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2

by 안종익


이른 새벽의 도심은 한산하였다. 몇 년 만에 이른 새벽에 서울 한가운데를 지나지만 그렇게 변한 것이 많지는 않았다. 예전에 공사하던 창경궁 옆 도로는 완전히 복개가 되어서 종묘공원과 연결된 것 같고, 복개된 지하도는 새벽시간은 택시가 2차선을 무한 속도로 갈 수 있을 정도로 한산하지만, 낮 시간에는 이 도로도 정체될 것이다. 아무리 도로를 넓혀도 차량의 증가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은 한라산을 가기 위해서 새벽에 집에서 나왔다. 아들이 어제 군에서 제대를 했기 때문에 새로운 출발의 의미에서 등반을 계획한 것이다. 한라산은 예전에 올라간 적이 있는 곳이지만, 아들이 입대하기 전에 설악산과 지리산은 같이 올랐기에 이번에는 한라산으로 산행을 정한 것이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같이 여행할 시간이 별로 없을 것이다. 김포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도착했다. 여행이라는 것은 구경도 의미 있지만, 여행 중에 먹는 식사도 기대하면서 가는 것이다. 제주공항에서 아침 식사는 배를 채워주기도 했지만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살 감 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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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정상은 성판악과 관음사에서 올라가는 두 곳이 있다. 성판악은 예전에 올라간 코스이므로 이번에는 관음사 쪽으로 입산 신청을 했었다. 요즈음 한라산은 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전에 신청을 받아서 일정한 숫자의 등산객을 받고 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신청하지 않고 입구에 가서 돌아가는 사례가 있다고 한다.


등산하면서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은 일품이다. 특히 겨울에 바람 불고 추운 정상에서 따뜻한 컵라면의 맛은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을 것이다. 한라산에서도 그렇게 하려고 보온병에 물을 끓여서 넣었다. 컵라면을 공항에서 살려고 하니까 취급하지 않았다. 쓰레기가 많이 나오고 별로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등산하는 초입에 가서 살 생각으로 갔다. 마침 등산로 초입에는 마트가 있었다. 그 마트에서 컵라면을 찾으니까 여기도 취급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라산 공원 관리공단에서 컵라면을 팔지 말도록 했다는 것이다. 컵라면을 팔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으니까 순간 당황이 들었다. 그렇지만 보온병의 뜨거운 물은 버릴 수도 없고 그대로 가지고 올라가야 했다. 그것보다는 정상에서 맛있는 컵라면을 못 먹는다는 생각에 다른 곳에 가서 사 오고 싶은 마음이지만 관음사 입구 주변은 산뿐이었다.


관음사에서 올라가는 길은 처음부터 완만했다. 그래도 이 코스가 가장 긴 코스라고 한다. 관음사 길은 현무암으로 정비된 돌산길이다. 현무암을 밟고 올라가는 한라산 등반은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다. 한참을 올라가니까 성판악 쪽과는 다르게 적송 군락지가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그 크기도 크지만 나무들이 잘 생기고 곧게 자라고 있어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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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봉 대피소까지는 눈이 없었다. 대피소가 보이는 곳부터 눈길이 시작되면서 아이젠을 준비하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그러니 자연 내려오는 사람들의 신발에 눈이 갔다. 대다수가 아이젠을 했지만 더러는 하지 않았고 어떤 젊은이들은 운동화로 내려오는 사람이 있어서 조심해서 올라가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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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봉 대피소도 절경이었다. 삼각대 피소에서 정상까지는 아직도 눈이 그대로 있는 설경이었다.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힘들기 시작하니, 올라올 때는 정상도 좋지만 그 중간에 있는 경치도 즐기면서 가야 한다는 생각도 힘들어 지니까 좋은 풍경보다는 힘든 생각뿐이다. 정상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높은 곳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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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으로 가는 길은 힘든 여정인만큼 여러 생각들을 하면서 올라가는 길이다. 내가 지금까지 짊어지고 가는 잡다한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오겠다는 생각은 단골로 갖는 마음이다. 어떤 산행은 작정하고 그동안 내가 아팠던 기억이나 후회된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고 올라간 산도 있었다. 그렇게 수없이 산에 오르면서 내려놓으려는 마음으로 올랐지만 아직도 내려놓을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좋아서 올라가면 되는 것이 산이지, 즐거운 마음으로 의미나 구실을 만들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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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오늘 등반 신청한 사람들이 모두 그대로 모여 있는 것 같았다. 힘들게 올라온 정상이므로 조금이라도 더 머물면서 아래 보이는 백록담이나 제주를 내려다보고 싶은 것이다. 올라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사진들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그리고 일부는 가지고 온 식사를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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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은 시간상 산에서 중식을 먹을 수밖에 없는 코스이다. 8시간 전후로 등반하면서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상에서 먹는 음식 중에는 컵라면이 가장 많이 보였다. 산 위에서 먹는 컵라면의 맛은 대부분 좋아하는 것 같다. 이들은 아마도 집이나 등산로 입구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컵라면을 준비해 온 것이다.

정상에서 컵라면을 못 먹도록 등산로 입구에서 팔지 않는다는 정보를 미리 알지 못한 것이 아쉬운 일이고, 아마도 택시기사에게 물어보아도 알 수 있는 정보이지만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한라산에서는 컵라면과 일회용 도시락을 못 먹게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 조치를 했는지 모른다. 식사는 해야 되고 그것들을 먹고 남은 쓰레기는 다시 가져오면 되는 거지, 안 가져오고 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그런 조치를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컵라면 먹는 사람들에게 여분의 컵라면이 있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먹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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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는 현무암으로 만든 한라산 표지석에서 기념 촬영을 하기 위해서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 줄이 너무 길어서 처음에는 올라오는 사람인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까 모두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라산 정상이라고 표시된 곳에서 왔다는 기념사진을 누구나 남기고 싶은 것이다. 자기 차례가 돌아온 사람들은 간단하게 한 장 찍고 빠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갖가지 포즈를 취하면서 영화를 찍는 것이다. 한 시간 이상 기다린 것이니까 이해도 되지만 너무 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간간히 빨리 끝내라는 고함소리도 들린다. 그 포지석 옆에 나무로 된 정상을 표시하는 곳이 한 곳 더 있었다. 급한 사람은 여기라도 기념촬영을 하고 내려가라고 만든 곳인 것 같다. 이곳도 줄이 길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줄을 섰다. 한참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니까 이곳도 심할 정도로 갖가지 포즈로 시간을 끄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통은 두 사람이 왔으면 각각 단독 촬영을 하고 다음은 같이 사진을 찍는 순서이다. 바로 앞에 줄을 선 남녀는 서로를 찍어 주는 것이다. 다음은 같이 촬영을 할 순서인데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하니까 자기들은 같이 찍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가는 것이다. 힘들게 올라와도 같이 찍지 못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라산 정상에서 하산길은 올라온 쪽과 반대로 성판악 쪽으로 내려갔다. 이 길은 급하게 내려가다가 완만해지는 길이다. 사라오름까지는 급한 경사가 이어진다. 예전에 왔을 때도 사라오름을 들리지 못했다. 체력이 떨어질 무렵에 지났기 때문이다. 그때는 다음에 오면 들리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지금은 역시 체력이 떨어져 못 갈 것 같다. 이번에는 사라오름은 이제 다시는 못 올 것 같은 기분이다.

사라오름을 지나서 내려오는 길은 너무나 길었다. 내려오는 하산길이 이렇게 지루하게 느낀 적은 별로 없었지만 한라산 성판악 마지막 하산길은 무척 멀기도 하고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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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하산길에서 인생 하산길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끝은 있고 이제부터는 무엇을 보겠다는 것도 없이 체력이 고갈되어 가는 시간들이다. 지루한 길을 힘없이 걸어가는 인생 하산길도 그와 같은 것이다. 그러다가 조심하지 않으면 크게 다치는 길이기도 하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도 성판악 입구가 보이면서 끝이 났다. 성판악으로 내려오는 길은 속밭대피소를 지나면서 곧 끝날 것 같은 길이 너무나 길었다. 앞으로 인생길도 그렇게 길고 지루한 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한라산이 나에게 말하는 것 같다.

한라산은 아들과 같이 추억을 갖기 위해서 오른 길이다. 인생은 추억 만들기이다.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추억은 만들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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