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덕읍에서 숙소를 나올 때는 날은 밝고 맑은 날이다.
아침 햇살은 산 중턱에서 읍내로 내려오는 중이다. 읍내이지만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고 차들은 바쁘게 다니고 있다. 해파랑길 표시는 읍내에서 시골길 쪽으로 가다가 작은 고개를 넘어 옛 7번 국도와 만나게 된다. 그 국도는 예전에 통행량이 엄청났지만, 지금은 간혹 차가 지나간다. 그 도로를 따라 걷기가 한가할 정도이다.
길은 해안선을 따라 굽은 곳도 있지만 일직선이다. 도로의 오르막을 걸을 때는 한없이 지루하기도 하고 은근히 힘이 드는 길이다. 어떤 오르막길은 숨이 찰 정도로 급한 곳도 있다.
도로 길도 오르막이 있으면 그만큼 내려간다. 이런 오르락 내리락을 수십 번 하다가 보니까 임원항에 도착했다. 이렇게 지루하게 걸어온 거리가 9 Km 정도 되었다.
임원항에서 항구에는 들어가지 않고 좌측 임원천을 따라 난 길을 한 시간 이상 걸었다. 검봉산 자연휴양림 1Km 전 삼거리에서 우측 산속으로 들어간다.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앞을 보니 제법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간간이 집들도 있었고 차도 다닐 수 있는 임산 도로가 잘 만들어져 있다. 초행길이지만 산을 넘어야 바다가 나올 것 같았다. 그 산을 넘으려 생각하니까 오늘도 만만찮은 산길일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계속 산속으로 걸어가니까 그렇게 급한 오르막이 아니고 완만했다. 그래도 한 번은 힘든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각오는 하고 걸었다.
계속 걷다가 보니까 오르막 꼭대기 보인다. 저 꼭대기만 넘으면 내리막이 나올 것이라 기대는 하지만, 산길은 막상 가보면 또 고개가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그 고개를 넘었는데 이번에는 여기가 진짜 마지막이었다.
수월하게 산을 넘은 것이다. 내리막길도 올라온 만큼 내려가니까 갑자기 바다가 보이고 펜션이 많은 용화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레일바이크를 타는 곳도 있고 해변은 반달 모양으로 작지만 모래가 곱다고 한다. 또 이렇게 펜션이 많은 있는 것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것 같다. 이곳이 29코스의 도착지이다.
용화해수욕장에서 30코스가 시작되어 펜션 거리를 통과해서 다시 산으로 올라간다. 가다가 보면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내려오면 옛 7번 국도와 만나서 다시 도로를 따라 걸어간다. 이제는 아스팔트 길을 걷는 것이 익숙해져 있다. 걸어보면 걷기는 산길은 발이 덜 아프지만 다리가 힘들고, 아스팔트 길은 다리는 덜 힘들지만 발바닥에 힘이 들어간다. 30코스는 용화리에서 궁촌리에 이르는 구간이다. 이 구간은 레일바이크를 따고 가면 동해 바다를 감상하면서 갈 수 있는 구간이지만 오늘은 바람이 너무 불어서 레일바이크를 타는 사람이 없다.
황영조 기념관이라는 표지가 나오면 옛 7번 도로를 벗어나 해안 도로 길이 나온다. 황영조 마을은 초곡항이 있는 곳으로 아담한 작은 항구이다.
황영조 기념관은 공원과 함께 조성되어서 지금도 주차장에는 관광 온 차들이 많이 주차해 있었다. 황영조 기념관과 초곡항을 지나면 바다가 보이는 해안 길을 계속 가면 궁촌항이 나온다. 여기가 30코스의 도착지이다.
오늘 아침 출발할 때 장갑도 끼고 다시 장갑 낀 손을 주머니에 넣고 한동안 걸었다. 손이 시릴 정도로 추운 것을 보니까 한파가 시작된 것이 실감한다. 이런 추위에 아직 이불속에 있어도 누가 간섭하지 않을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18일째 걷고 있다. 이렇게 추운 날 무엇이 급해서 걷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무엇 때문에 걷는지 명확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는다. 한심스러운 면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길옆에 있는 집 개들을 짖게 하기 위해서 공연히 걷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지금 걷는 것은 물론이고 나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으니까 나라도 나에게 관심을 갖기 위해서 걷는 것일까?
아니면 시작했으니까 그냥 걷는 것일까?
습관적으로 다 걸어야 한다는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서 걷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생각나지만, 일단은 내가 걷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지금 어떤 처지인지 알려고 걷는다는 결론을 내어 본다.
나를 위해 살기 위해서 또 누구에게도 집착하지 않는 자존감을 갖기 위해서 걷는 것이다.
우리는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실패하는 것도 실망할 일이 아니다. 그 차이는 별것 아니고, 어떻게 자신이 자존감 있게 살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앞으로 삶은 큰 것만 생각하지 말고 작은 것에 만족하면서 자존감 있게 살아가는 것을 찾아야 한다.
궁촌항에서 한 코스 더 가서 오늘 걷기를 마치려고 했으나 여기서 쉬기로 했다.
바람도 심하게 불고 파도가 집채보다 크게 치는 날씨이다. 날씨도 추워서 더 이상 걷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궁촌항에는 민박이라고 쓴 집이 많았다. 그 대신 펜션이나 다른 숙박 시설은 없었다. 오늘은 민박집에서 묵을 생각을 하고 마을 입구부터 민박이라는 간판이 있으면 숙박 여부를 물었다. 대부분이 손님을 받지 않았다. 코로나 핑계도 있지만 지금은 비수기라서 손님이 거의 없어서 준비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찾는 여름 해수욕철에는 다시 민박을 할 것이다.
해파랑길을 걷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만, 지금은 추워서 걷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민박집을 찾을 수가 없어서 양지 볕에 쉬고 있는 할머니 옆에 앉았다. 다리도 아프고 힘이 들어서 더 걷기가 싫었다.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민박집을 찾는다고 하니까 할머니가 아는 곳에 전화하더니 한 곳을 잡아 주었다.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여기까지 493Km을 걸어오면서 한파가 두 번째 오는 것이다. 구정이 며칠 지나고 그렇게 춥더니, 보름이 지나서도 이렇게 추운 것은 내가 해파랑길을 걸으니까 고생하라는 뜻인지 아니면 여기서 그만두고 집에 가라는 뜻인지 잘 모른다. 일단은 오늘 묵을 숙소가 따뜻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