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을 메고 숙소를 나선다.
비가 내린다. 가랑비가 내리는 길을 그냥 맞으면서 걷는다. 비 오는 날을 대비해서 우산은 준비했지만 무거운 짐을 덜기 위해서 택배로 같이 보낸 것이다.
아침에 비를 맞고 걸어가는 내 모습이 처량해 보이는 것 같고, 마음속에서도 한없는 허무가 밀려온다. 아무에게도 관심받지 못하고 혼자가 된 기분을 알 것 같다.
이 길은 내가 나를 보기 위해서 스스로 걷는 길이고 이렇게 일찍 바쁘게 움직여야 무엇인가가 보일 것 같다.
백석 항을 지나서 칠보산 자락의 해안 길은 차들도 별로 다니지 않고 조용한 아침이다. 오늘 아침에 들리는 바다 파도 소리는 웅장한 느낌이다.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가 높이가 크고 거세다. 바다에 고깃배가 보이지 않고 작은 항구에는 배들이 모두 정박해 있다. 파도가 높아서 오늘 고기잡이를 나가지 않은 것이다.
영덕 구간은 지났는지 방파제나 가로등에 대게를 상징하는 표시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게의 표시도 간간이 보이지만 울진 대게로 표시되어 있다.
아직도 가랑비가 오기 때문에 우산을 구할 생각으로 마을을 지날 때 가게를 찾아본다. 가게는 찾지 못했지만 비 오는 날 아침에 노인들이 모여서 정답게 이야기하고 어떤 곳은 어부들이 많이 이용하는 포터 차량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곳도 있다. 파도가 높고 비 오는 날은 어부들도 쉬는 날인 것이다.
이렇게 걷다가 보니까 멀리 후포가 보인다. 후포는 울릉도로 가는 최단거리 뱃길이 있는 여객선 항구이고 이 부근에서는 제법 큰 항구이다.
젊은 날에 같은 직장에 다니던 춘발이 형이 근무하던 곳이다. 춘발이 형은 나이는 훨씬 많았지만 늘 웃고 친절한 분이었다. 여기서 근무할 때 같이 어울려서 한잔하던 생각이 나면서 보고 싶어 진다. 지금이라고 만나면 그 호탕하고 환한 웃음을 웃겠지만, 수십 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까운 사람은 일찍 떠나는지 비 오는 날 후포에 오니까 그 형 얼굴이 떠오르고 보고 싶은 마음이 그리움이 된다.
후포 해안 길도 길이다 엄청나다. 끝없는 길을 걷다가 보니까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오늘이 후포장날인 것 같다. 마침 잊어버린 털모자를 구입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장터로 들어갔다. 도루묵과 가자미가 한창인지 많이 나왔고 모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다음 주에 추워지고 강원도로 들어가는데 모자는 꼭 필요한데 구하지 못했다.
이렇게 해파랑길 23코스가 끝나고 다시 후포에서 24코스가 시작된다.
후포 읍내에서 산 위에 있는 신석기 유적관과 등대공원으로 올라갔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한눈에 바다와 후포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잘 조성되어 있었다. 이 공원에서 내려오면 다시 해안 길을 걷는다.
울진 황금대게 공원에서는 대게는 울진이 원조라고 강조하고 있다. 오전에 시작할 때의 해안 도로는 영 덕대게로 였지만 지금의 해안 도로는 울진대게로이다. 이처럼 영덕과 울진이 오래전부터 대게는 자기들이 원조라고 주장한다. 대게로 유명한 곳은 영덕 강구항이지만 실제로 많이 잡히는 곳은 울진이라고 한다. 울진의 주장은 대게가 많이 나는 왕돌잠이란 바다가 울진 바다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은 대게를 가장 많이 잡는 곳은 포항 구룡포항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대형 선박이 이곳에서 출항하기 때문이다.
직산 항을 지나면 월송정의 울창한 해송이 멀리서도 보인다.
월송정은 관동팔경 중에 하나로 조선시대 만들었다는 설과 그 이전 고려 시대에 이미 기록에 있어서 그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밝은 달이 떠올라 소나무 그림자가 비치었다는 의미라고 하는데 많은 시인들이 월송정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한 곳이다. 이곳의 해송은 수령이 오래되고 그 자세가 꼬꼿한 것은 소나무 살기에 적당한 토양과 조건을 갖춘 곳인 것 같다. 월송정과 구산해수욕장은 캠핑카와 텐트가 많이 오는 곳이다.
해파랑 해변길을 걸어 올라오면서 어디 가나 보이는 것이 있다.
이곳은 어패류나 미역 등을 채취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무단으로 출입을 금합니다. 만일 어기면 민. 형사상 고발되어 처벌을 받는다는 경고판이다. 꼭 마지막에는 어디 마을 어촌계장이라고 쓰여있다. 바닷가에는 어촌계장의 권한이 상당한 것 같다.
어패류의 종패를 뿌렸다고 쓰인 곳도 있지만, 자연적으로 난 것들도 어느 선까지 채취를 금하는지 기준도 없고 무조건 지정된 해수욕장 외에는 들어가면 안 되는 것으로 인식될 정도로 경고판은 마을마다 서 있다. 바다도 주인이 있는지, 구경만 해야 하는 바다인 것 같다.
오늘은 해파랑길 24코스의 도착지인 기성면까지 걷기로 했다. 봉산 2리를 지날 때는 벌써 도착한 느낌이 온다. 앞으로 봉산 1리를 지나면 기성면이니까 마음은 가벼웠지만 다리는 천근이다. 봉산 1리를 지나면서 멀리 보이는 해안선을 돌아서면 기성면일 것 같았다. 그 해안선으로 갈 것으로 예상하고 그 방향을 보면서 걷고 있는데, 길의 표시는 반대로 왼쪽 완만한 고개 도로로 안내한다. 그 고개는 완만했지만 보기보다 한참을 올라도 끝이 없는 도로다. 겨우 넘어서 올라온 만큼 내려가서 모퉁이를 돌아서면 기성면 건물들이 보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다시 나타난 것은 7번 국도와 울진대게로가 교차되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벌판이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터덜터덜 걷기 시작한다. 배낭을 멘 어깨는 아파지고 몸이 뒤틀린다. 또 발바닥이 더 아파진다. 매일 마지막이면 오는 현상이다. 오늘은 예상했던 기성면의 건물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까 더 심한 것 같다. 멀리 이정표가 보인다. 이때는 오직 이정표에 쓰인 것을 보는 것을 목표로 눈을 이정표에 집중하고 걷는다. 기성면이 우측으로 500m라고 쓰여 있다.
이제 간간이 오락가락하던 가랑비는 오지 않는다. 오늘 24코스까지 온 것이다.
오륙도에서 출발하여 오늘까지 보름을 걸었다. 걸어온 거리는 410Km 정도 온 것 같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보름 정도이면 해파랑길을 모두 걸을 것이다.
2월 말경에 고성에 도착할 것 같다. 발바닥 아픈 것이 다시 재발하지 않으면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