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초당을 찾았다. 다산의 유배생활을 하던 초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초당을 떠오르면 초가집에 작은 집이 연상된다. 목적지 주차장에 도착해서 다산 초당으로 보이는 것이 있는지 돌아보았다. 옛날 고가는 많았지만 초당으로 생각되는 집은 없었다. 초당은 여기서 더 가야 있다는 표시를 보았다. 산속으로 3백 미터를 가라는 것이었다. 초당은 산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3백 미터이니까 가깝게 느껴졌다. 올라보니까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오르막으로 계속 올라가면서 바닥은 거친 돌이 많은 길이었고, 나무뿌리가 길 위로 드러나면서 걷기가 힘들었다. 초당 가는 길은 험하고 어려웠다. “여행은 걷기다”라는 생각이 절로 났다. 걷지 못하면 여행하기란 힘든 고생길이다. 힘들게 올라가니까 생각했던 초가집이 아니라 기와지붕이 나왔다. 아마도 처음에는 초가지붕이었을 것 같은데, 나중에 기와로 바꾸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차라리 초가였으면 세 칸 방에 주변 경관과 어울리는 풍광이 될 것이다. 다산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많은 많은 저술을 했는데 이곳이 약간 높은 곳이라 아래가 보면서 책 쓰기는 적합할 것 같다. 지금은 편백나무와 아름드리 소나무로 답답한 느낌이 든다.
다산초당 양쪽에도 집이 있는데 동쪽 집 뒤로 오솔길이 있었다. 백련사로 가는 길이라 표시되어 있다. 유배생활이 적적할 때에 산 넘어 있은 백련사의 해장 스님과 오가면서 학문을 논하고 함께 차를 마시면서 벗으로 우정을 쌓았다. 이 길을 서로가 오가면서 만남을 가진 것이다. 그 길을 한번 가고 싶었다. 다산도 이 길을 걸었다고 생각하니까 오르막이지만 힘들지 않았다. 이 길은 편백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수령으로 보아서는 요즈음에 심은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꼬인 나무가 있었다. 길은 오르막을 지나서 내려가는 길로 가니까 백련사가 나왔다. 백련사는 통일신라 말에 창건한 절로 만덕산 밑에 있다. 그래서 만덕 사라 고도한다. 백련사를 찾는 사람이 많은 것은 혜장 스님과 다산이 이야기와 다산초당에서 오솔길이 이곳까지 만들어져서 더 늘어났을 것이다. 또 백련사에는 천연기념물인 동백나무숲이 있기 때문이다.
동백나무가 너무나 많아서 떨어진 동백꽃도 엄청났다. 동백나무는 남해안의 섬에 가면 흔히 보는 나무이다. 백련사의 동백나무가 많지만 다른 곳의 동백나무와 차이는 없다. 떨어진 꽃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 그런데 여러 곳에서 떨어진 동백꽃을 사랑 마크인 하트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보았다. 그 만들어진 하트를 보고 백련사에 이맘때쯤에 많은 관광객이 올 수 있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백련사의 떨어진 동백꽃으로 사랑 마크인 하트를 만들면 사랑이 이루러 지거나 짝이 없는 사람은 짝을 생긴다는 소문을 내는 것이다. 그러면 이맘때쯤에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짝을 찾는 사람들이 이 백련사에 모여들어 넘쳐 날 수도 있을 것이다. 와서는 떨어진 동백꽃을 주어서는 하트를 만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갈 것이다. 이곳에는 동백나무가 너무나 많아서 하트를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백련사가 되는 것이다.
강진 오일장은 날짜가 맞지 않아서 강진군 성전면에 있는 성전 오일장에 갔다. 점심 전에 갔지만 오일장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요즈음은 장이 거의 서지 않는다고 한다. 집집마다 차가 있어서 필요한 물건은 보통 읍내의 대형마트에 가서 사 오고, 오일장에 오는 사람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나이 든 사람이 오는데, 노인들도 나이가 들어서 오일장에 못 오는 경우가 많아지니까 서지 못하는 것이다. 나물이라도 가져오는 할머니들도 이제는 별로 없지만, 그런 할머니들도 사람들이 많은 읍내장에 가니까 작은 면 단위의 장은 거의 서지 않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서지 않는 성전 오일장터를 둘러보고 오다가 도로변에 있는 백반집에 들어갔다. 주변에 사는 사람이 이용하는 평범한 밥집이었다. 밥값도 보통이었는데 나오는 반찬은 15가지가 넘었다. 반찬마다 맛이 있었다. 오늘 나온 국은 봄철에 제격인 쑥국이 나왔다. 주인도 친절하고 부족한 반찬은 추가로 넉넉히 주고 있었다. 역시 남도음식은 맛나고 음식 인심도 좋았다.
강진 읍내로 들어가니까 김영랑 시인의 생가가 있었다. 생가를 찾는 관광객이 많아서 주차를 먼 곳에 하고서는 걸어서 갔다. 생가는 초가지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초가지붕이 훨씬 예스럽고 보기도 좋았다. 강진에서 자랑하는 시인인 만큼 강진군에서 관리도 잘하고 있었다.
영랑은 아호이고 본명은 김윤식이다. 황토색이 짓은 세련된 시어를 사용하는 시인으로 저항 시인이기도 하면서 시문학파에 참가했다. 영랑생가 주변에는 온통 모란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집 뒤쪽의 언덕 위에는 모란공원이 있는데 그곳에 모란꽃 천지였다. 모란꽃이 피는 오월이 이곳 방문객이 가장 많을 것 같다. 모란을 목단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아직 싹이 나오려고 하는 때이지만 오월에 온 집안과 뒤쪽 언덕 공원에 모란꽃이 피면 정말 보기 좋은 것 같다.
이곳에서는 영랑 시인 덕분에 시문학파의 기념관도 있었다. 정치색을 버리고 순수시를 지향했던 시문학파는 영랑 시인을 비롯해서 박용철, 정인보, 변영로, 정지용, 이하윤 등으로 참여했던 시인들은 영랑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더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