 시간이다.


집에서 큰 집으로 차례 지내려고 가는 할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먼저 차례를 지내는 큰집은 준비가 한창이다. 설날 차례로 모인 사람들이 많아 차례를 지내는 방앞 마당까지 멍석을 폈다. 방안에서부터 마루를 지나 마당까지 사람들이 차례를 마치면, 차례상을 물리고 차례 음식과 떡국이 나온다.

그곳에서 올해 처음 먹는 떡국에는 김 가루와 노란 계란 지단, 고기 고명을 올려놓아 입으로 들어가면 목을 타고 떡국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뛰어다녔고 약간 늦은 아침이라 맛이 그만이었다. 한 그릇을 먹고는 더 달라고 하기에는 눈치가 있었고, 바로 다음이 우리 집 차례이니까 그만 먹었다. 그러고는 빨리 집으로 뛰어 내려왔다. 큰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곧 우리 집으로 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 이것보다 더 정확한 연락이 없었고 집에서는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부터 부엌에서 장만한 음식을 차례상으로 옮기고 차례상을 차렸다. 어른들이 우리 집으로 들어오면 곧 우리 집 차례가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떡국과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우리 집에서도 떡국을 또 먹었고 한 그릇 더 먹기도 했다. 그래도 설날 떡국은 맛은 있었다. 이렇게 집안에서 차례에 시차를 둔 것은 자손들을 많이 모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차례를 마치고 어른들이 돌아가면, 세뱃돈도 수금이 다 되는 때였다. 이제부터는 마을 중심에 있는 가게로 나가서 눈여겨봤던 것도 사고 새 옷 자랑도 할 때이다.

그때쯤 가게 앞에는 마을 아이들이 거의 다 나왔다. 시끌벅적하고 아이들은 새 옷을 자랑하면서 사고 깊은 것도 사서 얼굴에 온통 웃음뿐이다. 가게에는 풍선이나 총이나 인형 뽑기를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었다. 화약이나 여러 그림의 딱지도 팔았고, 사탕이나 과자도 여럿 종류였다. 설날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물건들이 진열되어 기다린다.

가게에는 가장 큰 풍선은 늦게까지 뽑히지 않았다. 가장 좋은 총이나 인형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은 누가 뽑기를 하면 무엇이 뽑힐지 뽑는 아이 작은 손으로 눈이 집중된다. 그러나 가장 좋은 물건은 가게 주인이 먼저 뽑아서 버렸기 때문에 나올 리가 없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것을 뽑는다고 세뱃돈을 쓰던 때였다. 그래도 아이들은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뽑히지 않은 것은 큰 풍선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아이들은 가게에서 세뱃돈을 거의 다 쓴다.

가게 옆 양지바른 구석에서는 새로 산 딱지놀이하는 아이들이 딱지를 한 주먹 들고 딱지 숫자나 모양 맞추기 내기에 정신이 없다. 평소에는 몇 장 안 되는 딱지를 갖고 놀았지만, 오늘은 새 딱지가 작은 손이 터질 정도이다.

가게에서 가장 큰 장난감 총을 산 아이는 총에 코르크 마개를 막고 방아쇠를 당기면 탁 소리를 내고 줄 만큼 날아간다. 평소 그 총이 사고 싶었지만, 세뱃돈으로도 모자라 사지 못한 친구들이 총을 만져라도 보려고 아이 주변으로 따라다닌다. 아이 보고 ”총 한 번만 싸 보자“라고 졸라본다. 아이는 절대 만지지 못하게 하고, 뽐내고 싶은 총을 연신 손으로 가리면서 얼굴에는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화약을 산 아이들은 화약 종이에서 하나를 떼어서 돌 위에 놓고 돌로 터뜨린다. 딱 소리가 나면서 주변으로 화약 냄새가 퍼진다. 옆에 있는 다른 아이도 질세라 화약을 놓고 터뜨린다. 그러다가 화약을 몇 개를 겹쳐서 놓고 작은 돌을 그 위에 얻고서 큰 돌로 내리친다. 터지는 소리가 훨씬 크다.

그렇게 화약 치기 놀이를 하다가 이번에는 한 아이가 화약 한 장을 모두 겹쳐서 놓고 큰 돌로 내리치려고 준비를 한다. 이때 아이들이 그 아이 주변으로 모여든다. 한 장을 한 번에 겹쳐 내리치면 소리가 얼마나

클지 궁금해서 주변 아이들 눈이 그곳에 집중된다. 어떤 아이는 귀를 막고도 조금 떨어져 지켜본다. 돌을 내리치면은 이제까지 듣지 못한 큰 소리가 울린다. 지나가던 어른들도 돌아보고 지나갔다. 그리고 진한 화약 냄새가 퍼진다. 화약 종이가 떨어진 아이들은 다시 사러 갔다.

설날 가게 앞에는 나팔 부는 아이들은 입이 아프도록 불고 다니고, 풍선을 산 아이들은 풍선을 크게 불어서 놀다가 거의 터진다.


이렇게 가게 주변에서 놀다 보면 어느새 저녁을 먹을 때가 다가오면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얻은 세뱃돈은 벌써 다 쓰고 없다. 풍선 몇 개 사서 불다가 다 터지고, 화약 사서 놀고, 오랜만에 거품이 올라오고 코를 쏘는 사이다도 사 먹었는데 돈은 다 쓰고 없다. 세뱃돈이 오랜만에 많다는 생각을 했는데, 쓰니까 금방 없어진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큰 총을 샀던 아이도 벌써 총이 고장이 나서 코르크 마개가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손에는 그 총이 들려 있다.


그때 집으로 가면서 아침에 좋았던 기분은 아니다. 좋은 시간이 다 지난 기분이었다. 다시 설날이 오자면 일 년이 있어야 한다. 어린 나이에 무언지 모르지만, 지나간 설날 아침이 아쉬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즐거움 다음에는 그렇지 않은 마음이 이어서 온다는 것을 느꼈지만, 깊이 생각 못 하는 시절이었다. 걷는 걸음은 무겁다. 맛있는 떡국도 먹어봤고 차례 음식도 먹었다.

그래도 집에 가면 유과나 곶감이 남아 있을 것 같기도 해서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렇게 기다리던 설날도 그날 저녁에는 어린 얼굴에도 웃음이 없어진다. 좋은 일 다음에 늘 좋은 것이 오지를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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