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암 부근에서 유숙했기 때문에 유명한 촛대바위에서 동해의 일출을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아 일출 시간에 맞추어 나갔다.
벌써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가장 잘 보이는 장소는 먼저 온 사람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다소 먼 곳에 자리를 잡고서 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구름이 있어서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해가 떠올랐다. 그냥 떠오르는 해를 보니까 나도 모르게 무엇인가 기원해야 할 것 같아 나머지 걷는 기간에 무사하게 완주하기를 빌었고, 가족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일출을 보고 난 다음에 곧바로 출발을 했기 때문에 오늘은 평소보다 빨리했다. 동해항까지는 바다 해안 길을 따라 아침 운동 나온 부지런한 사람들과 같이 걸어갔다. 동해항을 지나서 시내로 들어서니까 한적한 도시의 풍광이 펼쳐지고 동해역까지 복잡한 길은 없었다. 동해역에서 다시 해파랑길은 잘 다듬어져 있다. 동해역에서 한섬 해변에 이르는 중간에 골프장에는 벌써 골프 치는 사람들이 보인다. 복장은 평소 골프 옷이 아니라 거의 걷는 사람처럼 두터운 외투에 털모자를 쓰고 있다. 한섬 해변은 작은 해수욕장이지만 아기자기하고 잘 꾸며져 동해시 사람들이 많이 찾을 것 같다.
한섬 해변을 지나서 해송 사이로 걷기 좋게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면 멀리 보이는 항구가 묵호항이다. 묵호라는 이름은 왠지 오래되고 친근감이 오는 어감이다. 묵호 시내는 오래된 건물과 옛날 작은 집들이 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살다가 떠난 느낌이 들었고, 문 닫은 옷 수선집 간판이나 국숫집, 이발소 간판에서 발전이 멈춘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묵호가 동해안의 고기잡이 항으로 가장 번성했지만 가까운 동해항이 발달함에 따라 쇠퇴기를 맞았다고 한다. 거리가 옛날 도시 느낌을 준다. 묵호역에서 33코스는 끝났다.
걷으면서 무엇인가 정리하고 여러 생각을 하다 보면, 아쉬운 과거에 대한 후회, 주변에 잘 된 사람과의 비교, 본인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집착으로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느낀다.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들이지만 이것에서 벗어나야 행복할 수 있다.
걷는 동안은 회피하지 않고 많이 생각하고 그 생각에 대한 실체에 들어가 보기도 하지만, 모두가 나를 떠난 일이고 타인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난 일과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갖거나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 일에만 생각하고 신경 써야 하기에 이렇게 걷는 동안에 그런 것들을 다 버리고 가야 한다.
지금 내 나이에 가져야 하는 나의 자존감이고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하려는 자세와 태도이다. 생각해 보면 품위 있고 점잖게 살려고 분위기 잡는 것보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다른 사람에게 낮은 자세로 살아야 쉽고 편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도 자존감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묵호에서 시작한 34코스는 묵호항을 지날 때 묵호항 쪽으로 들어가 구경을 하다가 보니까 해파랑길 표시가 보이지 않아 다시 돌아 나와 길을 찾았다. 다시 찾은 표시를 따라가 보니 처음에 헤맨 묵호항을 지나고 있었다. 묵호항 쪽으로 그대로 갔어도 표시를 만날 수 있었지만, 어제 길을 잃어서 혼난 기억 때문에 다시 돌아가서 길을 찾은 것이다.
묵호항은 아직도 큰 항구이다. 항구 어판장에는 활기가 있었고 활어를 파는 아주머니도 사려고 온 사람들이 많고 시끌벅적하다.
묵호항 바로 옆에 있는 수변공원에서 화살표는 골목길로 안내한다. 그 길이 등대오름길이다. 등대까지 올라가는 길은 좁고 가파르지만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고 옛 정취가 묻어 있어서 구경하면서 올라가니까 지루한 감이 없다.
등대를 올라가니까 묵호항이나 묵호가 한눈에 들어오고 넓은 바다는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든다. 젊은 연인끼리 올라와서 정상에 있는 카페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차 한잔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등대에서 내려오면 해안 길이다. 바다 위 해안 길을 따라 계속 가면 어달항이 나온다. 어달항까지는 펜션이나 카페가 많았다. 어달항과 비슷한 항구로 대진항이 나오고, 다음은 망상해수욕장이다. 망상해수욕장은 삼척의 맹방 해수욕장처럼 큰 해수욕장이고 위치나 경관도 뛰어난 곳이다. 모래밭도 잘 다듬어져 있고 서핑하기에 좋은 곳인지 서핑 장비가 많이 보인다.
망상해수욕장을 지나면 7번 국도 옆길을 따라서 간다. 그 길이가 보이지 않아서 지루한 일직선의 긴 길이다. 그 지루한 길을 따라서 계속 가는 중간에 강릉시와 경계라는 간판이 보인다. 그 간판을 보고도 계속 직선 길을 걸어야 한다.
그 길을 계속 가다가 좌측으로 크게 완만하게 굽어서 한참을 걷다가 옥계 쪽으로 급하게 우측으로 길이 바뀐다. 망상해수욕장에서 여기까지 주변에 마을이나 아무런 건물도 없이 도로를 따라 걷는 지루한 길이다.
옥계 한국 여성수련원 솔밭에 도착하면 35코스가 끝난다.
한국 여성수련원 앞 소나무
솔밭에서 시작되는 다음 코스는 처음부터 솔밭이라서 앞으로 해변을 따라 솔밭이 계속 이어질 것 같은 기분이다. 솔밭에는 특이하게 해송도 있지만 오래된 적송도 상당히 많았다.
기분 좋은 솔밭이 얼마 가지 않아 끝나고 다시 바다 위 해안 길이 나온다. 여기에 해안 길은 해안 도로와 같이 걷는 길이다. 차들이 옆으로 다니니까 위험하기도 하지만 아스팔트 길을 걷는 것이 다리에 무리가 있다. 오늘도 무릎이 아프다가 어느 순간에 아프지 않은 느낌이 들면서 오른쪽 어깨가 아프기 시작한다. 몸은 어느 한 곳이 아프면 덜 아픈 곳은 아픈 생각이 안 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해안에 파도가 높아서 해안 도로로 파도가 쳐 바닷물이 자주 올라온다. 길은 바다 쪽으로 걷기 때문에 치는 파도를 신경 안 쓰면 바닷물을 뒤집어쓸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파도치는 것을 구경하면서 가는 재미도 상당하다.
한참을 가다가 보니까 차들이 전혀 오지 않고 나 혼자만 해변 도로 걷고 있는 것이다. 금진항을 한참이나 지났는데 차뿐만 아니라 사람도 전혀 다니지 않는다. 큰 도로를 나 혼자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날씨가 많이 풀려서 걷기도 좋고 파도 소리 외에는 조용한 길을 혼자서 걸었다.
차와 사람이 오지 않은 이유를 심곡항에 가서 알았다. 파도가 도로로 넘어오기 때문에 도로를 차단을 한 것이다. 금진항에서 심곡항 사이의 도로가 심한 파도로 차단이 되었지만, 내가 금진항을 지나오고 차단된 것이다. 그러니 차와 사람이 다니지 못했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온 것이다.
심곡항에서 다시 산길로 해파랑길이 나 있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산으로 올라 갈려니까 힘이 든다. 오늘도 마지막에 힘든 산행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걷다가 보니까 적응이 되고 산길도 바닷길과 다른 색다른 맛이 있다.
체력이 거의 소진될 무렵에 정동진항을 지나서 정동진에 도착했다. 오후가 늦었지만 연인들과 친구들끼리 즐겁게 웃고 놀고 있다. 젊은 연인끼리 정답게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보는 진지한 얼굴에서 청춘의 아름다움이 보이고 보기 좋은 모습이다. 그런 모습에 이제 나보다 내 자식들이 이런 곳에서 저렇게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여기서 오늘은 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