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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요 Feb 19. 2018

기형도의 裸體(나체)를 만나다

기형도 –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의 시집을 읽은 것인지 사집(私集)을 읽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의 삶을 들춰 본 기분이 들어 왠지 모르게 시집을 덮을 때 시인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시집에 부록으로 실린 문학비평가 김현의 말에 의하면 기형도의 시집이 '가난과 이별'이라는 자기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다. 시집을 읽는 내내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암울함은 그의 삶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난과 이별이라는 소재는 어떻게 보면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진부하고 보편적인 소재일 수 있다. 그러나 기형도의 언어로 노래된 가난과 이별은 진부하지도, 그저 세상에 대한 하소연으로만 들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모두의 것인 그것들이 나만의 것처럼 느껴지며 가슴을 두드렸다. 좋은 구절에 형광펜으로 표시를 해두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형광펜을 칠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가난은 사람을 궁핍하게 만들었지만 적어도 기형도의 시만큼은 오히려 풍족하게 했던 것 같다. 시집을 읽는 동안 나는 많은 한자와 생소한 단어들로 인하여 시 읽기를 멈칫거린 적이 있다. 자주 쓰는 단어가 아니기에 의미를 하나하나 찾아보았는데, 나에게 익숙하지 않았을 뿐 그 시어는 그 시의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시어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시어의 재산에 감탄하느라 가난을 말하고 있는 그의 시가 전혀 가난하지 않게 느껴졌다. 기형도의 시는 마치 김장독에 담아두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꺼낸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누가 훔쳐갈까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그 시절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하나씩 시어를 골라낸 것처럼 기억이 알맞게 익어 있었다. 나는 이렇게 적어낼 수 있는 능력이 당장의 일을 적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감각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의 시적 감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의 내가 언젠가의 나에 인해 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정말 황홀한 일이 아닌가?

  그의 시집에 나타난 이별이 온전한 이별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내 기준에서 이별이란 모름지기 사랑이 선행되거나 어떠한 관계가 형성된 이후에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사랑은 없고 이별만 있다. 그의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치열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랑한 그녀(혹은 그)에 대해서 그 대상이 어떤 사람이었다거나 얼마나 사랑했다거나 하는 내용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기형도는 사랑했던 대상을 그저 사랑했던 것 같다. 마음에 품었을 것이고 오랜 시간을 지켜봤을 것이며 사랑을 시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설렘과 경이로움으로 그의 '빈 집'을 가득 채웠을 것이다. 사랑을 할 때 보통의 나는 설렘에 눈이 멀어 마음을 가득 채우기 바쁘다. 조금이라도 새어나가는 것이 아까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채워 넣는다. (물론 시간이 지나서 보면 비슷한 옷만 여러 개이고 정작 입을 옷은 없는 옷장처럼 의미 없는 채움이었던 적이 많지만) 그런데 기형도의 시 속에서 그는 사랑을 체념하고 스스로의 집을 걸어 잠그기까지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사실 그의 집에 한 번이라도 사랑하는 대상을 들여놓은 적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그의 내면에 늘 '사랑' 그 자체가 존재했기에 정작 '대상'이 될만한 누군가를 들일 수 있는 준비는 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의 시집을 10년쯤 지나서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10년 후에 읽었을 때도 다시 10년 후를 기약할지도 모르겠다. 전자는 시를 썼을 당시 기형도의 나이가 되었을 때 시집을 다시 읽으면 그를 조금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고, 후자는 기형도의 젊은 날이 내 생애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확신 때문이다. 나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숨 막히는 가난을 경험했고, 사랑했던 많은 것들과의 이별을 해왔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가난과 사랑 속에서 스스로 나름의 정의를 내리며 살아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내가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 혹은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도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한 채 사라진 경험들이 기형도의 시집을 통해 적잖은 자극을 받았음이 분명한 것 같다. 



  그의 시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으로 ‘聖誕木’이라는 시의 아래 구절을 꼽고 싶다.  


그래, 고향에 가고 싶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지만

사과나무는 나를 사로잡았어

그 옆에 은박지 같은 예배당이 있었지

틀린 기억이어도 좋아    


  어쩌면 이 한 구절이 내가 기형도의 시집을 읽고 느낀 감정의 전반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이란 어떤 것이며 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 감히 논하기는 어렵지만, 틀린 기억이어도 좋으니 어린 시절 처음 깨쳤던 감정과 순간순간의 사소한 발견들을 돌이켜 본다면 시를 쓰는 데 있어서 좋은 목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고백은 부끄럽고 발가벗은 것이었지만 기형도의 고백은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을 위해 나의 한 겹을 어떻게 벗겨내야 좋을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기형도를 만나서 한편으로는 우울하기도 했고, 창피함도 느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함을 느끼며 시집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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