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을 걷어 보니까 창에 성애가 흐릿해서 밖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성애를 닦아 내니까 이른 아침이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이다. 앞에 보이는 앞산 꼭대기와 맞닿은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다. 어릴 때 방에서 누워서 바라보았던 산이다. 그때 이불속에서 얼굴만 내놓고 쳐다보면서 저 산 너머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한없이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었다. 아직도 변한 것 없이 산 능선은 소나무가 하늘과 경계를 만들고 산 중턱에는 간간이 낙엽 진 활엽수들이 보인다.
그 옛날부터 봐왔던 산은 그대로이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서 다시 쳐다보니 산은 새롭게 보인다. 많았던 가족들은 모두 떠나고 이제 홀로 앞산을 올려다보니까 여러 생각들이 지나간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밖을 볼 수 있는 창문이 일정한 정사각형의 문틀로 된 유리창이었다.
겨우내 춥다가 이제는 완연한 봄이 되면서 교실 안보다 밖이 더 따뜻하고 멀리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계절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보니까 봄기운에 밖 깥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한정 없지만, 나무 책걸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중이다. 이때 공부보다는 바깥으로 눈이 더 자주 간다. 언제 수업 마치는 종이 울리기를 기다리면서...
쉬는 시간에 교실 앞 양지바른 화단 옆 잔디에 앉아서 멀리 보이는 들녘을 바라보면, 아지랑이는 끊임없이 올라오고 그 올라오는 곳으로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저 아지랑이 넘어는 또 무엇이 피어오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표현 못 하는 그리움에 어린 동심을 자극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한창 또래들과 같이 노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때이다. 같이 놀다가 멀리 떠난 동무가 이 시절에 유난히 생각이 난다. 봄날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때가 되면, 멀리 도시로 공부하러 간 동무 얼굴이 떠오르고, 보고 싶었다. 그 동무는 방학이면 어김없이 고향에 오지만 그래도 봄날이면 생각나고 같이 놀던 생각, 지금이라도 갈 수 있으면 가서 보고 싶은 마음이지만, 가서 만나면 아마 특별히 할 말도 없이 서로 바라보면서 좋아 손잡고 웃기만 할 것이다.
아빠가 선생님이라 멀리 전근을 가게 되어, 이사 떠나는 동무에게 떠날 때 잘 가라는 말도 못 하고,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말은 하고 싶었지만, 전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아쉬워하던 것이 그리움으로 남아 있지만, 그 동무는 다시 보지 못했다.
다시 시작종이 울려서 들어온 교실에서 창밖을 내다본다. 멀리 보이는 지평선 산전에서 아지랑이가 동무들이 오라고 손짓하듯이 더 많이 아른거린다.
초등학교 운동회는 봄 소풍과 같이 학교에 큰 잔치를 하는 날이다.
아이들 잔치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잔치이기도 했다. 온종일 시끌벅적하고 신명 나고 모처럼 구경거리도 많은 날이다. 이날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수십일 준비를 해야 했다. 이때는 공부보다는 이 운동회 날 잔치를 위해서 오후에는 연습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이때가 되면 아직 날짜만 받아 놓은 운동회이지만 날마다 즐거운 것이다. 운동회가 가까워 오면 운동장에는 선이 그어지고 나중에는 테두리까지 말목을 박아서 운동회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운동회 날에는 같은 반바지와 반팔 티를 입고서 머리에는 청백의 띠를 묵은 아이들이 아침부터 재잘거리는 날이다. 이날은 청군과 백군이 양쪽으로 나누어서 자리 잡고, 목청이 터져 나가라고 응원도 하고 온종일 즐거운 날이다. 이때 청군과 백군이 나누어 앉지만, 운동장에 나오는 문은 한 곳에서 나온다. 이 문이 개선문이다. 이 개선문은 축구 골대보다 좁지만 높게 사각형으로 나무를 이용해서 만든다. 이 문에는 꽃을 다발로 엮어서 치장을 한다. 꽃으로 장식이 되면 거대한 꽃 문이 되는 것이다. 이 꽃들은 산에서 나는 야생화이다. 이 계절 야생화는 주로 들국화가 많았고, 노란 꽃도 있고, 이름 모를 꽃들이 많았다. 이 야생화를 꺽으로 산으로 가는 날이 보통 운동회 전날이었다. 이렇게 해야 다음날까지 싱싱한 꽃이 살아 있는 개선문이 되는 것이다. 야생화는 주변 산에 전교생이 모두 올라가서 꺾어 온다. 초등학교 때 이날이 되면 기분은 완전히 운동회가 시작된다는 것과 같은 날이다. 산으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야생화를 꺽으로 올라갈 때 그렇게 즐겁고 힘든 줄을 몰랐다. 그것도 경쟁이라고 하나라도 더 꺾으려고 온 산을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간혹 밤나무를 만나면 밤을 따는데 정신을 잃었다가 야생화 생각이 나면 다시 열심히 꺾었다. 내려갈 때는 주머니는 밤이 가득하고 야생화도 한 아름이었다. 그때 들국화의 보라색은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고, 지금도 보라색 들국화를 보면 어린 시절이 연상된다. 운동회를 하기 위해서 매년 꺽으로 가던 야생화에 대한 추억이 동심의 꽃으로 남아 있다. 들국화의 꽃말이 “청순”인 만큼 가을 운동회의 꽃 꺾던 추억은 청순하고 맑은 기억을 남았다.
또래들이 모여서 떠들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하다가 너무 심한 장난에는 진짜 싸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가 같은 남자들끼리 이야기이다. 여자아이들과 같이 이야기라도 하는 것이 보이면,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는 놀림거리가 되기도 하니까 여자아이와 앞뒷집에 살지만 만나면 모르는 사람인 양 지나치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쩌다 학교에서 눈이라도 마주치면 서로 더 빨리 돌리는 시합이라도 하듯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 서로 마음이 가는 아이는 있었다. 그런 아이일수록 더 쌀쌀 맞게 대하거나 가까이 가지 않았다. 늘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들끼리 놀았고 집에 가서 놀 때도 그렇게 지냈다. 그래도 이웃에 살기에 오가다 마주치는 일이 흔했지만, 만나면 수줍어서 어떤 때는 그 길을 피해서 돌아다니기도 했다
앞집에 사는 키 작은 여자아이는 눈이 크고 광대뼈가 야간 큰 아이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몰랐지만 고학년으로 갈수록 눈이 마주치는 것이 어색하고, 멀리서 걸어와도 눈에 들어왔고, 여자아이들이 여럿이 가는데 이 여자 아이만 보이기만 했다.
그때는 돌담들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담 들이 다 있었고, 키 작은 초등학교 학생 때는 굽어진 담장은 가까이 올 때까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또래 찾아서 마실을 나가는데, 대문을 지나서 골목길을 돌아서는데 그 여자아이와 마주친 것이다. 무의적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정신이 멍하고 앞으로 걸을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오던 골목길은 돌아갈 수도 없고 서로 마주 보면서 지날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발걸음이 붙어서 나아 가질 않는데, 그 여자아이도 얼굴이 붉어지는 듯한 느낌이 받으니까 온몸에 힘까지 빠지는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옆으로 하고 여자아이는 딴 곳으로 눈을 돌리고 빨리 지나갔다. 한참이나 있다가 가던 길을 갔지만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고 머릿속에는 묘한 기분과 설렘으로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그 기억이 오래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첫사랑이었던 것이다. 그 뒤로는 골목길을 갈 때면 늘 두리번거리면서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다녔다.
2월의 마지막 날 아직은 쌀쌀한 기운이 있으면서 바람이 살짝 부는 이른 아침에 동네 입구에서는 한복 입은 할아버지가 무엇을 들고서 앞에 서고, 더 나이 든 할머니는 머리에 보자기를 이고 따라가고, 그 옆에는 학생 티가 나는 아이가 또 짐 꾸러미를 들고 있고, 그 뒤를 지게에 옹기 단지 위에 이불 보따리를 얻져서 진 젊은 사람이 묵묵히 뒤따라가고, 동네 입구에는 아주머니가 가는 일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는 이사 가는 풍경이 있었다.
전날부터 멀리 타지에 공부하러 떠나는 손자를 위해서 필요한 물건을 싸는 것을 일일이 살펴보는 할아버지와 필요한 것을 일일이 보따리에 싸는 어머니의 손길이 분주했다. 그전에 대충은 쌌지만 그래도 아직 필요한 것을 찾아서 싸는 중이다. 아침 일찍이 출발해서 버스가 서는 곳까지 짐들을 옮겨 버스에 싣고 도시 학교 근처 얻어 놓은 자취 집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때에 이른 겨울비가 내려서 다리가 없던 길은 물이 불어서 돌다리를 넘어 건너가지 못하고 약간 돌아서 가는 고갯길을 가야 했다.
짐은 다 꾸려지고 이제 버스가 서는 곳으로 출발을 했다. 어머니는 따라오지 못하고 마을 입구까지 나와서 떠나는 아들과 일행을 배웅하고 집으로 들어가셨다. 아마도 도시로 가서 공부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냈을 것이다. 모두 같이 떠나는 사람은 넷 명이었다. 학교 하러 가는 본인과 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그리고 작은 아버지였다. 작은 아버지는 무거운 된장이 든 단지를 지게에 지고 말없이 버스가 서는 곳까지 짐을 옮기는 것이다. 조카가 공부하러 떠나니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나머지 사람은 짐을 들고 가기도 하고, 증조할머니는 물건을 싼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가셨다. 십 리가 더 되는 길을 걸어가면서 아는 사람들과 만나면 하는 인사가 “가서 공부 잘해라”였다. 가족들은 보부상처럼 이고 지고서 버스서는 곳까지 늦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한 번도 쉬지 않고 간 것이다. 온 가족이 유학 떠나는 맏이를 위해서 정성을 다하는 모습들이었다. 버스에 짐을 실어 주고 작은 아버지는 버스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서야 온 길을 빈 지게 지고 돌아갔다.
아직은 포장이 안 된 도로여서 된장 단지가 혹여나 깨질까 해서 증조할머니는 감싸 안으면서 의자에 앉으셨다. 학생은 그렇게 먼 길을 버스 타고 오면서 지루한 생각도 없었고, 앞으로 공부할 걱정보다는 도시에 살아갈 생각으로 마음이 설레기만 했다. 버스에서 내린 도시 정류장은 복잡했다. 사람들도 많았고 이제 공부하러 온 학생들과 따라온 사람들로 복잡해서 촌닭처럼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할아버지는 짐 실어 주는 리어카꾼에게 단지와 짐을 싣고 자취 집을 찾아서 갔다. 어디가 어딘 줄 구분이 안 되지만 리어카꾼을 따라서 자취 집에 도착했다. 이렇게 시작된 도시 유학 첫날밤을 지내고 할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가시고 증조할머니와 같이 집 떠나 처음으로 타지에서 살게 되었다. 온 가족이 정성으로 관심을 가져 주었던 생각을 하면 아직도 그립고 애잔한 감동의 느낌이 가슴에 자리하고 있다. 도시로 떠나던 그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세월은 흘러서 볼 수 없는 분들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시내버스 첫 차를 타고 아직 한 두 명이 온 도서관에 도착해서 늘 앉던 창가의 자리를 잡았다.
공부할 책을 펼쳐 놓고 열심히 머리에 넣으려고 집중을 한다. 마음과 같이 집중하지 못하고 머리만 무거운 느낌이다. 잠시 바깥으로 나가 먼 하늘을 보고서 심호흡도 하고 서성이다가 자리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머리에 들어가는 것 같다가 다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느낌이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가 싶어서 도서관 그 자리에 엎드려 잠을 청해 본다. 잠도 오지 않는다. 온종일 그런 상태가 반복된다. 마치 에너지가 모두 빠져나간 기분이다. 오랫동안 집중해서 공부해온 탓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음날은 아침 일찍 도서관으로 가서 잠시 머물다가 바닷가로 가는 버스를 탔다. 바다를 보면서 쉬다가 오면 될 것 같은 기분에서이다. 바다에 도착해서 방파제에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다가 부근 가게로 가서 소주 한 병과 오징어를 사서 다시 방파제로 갔다. 갯냄새를 맡으면서 한 잔씩 하는 소주는 별로 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바다에 머물다가 다시 돌아왔다. 다음날은 조금 나아진 것 같았지만 다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느낌을 온다. 모든 기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다. 여러 생각을 하다가 고향으로 며칠 쉬려고 돌아왔다.
모친은 기가 빠져 돌아온 아들에게 소머리 반 마리를 사다가 가마솥에 푹 고아서 쉬고 있는 아들에게 먹였다. 일주일 정도 먹고 나니까 원기가 회복된 느낌이 들었다. 다시 서둘러서 대학 도서관으로 갔다. 전과 같이 공부에 능률이 붙었다. 모친에게 무슨 말도 하지 않았는데 느낌으로 소머리를 사 온 신 것이다.
군에 제대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 시기라는 것을 느꼈다. 그때의 판단으로는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그때 막내 여동생이 인근 도시로 유학을 가는데, 같이 나가서 그 도시 대학 도서관에 그 대학 학생보다도 더 일찍 가서 가장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그 길밖에 없는 것 같았고, 될 것 같은 희망을 있어서 체력의 한계까지 공부했던 것이다. 시간이 아까워서 저녁은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가서 휴게실 한쪽 구석에서 해결했고, 점심은 계란 2알에 미숫가루를 타서 공부하는 도서관 그 자리에서 먹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절약하기 위해서다. 이런 생활을 몇 달 하다가 보니까 엉덩이는 자리에 있지만, 능률은 갈수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정신력을 버티어 갔지만, 나중에는 눈으로는 보고 있지만 머릿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멍한 느낌이고 무엇을 보았는지도 기억이 가물거렸다. 그래도 하면 된다는 희망에 매달려서 자리에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 당시는 희망이라는 그것 때문에 힘들어도 버티었고 그래도 그때가 행복했었다. 막연하지만 좋아질 것 같았고, 내가 가족들에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희망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멍한 상태로 고향에 돌아온 아들에게 소머리로 체력을 보충해 주신 모친의 정성이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 아직도 그 일은 감동이고 짠한 느낌으로 자리하고 있다.
연희동 언덕 위에 작은 구립 도서관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열람실에서 나오면 크지는 않지만 앞마당이 있고, 그 앞에는 화단이 만들어져 있다. 그 화단에는 채송화와 봉숭아꽃이 피어 있었다.
삼십이 넘어 보이는 청년이 열심히 손톱에 무엇인가를 바르고 있다. 봉숭아 꽃잎을 따다가 진 이겨서 새끼손가락에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는 잎도 조금 뜯어서 꽃잎에 덮어 실로 찬찬히 묶어 주고 있었다. 나이가 먹을 만치 먹은 어른이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드리는 것이 특이하게 보이고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청년의 얼굴은 진지했고 간절한 바람도 보이는 듯했다.
일어나면 무거운 가방을 들고 출근을 했다. 늘 가방 속에는 두꺼운 책들이 가득해서 둘러 멘 어깨가 균형이 잃을 정도였다. 어떤 일도 이렇게 열심히 한 적은 없었다.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머릿속에는 공부였고 잠시 쉬는 틈에는 어김없이 부근의 한적한 곳으로 가서 공부를 했다.
출근하면 온종일 근무하고 그다음 날은 휴식하는 날이다. 그날 아침에 집으로 퇴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곧장 구립 도서관으로 출근을 했다. 그때도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시내버스를 타고 도서관 아래에 내려서 언덕 위에 있는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온종일 공부하다가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점심은 도시락을 써서 아내가 가져왔다. 그래도 금방 싼 도시락을 먹는 재미도 있어 점심때가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 도서관을 이른 봄부터 시험을 치는 겨울까지 계속 다녔다. 이른 봄날에 도시락을 가져온 아내와 같이 도서관 옆의 중학교를 지나면 산속에 작은 쉼터가 있었다. 그 쉼터에서는 벚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벚꽃이 만발할 때는 그 밑에서 도시락을 같이 먹었고, 그다음에는 야생화가 피어나는 계절이 온다. 그 야생화가 만발할 즈음에는 그렇게 나비가 많았다. 나비 중에서 호랑나비가 무척 많았다. 호랑나비가 꽃처럼 춤추며 날아다니고 따뜻한 날씨에 아래를 내려다보면 연희동이 한눈에 보이고 순환도로의 차들은 쉴 새 없이 지나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서 아내와 같이 도시락을 먹던 시절이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한 것은 진급한다는 희망이 있어서 매일 도시락을 싸 오는 고단도 그렇게 어려움 없이 지냈던 젊은 시절이었다. 온종일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지만 그래도 가끔 도서관 앞에 있는 작은 화단에 나오면 채송화도 감상하고 어느 날은 꽃 핀 봉숭아 꽃을 따다가 새끼손가락에 물을 드리기도 했다. 새끼손가락 손톱에 물이 들어서 나중에 손톱이 자라 초승달 모양이 될 때에 초승달이 뜨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꼭 겨울에는 진급을 하기를 바라던 마음이었다.
그해 겨울에 그렇게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이름이 있을 때 아내는 기뻐하지 않고 울던 것이 기억난다. 재미없이 보낸 젊은 날의 기억 중에서 그래도 머리에 남아 있는 일이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다. 원래 정해진 날이니까 어떻게 할 수는 없고 행사는 시간이 되어서 진행되고 있었다. 갑자기 월드컵 경기장 위로 경기장 둘레와 같은 크기로 불꽃이 화려하게 피어오르면서 행사 시작 팡파르가 울린다. 그런 화려한 불꽃을 가까이서 보기도 처음이다. 미처 그런 광경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내가 하는 일은 너무나 바빴고 힘들어서 구경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사히 행사를 마쳤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비옷을 입거나 우산을 쓰고 자리를 지켰다. 살아가면서 한 번도 경험하기 힘든 월드컵 경기의 전야제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야제가 전 세계에 지금 실시간으로 중계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행사가 혼란스러운 일이나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안전을 위해서 전국에서 온 100가 훨씬 넘는 경찰 부대가 배치되어 있고, 입출입의 통제를 위해 수천 명의 경찰들이 근무하고 있다. 이 모두를 내 무전기로 지휘하고 있다는 자부심보다는 시간은 여삼추처럼 늦게만 가는 것 같았다.
비만 내리지 않아도 좋으련만 비는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행사는 진행되었고 나는 행사장 무대 옆에서 전체를 보면서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근무하는 중이다. 행사의 요란한 음악과 화려한 조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무사고만 머리에 가득했다. 이때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다. 내 어깨를 잡고 물을 없는 냐고 물었다.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물은 없고, 바쁘니까 다른 사람에게 알아보라는 액션을 취했다. 내가 지금 바쁘게 전체 안전을 위해서 무대도 쳐다보지 않고 관중만 바라보는 것이 보일 텐데, 물을 달라고 하는 위인이 궁금해서 돌아다보았다. 그 사람은 그때 세계적으로도 가장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다. 그런데 우연히 보니까 옆에 누가 먹다가 남겨둔 물이 반 통이 있었다. 그래서 그 물을 집어서 주니까 그렇게 반갑게 다 비우면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했다.
그때도 모친과 장인어른도 초청해서 같이 보았지만, 행사 내내 한 번도 어디에서 계시는지 잘 보고 있는지 돌아보지 못했다. 그때 잘 안내해 주고 신경을 더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행사가 끝나고 모두 돌아가고 나서야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느낌이 왔고, 그 후 여러 행사를 무사히 하면서 월드컵 대회는 성공리에 마쳤다. 내가 원해서 한 일도 아니고 직업상 한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워낙 큰일이라서 기억 속에 남는 일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니까 사람은 어느 목표를 달성하는 것보다 그 목표로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등산을 하면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서 앞이나 밑만 보고 갈 것이 아니라 옆에 핀 아름다운 꽃들도 감상하면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별로 기억이 없다. 나도 이제 그 위치가 되니까 아들과 같이 할 추억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설악산에 올라가는 길은 예전에 올라간 적이 있는 길이지만, 나이 탓인지 너무 멀었다. 봉정암이 곧 나올 것 같았지만 나오지 않고 힘이 다 빠지고 나서야 봉정암에 도착했다. 봉정암에서 맑은 물을 먹으니까 살 것 같았지만 오늘 하룻밤 묵을 곳은 소청대피소로 예약했기에 다시 올라갔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편한 마음으로 올라갔는데 가도 가도 소청대피소는 나오지 않았다. 벌써 지친 상태였고, 지도상으로는 바로 위인 것 같아서 곧 도착할 것 같은데 나오지 않으니까 그 피로도가 몇 배가 되는 것 같았다. 힘들었지만 아들 앞이라 불편도 못하고 그냥 나이 탓만 할 수밖에 없었다.
도착한 소청대피소는 전망이 좋았다. 산들을 내려다보면서 대피소 앞 식탁에서 저녁을 준비했다. 불판을 걸고, 가지고 온 고기를 굽어서 먹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전에는 술을 판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술 자체를 먹지도 못하게 했다. 여기서 술을 구하려고 짐이 되는 술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런데 소주 한 병이 있었다. 아들과 같이 그 소주를 종이컵에 따라서 몰래 먹었던 맛이 일품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은 라면을 끓여서 마무리했다. 산 위에 먹는 라면의 맛은 최고였다.
아들과 산 위에서 고기 구워서 먹던 일은 나에게도 좋은 추억이지만 아들에게도 오래 기억에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다음날 새벽에 설악산 일출을 보기 위해서 일찍 어둠을 속에서 같이 올랐다. 한참을 올라도 어둠을 걷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서로 안전을 생각하면서 플래시 불빛으로 정상에서 일출을 보겠다는 생각으로 걸었다. 어둠이 걷힐 즈음에 중청대피소를 지나서 정상에 올랐다. 그렇게 고대했던 일출은 보지 못했다. 그래도 아들과 같이 한 그 설악산이 좋은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도시의 한 여름 날씨는 낮 시간은 거리를 걷기가 힘이 들었다. 밤이 되어 해가 떨어지면 그래도 낮보다는 활동하기가 좋지만, 더운 기운은 여전해서 움직이면 땀이 난다. 이런 더운 날씨 탓에 앞산에 야간 산행하는 곳이 있어서 올라가면 큰 도시가 모두 보이는 전망대가 있다. 그 전망대에서 둘러보면 큰 도시의 찬란한 불빛과 거리의 가로등은 도로를 따라 빛나고 있었다.
전망대에 오르는 일은 쉽지는 않았다. 처음 시작하는 곳부터 끝까지 급한 경사로 되어 있거나 아니면 계단으로 정상에 오를 때까지 숨을 몰아쉬면서 올라갔다. 같이 간 분은 하나도 숨을 헐떡이지 않는데 나만 숨이 차는 것은 이제 살 만큼 살았다는 의미도 되지만, 그래도 같이 가줄 사람이 있어서 젊은 사람들처럼 즐겁기만 했다. 온몸이 땀으로 젖고, 숨을 몰아쉬면서 올라간 전망대는 젊은이 세상이었다. 그래도 젊은이들 사이에서 같은 기분으로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한 여름의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올라간 곳을 내려올 때도 쉽지는 않았지만, 내려가서 한잔한다는 생각에 힘이 덜 들었다. 내려와서 한참을 헤매다가 찾은 생맥줏집은 맥주잔을 얼려서 맥주에 어름이 서리도록 해서 주는 생맥주였다. 그 이름이 “아재 맥주”집이다. 여름밤에 산에서 흘린 땀으로 그 맥주 맛은 말로 표현을 못 할 정도였다. 밤 산행 후의 추출함과 마음 맞는 사람과 어울려서 뒤풀이하는 맛이란 열 잔을 먹어도 먹을 수 있지만, 두 잔씩으로 끝내는 아쉬운 맛도 보았다.
계절이 바뀌어서 몹시 추운 겨울날 주변에서 가장 높은 동봉에 올랐다. 눈 내린 뒤라서 산행을 하면서 예쁘게 핀 눈꽃을 원 없이 보면서 올라갔다. 그때의 추위와 매서운 바람은 눈만 내놓고 모두 감싸고 올라갔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춥다가 나중에 땀이 나면서 올라갈 만했다. 몇 시간이 걸리는 높은 산이니까 힘이 들었지만, 같이 간 동반자가 좋아서 즐거운 산행이었다. 동봉에 올라서니까 칼바람이 너무 심해서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지만, 그 정상에서 바위를 바람막이 삼아서 좁은 작은 공간이지만 컵라면을 먹었다. 그런데 컵라면은 가지고 온 뜨거운 물을 부었지만 익지 않고 라면에 뼈가 있었다. 그래도 그 뼈 있는 라면이 이제까지 먹은 라면 중에는 최고였다. 또 같이 가져온 김치 맛은 일품이었다. 집에서 보온병에 팔팔 끓여온 정종은 목을 넘어갈 때부터 따듯한 것이 배속에 들어가서는 몸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그 보온병의 정종을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려고 서로 보온병에 눈길을 떼지 않았다. 거의 똑같이 나누어 먹었다. 그렇게 정상에서 즐겁게 보내고 내려와서 막걸리와 납작 만두로 한 하산주는 그 맛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도시에서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추억으로 남았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은 기억 속에 남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물론 괴로운 일도 생각나고 어려워서 고생한 것들도 기억에 남아 있지만 즐거운 기억은 아니다. 여기에 남이 시켜서 한 일이나 일상적인 일 중에도 보람찬 일이 있지만 내가 좋아서 한 일에 비교될 수 없다.
어쩌면 인생은 “추억 만들기” 인지도 모른다. 그냥 무의미하게 지내는 것보다 추억을 만들어가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추억 만들기에 인생의 의미를 두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방법이다.
잘한 선행이나 다른 사람의 좋은 주목을 받는 것도 좋은 것이지만, 내가 하고 싶었고 즐거웠던 일은 더 기억하고 싶은 것으로 마음에 자리한다.
살아가는 것은 “즐거운 추억 만들기”이다. 미소가 도는 기억이 많은 사람은 더 즐겁게 살아온 것이다. 살면서 보통은 의미 없이 흘러가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좋은 추억이 될 만한 것은 찾아야 하고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