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역에서 왼쪽으로 가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36코스는 시작부터 정동진 앞산을 가파르게 오르면서 시작된다. 오르막이 심한 산이라 처음에는 추위를 느꼈지만 곧 땀이 나서 춥지는 않다.
이른 아침에 배낭을 메고 산에 오르면 수 십 년 전에는 수상한 사람으로 신고될 수 있었다. 내 차림이나 행색이 수상하게 보일뿐더러 이른 아침에 강원도 바닷가의 산에 오르면 충분히 이상하게 볼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시작부터 등산을 하니까 힘이 들고 이른 아침에 무엇하려고 이 고생을 하는지 자신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어느 정도 오르니까 등선을 타고 가는 산길이 나온다. 그런데 이 산의 소나무는 적송도 아니고 외래종인 리기다소나무나 해송도 아니다. 야산에 자라는 굽은 소나무 종류이다. 모친이 살아계실 때 산에 땔감을 하러 가시면 자주 해오던 “꼬질랑 소나무”이다. 모친이 이 소나무를 “꼬질랑 소나무”라고 불렀다. 이 소나무는 돋게 자라지 않고 키도 작고 옆으로 굽어서 자란다. 그래서 분제로 많이 키우는 소나무이고, 모친이 이 소나무를 좋아하게 된 것은 이 소나무가 생솔가지를 아궁이에 넣어도 잘 타기 때문이다. 솔가지에 송진이 많아서 불에 잘 타는 것이다. 겨울이면 모친이 이 꼬질랑 나무를 해 와서 군불을 넣어 뜨뜻하게 지내던 시절이 생각나다.
이 산을 계속 가면서 보니까 산의 흙이 검은색이다. 석탄 지역이라서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소나무들은 잘 자라고 있다.
산은 비슷하지만 오르막이 너무 많다. 이 오르막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가보면 또 오르막이 나오고 내리막이 나오면 곧 오르막이 있었다. 산이 그렇게 악산은 아니지만 오르막이 너무 많아서 왼쪽 무릎이 시리다. 왼쪽 무릎이 며칠 전부터 시린 것이 오늘은 오르막을 몇 번 오르니까 또 시리기 시작했다. 두 시간을 등산을 했는데 아직 안인항은 4Km 이상 남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산중에 성황당이 나온다. 지금 날씨 춥고 을씨년스러운데 성황당을 나오니까 날씨 분위기와 어울린다. 지금 이 산중에 걷는 사람도 나 혼자뿐이다. 무릎은 시리지만 더 빠르게 성황당 옆을 지나갔다.
또 한참을 가니까 안인항이 2.9Km 이정표가 보인다. 그 이정표를 지나서 오르막을 몇 개나 넘어서 거의 다 도착했다는 생각이 들 때 다시 이정표가 보였다. 1 Km 이내로 적혀 있을 것을 예상했다. 적힌 거리는 1.9Km이다. 정말 실망을 했다. 그렇게 많이 왔는데 아직도 이렇게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더 힘이 들고 다리에 힘이 빠진다. 그렇게 실망을 하고 힘없이 걷는데 다시 이정표가 나왔다. 이번에는 0.6Km로 적혀있다. 이번에는 별로 걷지 않았는데 1.3 Km를 온 것이다.
이렇게 등산을 한 시간이 3시간 반이나 한 것이다. 오늘 처음 시작부터 산악훈련을 한 기분이다. 그렇게 도착하고 싶었던 안인항은 아주 작은 항구이다.
안인항
해파랑길을 걸을 때 길 표식을 항상 찾으면서 걷는다. 표식이 보이지 않으면 길을 잘 못 가고 있는 것이다. 이 표식을 오랫동안 찾다 보니까 나름의 요령이 생긴다.
멀리 보는 것이다. 가까이 가서 찾거나 보지 말고, 눈을 돌리지 않고도 똑바로 멀리 보면 리본이 펄럭이거나 붉은 화살표가 보인다. 이렇게 멀리 보는 습관을 들이면 그냥 계속 걸으면서 큰 움직임이 없이도 찾을 수가 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멀리 보는 습관을 들이고 멀리 보면서 살면, 여유가 있어 보이고 사는 것이 수월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안인항에서 출발한 37코스는 처음에는 논둑길로 해파랑길 표식이 안내하고 있다. 논둑길을 따라서 가다가 다리를 건너고 다시 동네 옆을 지나다가 다리를 건너고 다시 논둑길 가기를 반복했다. 이 길은 왔다 갔다 해도 군선천을 중심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강동초교 쪽으로 좌측으로 돌아서 강동초교 옆을 지나 정감이 마을로 올라갔다.
정감이 마을에서 다시 산길이다. 오늘은 산길을 가는 날이다. 정감이 마을에서 시작된 산길은 큰 오르막 고개를 3개를 넘어서 끝난다. 무려 2시간을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걸은 것이다. 이 산길은 오르막이 있었지만 길은 좋았고 나무도 오래된 해송과 육송이 섞어서 잘 가꾸어진 산길이었다.
동막 저수지가 보이는 곳에서 내려와 다시 논둑길을 걸었다.
논둑 길이 끝나고 마을 사잇길로 들어가면서 잘 생긴 소나무를 보았다. 마음이 쉬어 가는 곳이라는 표지석이 마음에 든다.
이 주변에는 잘생긴 큰 소나무가 간간이 집이나 밭둑에 있었다. 이 37코스를 마치는 곳인 오독 떼기 전수관에도 멋진 소나무가 서 있다.
오독떼기 전수관 앞 소나무
걷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은 길이니까 지루하다. 오직 해가 저물어야 오늘을 쉬고 또 내일 걸을 것이다. 계속 걸어야 하니까 걷는 동안은 오직 걷는 데만 열중해 본다. 그렇게 걷는 것이 가장 편했다. 걸을 때 걷는 데만 열중하는 것 외에 달리할 것도 없다. 그러면 걷는 것이 끝이 날 때가 올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하든 그것을 하면서 사는 데만 열중하면 되는 것이다. 오직 사는 데만 열중하다 보면 이 또한 끝이 오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거 외에는 달리할 일이 없고 가장 편하게 사는 것이다.
구정면에서 출발한 38코스는 강릉 시내로 들어가는 코스이다. 평범한 거리를 지나다가 갑자기 정현 저수지가 나오면서 다시 소나무들이 많아지고 집들은 간간이 있다. 성불사 옆을 지날 때는 완전히 산속으로 가는 길이다. 다시 집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가 오르막이 있는 산길을 들어간다. 여기도 산길을 한 시간 이상 걸었다.
오늘은 온종일 산길을 걸은 것이다. 도심이지만 마지막에 산길에서 오르막을 오를 때는 마음을 비웠다. 산길은 고행이었다. 고행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생각 없이 걸어 올랐다. 산길이 고행이지만, 골병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이렇게 많이 산 길을 걷다가 논둑길을 걷고 도로를 걸으면 골병이 들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이제 몸이 회복하는 속도는 느린데, 마음은 아직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무리하기 때문이다. 다시 산에서 내려와 도로를 걷다가 중앙동 부근에서 어깨도 아프고 다리가 지쳐서 숙소를 찾았다.
해파랑길도 이제 5일 후에는 고성 통일전망대에 도착할 것 같다.
이 길을 마치고 다시 어디로 갈 것인지는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다.
불현듯 미국의 작가가 쓴 “노란 손수건”이라는 단편소설이 생각난다. 감옥에서 자기 고향을 지나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고향마을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이 하나 걸려 있으면 고향역에서 내리고, 없으면 고향에 내리지 않고 계속 기차를 타고 갈 생각이었다. 물론 여러 사연과 곡절이 있었던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고향이 다가오자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이 하나가 아니고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는 소설이다. 많이 걸려 있는 것은 혹시 하나를 걸어 놓으면 놓치고 지나칠까 봐 그랬을 것이다.
나도 그런 사연은 아니지만, 고성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런 생각은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는 것 중에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