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포항에서 일어나 준비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출발을 했다. 아침 식사는 주로 바나나 우유 아니면 컵 누룽지에 물을 부어서 자주 먹었다.
아침에 걷는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지만, 아직도 쌀쌀한 날씨이다.
봉포항과 아야진항 중간쯤에 천간정이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천간정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청간정에서 보려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 날씨가 추워서 주변 펜션에 놀러 온 사람들은 아마 아직 방안에 있을 것이다.
천간정은 바닷가 기암절벽 위 노송 사이에 위치하면서 동해의 파도가 바위와 부딪치고 갈매기가 날아오를 때 일출이 멋있다고 한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지만 소실과 중수를 여러 번 했다고 한다. 도로에서 멀지 않았고 천간정까지 그렇게 가파르지도 않았다. 올라가서 떠 있는 해를 바라보니 눈이 부신다.
천간정을 내려와서 해안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아야진항에서 문암항까지 보통의 동해 어촌마을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촌에도 이제는 젊은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고 뱃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주로 외국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문암마을에서 고성 문암 유적지라는 표지판이 있어서 기대를 하고 갔는데 그냥 발굴하지 않은 벌판이었다. 조금 지나서 있는 백도 마을 앞의 바위섬은 정말로 흰색을 띠는 돌섬이다.
오늘 아침에는 날씨가 영하의 날씨이지만 바람이 불지 않았다. 지금까지 날씨도 추웠지만 바람이 불어 걷는데 더 힘이 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하던 날씨가 이제 끝나갈 무렵에 자비를 베푸는 것인지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내일까지 춥다가 모래부터는 풀린다고 하는데, 내일이면 걷기가 마치는 날이다. 내가 걷기를 끝내니까 추위도 끝나는 것 같다. 혹독한 추위가 세상의 인심을 말하는지, 나에게 무슨 의미를 느끼게 하려고 그렇게 추웠다고 생각하고 싶다.
삼포 해변에서부터 시작한 47코스는 오호항 옆의 서낭 바위는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고 신기하게 생겼다. 송지호 해변을 지나면 송지호가 나온다. 송지호는 두 개의 호수가 붙어서 그렇게 크지 않지만 정감이 가고 특히 소나무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이곳의 소나무는 적송이었다.
호수가 끝나갈 지점에 다시 송지호 산소길이 나온다. 소나무 사이로 조성된 길은 맑은 공기와 조용해서 걷기는 그만이다. 날씨는 차지만 이 길에서 오랜만에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공기를 드려 마셨다. 소나무 사이로 계속 갈 것 같던 길에서 갑자기 초가집이 보이고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을이 나온다. 조용하고 아늑한 시골 마을의 풍경은 추운 날씨에도 바람이 불지 않으니까 봄이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마을은 가만히 보니까 전봇대가 없었다. 만일에 전봇대가 마을에 몇 개라고 있었으면 이런 느낌을 못 느꼈을 것이다. 또 초가지붕은 민속촌에 가면 나일론으로 만든 가짜 볏짚이 아니라 진짜 볏짚으로 만든 것이다. 자연스럽게 잘 조성된 국가 민속문화재 고성 왕곡마을이다.
다시 시끄러운 도로 길을 따라 공현진항과 여러 마을을 거쳐 가진항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았지만 없었다. 이런 경우는 버스 정류장이 있으면 준비한 간단한 것으로 해결하는 데, 오늘은 정류장도 없다. 부득이 양지바른 해송 밑에 앉아서 점심을 먹고 다리를 풀어주고 다시 걸었다.
걸으면서 힘들다는 생각은 했지만 끝난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고 걸었다. 그런데 이틀 후에 끝난다는 생각이 드니까 힘들었던 생각보다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난 것이다. 700Km 이상을 걸어온 것이다.
걷는 동안에 힘이 들고 추워서 어려웠지만 그래도 끝이 다가온 것이다. 무엇이든지, 아무리 어려워도 끝이 있는 것이다. 걸으면서 또 하나 얻은 것은 끝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끝이 있는 길을 가면서 너무 서두르지 말고 여유 있게 가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가진항에서 출발한 48코스는 직선도로를 걸어왔다. 걷는 길이 거의 자전거 종주 길과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북천이 나올 때까지 거의 도로와 같이 걷고 걷는 길이다. 차가 다니는 도로 옆을 걸으면 소음이 너무 심한 것이 힘들게 한다.
북천에 와서 다리를 건너서 해변길로 갔다가 다시 농로가 가고 다시 해안 길로 갔다가 마지막에는 도로 옆으로 난 자전거길을 따라서 걷는다.
해변길을 걸으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마지막 즈음에 한없이 눈물이 나 펑펑 울면서 걸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길은 순례자의 길이니까 종교적으로 뉘우침이나 참회의 눈물일 수도 있고, 걸으면서 어떤 느낌을 받아서 그렇게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런 눈물은 의미가 있고 본인에게 감동과 산티아고의 먼 길을 걸으면서 힘들게 걸어온 보람을 주는 눈물일 것이다.
나는 아직 그런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진지해진다.
나는 살아오면서 진실한 나로 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살지 못한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찬바람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눈물이 나온다. 용서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그런 용기 갖기를 간절히 원한다.
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 나의 모습은 내가 살고자 하는 진실한 나 자신이어야 한다.
거진항 전에 있는 반암 해변은 그렇게 크지 않은 해변이지만 반암마을은 민박집이 너무 많았다. 지금은 아마도 간판만 있고 손님은 받지 않을 것이다. 겨울에는 난방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여름에만 한다는 민박이 많았다. 그런데 여름에 사람들이 많이 온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해파랑길을 걸으면서 느낀 것은 해안에 경관이 좋다고 생각되는 곳은 펜션이나 호텔, 커피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도 짓고 있는 곳도 너무 많았다. 사람들은 바다를 좋아하는 것 같다.
거진항이 멀리 보인다. 거진항이 다가오는 해변 길을 걷다가 보니까 파도가 친 바닷가 바위에 늦은 오후이지만 아직 얼음이 있다. 오늘도 무척 추운 날이다.
오늘은 거진항에서 보내고 내일 마지막 두 코스를 걸으면 해파랑길의 도착지인 통일전망대이다.
멀리 보이는 거진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