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춥다.
길을 걸으면서 오늘보다 더 추운 날도 많았지만, 오늘이 유독 추운 것은 마음이 춥기 때문이다. 오늘까지 열심히 걸었지만 얻은 것은 별로인 것 같은데, 아픈 곳은 늘어났다. 이제는 어깨도 아프고 무릎이 아프다. 그렇게 많이 걸어서 몸무게도 많이 축이 나야 하는데, 아직 출발할 때와 비슷하다. 걸으면서 식당을 못 만나 거른 적도 있었지만, 그 대신에 다른 것을 많이 먹었다는 것이다. 얻은 것도 없이 몸만 힘들게 하고 끝날 것 같은 기분이다.
오늘도 걷는다. 이제 걷는 것이 습관적이다.
온종일 눈만 내놓고 장갑을 낀 채로 손은 주머니에 넣고, 앞만 보면서 보폭은 일정하게, 발바닥은 조심스럽게, 무릎은 너무 굽히지 않고 온종일 말없이 걸었다. 산길이 주문진 가기 전에 잠깐 있었지만 나머지는 해안 길과 도심의 길이었다.
강릉 시내에서 시작해서 지루하고 지겨울 정도로 시내 건물과 어떨 때는 농촌 풍경에 가까운 길을 걸었다. 시내를 걷는 동안은 오직 표식만 찾는데, 신경을 쓰면서 걷다가 보니 별생각 없이 걸었다.
바다가 보이는 남향진에 도착하니까 강릉이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남향진에서 다리를 건너서 안목 커피 거리에 오니까 보이는 것은 끝없는 모래사장과 해송이다.
안목 커피 거리는 오늘이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건물마다 손님들이 다 차 있고, 해안에도 사람들이 북적인다. 해송들이 너무 잘 가꾸어져 있다. 이런 해송이 있어서 강릉 해수욕장이 유명하고 사람들은 불러들이는 것이다.
해송이 안목에서 시작해서 경포해수욕장까지 긴 거리에 잘 조성되어 있고 그 해송 사이로 해안 도로가 있어서 차로 가면 해송 숲을 달리는 것이다. 경포해수욕장을 지나도 해송은 계속 이어져 있었고, 건물이나 도로로 인하여 없는 구간도 있지만, 동해안은 가능한 곳은 모두 해송으로 방풍림을 만든 것 같다.
해송 길만으로도 해수욕장이 없어도 관광객이 찾을 것이지만, 여기에 바다와 해수욕장이 있으니까 더 좋은 관광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바닷가 해변은 공간만 있으면 관광객을 불러 모우는 시설이 들어서 있다.
송정해수욕장 앞의 모래도 일품이지만 이곳은 해송이 가장 많은 곳이라서 여름에는 해수욕보다 해송 숲을 걷는 것이 더 시원할 것 같다.
송정해수욕장 해변
강문해수욕장에서 경포해수욕장으로 건너가는 강문 솟대다리가 멋있게 놓여 있다.
해수욕장들이 강문해수욕장 그리고 경포해수욕장으로 구분해 놓았지만 실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해수욕장이라고 보면 되고 경포대 해수욕장이 대표적인 이름이다.
경포대 해수욕장
경포대를 돌아보니까 경치도 좋고 걷기도 좋은 길이지만, 지루해서 간간이 자전거 타고 경포 호수를 도는 사람을 보면 자전거를 타고 싶은 마음이다.
경포대 해변을 지나면 해송이 없는 해안 길도 걷고, 다리도 건너고, 차도와 같이 가다 보면 사천진 항이 나온다. 이 항구는 제법 큰 항구이지만 주변에 물회를 하는 집이 모여 있는 곳이다. 입구에 사천 물회 마을이라고 쓰여 있고, 유명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물회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사천진항
경포대 해수욕장 끝자락에 약간 넓은 테크 길 위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젊은 여자아이 두 명이 춤을 추고 있었다.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은 내가 지나가는 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춤을 춘다. 앞에는 춤추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되도록 스마트폰을 거치해 놓고 추고 있었다. 잘 추거나 연습한 춤도 아니고 거의 막춤인데 열심히 하는 모습을 한동안 쳐다보면서 요즈음 세대들은 저렇게 확실히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같다.
아마 저렇게 만든 동영상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거나 아니면 본인들이 추억으로 간직할 것이다. 정말 열심히 사는 모습이라고 생각이라는 생각을 했지, 잘 추지도 못하는 춤을 추는 꼴이 부끄러운 짓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도 그동안 걸으면서 무엇을 하든지 부지런히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깨달은 것 같다.
강릉 시내를 지날 때는 춥기만 했지만, 해변에 나오니까 바닷바람이 너무 불어서 기온보다 바람이 체감적으로 더 추웠다. 바람결이 차갑고 눈까지 시릴 정도인데, 이 바람을 안목해수욕장부터 사천진항까지 계속 맞바람으로 맞으면서 걸어갔다. 바람이 뒤에서 불어오면 걷기도 좋지만 앞에서 계속 불어오니까 오늘 걷는 것이 다른 날보다 더 힘들다. 이렇게 추운 날 걸으면서 엉뚱한 생각도 해 본다. 그 옛날 독립운동하러 만주로 떠난 애국지사들은 추운 겨울에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넘어갔을 것이다. 그때도 북풍이 어마 무시하게 불었을 것이고 옷도 내가 지금 입은 것보다 방한이 안 된 옷이었을 것이다. 추운 날씨에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가족까지 데려간 분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분들은 큰 명분이 있어서 찬바람을 맞고 걸었지만 나는 무슨 명분을 찾으러 걷는지 궁금하다. 그래도 나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걷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하기 위해서 걷는 것이라는 명분을 붙여 본다.
점심을 먹고 사천진항을 떠나면서 보니까 사천의 작은 해수욕장에 관광객이 많고 사진도 많이 찍고 있다. 해안에 있는 돌이 모래사장은 얼마 되지 않지만 사람을 불러 모우는 것이다.
다시 해변을 따라 걷다가 해송이 있으면 해송 사이로 걸어가면 연곡해수욕장이 나온다.
연곡해수욕장을 지나서 영진교를 넘어갈 때 바닷바람이 너무 추웠다. 영진교가 길기도 길었고 바다에서 바람이 막아주는 곳도 없이 곧바로 내 얼굴에 오는 바람이다. 영진교를 넘어서 해송과 적송이 잘 가꾸어진 작은 산으로 올라가니까 바람을 막아주는 것이 있으니까 춥지 않았다.
다시 주문진 보이는 해안 길에 들어오니까 차들도 많이 다니고, 사람들도 일요일 오후라서 많았다. 주문진 해변에는 유명한 드라마 촬영지가 있어서 그곳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는 시설 좋은 대형 카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는 사람들이 모두 해안 도로 갓길에 차를 주차하고서 사진을 찍거나 카페에 들어간 것이다. 차가 사람이 다니는 갓길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걷기가 힘들다.
걸으면서 자주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끝까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심지어 놀더라고 노는 것을 열심히 놀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열심히 해야 보람도 있고 행복이 오는 것이 인간의 삶인 것 같다. 물론 인간으로서 추한 모습을 보이거나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품위는 유지해야 한다.
지금까지 걸으면서 아픈 것만 생긴 것은 아니고 살아가는 지혜를 느낄 때도 있었고, 세상을 사는 것이 만만치 않아서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도 느꼈다. 그래도 이제 걷는 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이라도 많이 생각하고 마음을 정리하고 싶다.
오늘은 증조모님의 기일이다.
오늘 묵는 곳에서 과일과 포를 준비해서 술 한 잔을 올릴 생각이다. 나에게 가장 잘해 준 할머니이다. 나를 위해서 정성을 다한 사람이 이 할머니보다 더한 사람은 없었다. 이런 분을 나는 잊으면 안 된다. 사람이 자기가 입은 덕을 잊으면 안 되지만, 내가 베푼 덕을 기억해서 보상이나 대접을 받을 생각을 하면 마음의 상처를 입기 쉽다. 자기가 베푼 것은 잊어야 한다.
며칠 전은 할머니 기일이었는데, 옛말에 없는 사람 제사 다가온다는 말이 있다. 제사를 모시기에 준비할 여력이 부족한데, 꼭 돈 쓸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나도 걷는 중에 기일이 두 번이나 찾아와서 객지에서 모신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다음에 나를 기억하는 자식이 없어도 상관이 없지만, 내가 사는 동안은 내가 기억하는 조상의 기일은 꼭 챙길 것이다.
오늘은 주문진에 증조모를 기리고 하룻밤을 유숙할 것이다.
주문진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