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 이 時代의 사랑, 즐거운 日記
때로는 사람의 이름이나 창작물의 제목만 듣고도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는 최승자 시인의 처녀 시집, <이 時代의 사랑>이 그러했다. 시인에게는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처음 시집의 제목을 듣고 나서 시인의 자신감과 당당함에 적잖이 놀랐다. ‘사랑’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진부함과 두려움을 끊임없이 극복해야한다는 과제를 처음부터 안고 시작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나의 사랑’, ‘그의 사랑’도 아닌 이 시대의 사랑을 제목으로 내걸다니! ‘내가 제일 시 잘 써!’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파격적으로 느껴졌다. 웬만한 자신감을 갖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 아니겠는가? 제목만 듣고도 이 시집의 주인이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덕분에 최승자 시인이 말하는 ‘이 시대의 사랑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답변을 찾고 말겠다는 작은 목표를 세우고 시집을 열 수 있었다.
이름에서 느껴졌던 당당함은 틀린 예감이 아니었다. 역시나 그녀는 보통의 시인이 아니었다. 시집을 덮을 때까지 나는 이 시대의 사랑을 끝내 만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시대의 사랑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열심히 사랑을 찾으려 했지만 번번이 바람맞은 꼴이 되었다. 물론 ‘이 시대의 사랑은 OOO입니다.’라는 친절한 정의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랑’을 제목으로 달고 나온 시집에 의례히 기대하기 마련인 낭만주의 향기 정도는 풍겨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내 예상은 한 페이지를 차마 넘기지 못했다. ‘개 같은 가을’을 외쳐대기 시작하던 최승자는 마치 ‘아름다운 시어’라는 말의 뺨이라도 칠 기세로 ‘사랑’시집에 감히 욕설을 싣기 시작했다. 그녀의 살기어린 시어의 폭격에 급기야 시집의 제목에 대한 배신감까지 들었다. ‘이런 제목을 내걸고 시집을 내려면 좀 더 아름다운 내용을 써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려던 찰나에 최승자의 섬뜩한 시어들이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시집을 열었을 때 나는 왜 이 시집이 <이 時代의 사랑>일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이 時代의 사랑>이 주는 충격의 여파에서 가시기도 전에 그녀의 두 번째 시집 <즐거운 日記>로 충격을 이어갔다. <즐거운 日記>는 ‘사랑’을 전면에 내보인 이전의 시집보다 오히려 사랑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보다 관념적인 영역인 탄생과 죽음을 담고 있었다. 첫 시집에서 최승자 개인이 가지고 있었던 ‘사랑’이 집단적으로 발현되며 시대의 사랑을 노래했다면 두 번째 시집에서는 사랑으로 인한 고통의 내면의 깊이가 한층 더 깊어졌다. 사랑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 역시 보다 성숙했고 동시에 자극적이었다. 최승자가 말하는 이 시대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확실하게 굳혀가는 과정처럼 보였다. 그녀의 시는 ‘사랑’을 소재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아프다’거나 ‘심장이 찢어질 것 같다’는 등의 감정적인 표현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추상적인 개념인 ‘사랑’을 시의 소재로 이용하면서 도리어 더 이상 물리적일 수 없는 신체의 일부를 시어로 선정했다. 그녀의 시에는 팔과 다리, 눈과 무릎 등의 신체 국소 부위가 자주 드러난다. 이렇듯 특정 부위에서 느껴지는 비정상성과 고통은 정상적인 것들과 대비되며 전체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 오히려 더 큰 통증으로 전해졌다. 그녀는 신체를 꺾고 부러뜨리며 훼손시키는 것으로 이 시대의 사랑을 말하기도 한다. 정신적인 고통의 묘사 없이 나타나는 신체의 훼손을 통해 정신에서 오는 고통은 얼마나 더 큰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어떻게 보면 사랑의 과정에서 느끼는 내적인 고통은 물리적·신체적 통증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개념이어야 한다. 이러한 개념으로 볼 때 최승자의 시어들을 단지 마음의 고통을 모사(摹寫)하는 거짓 통증에 불과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 時代의 사랑>을 통해 발현된 모순과 거짓으로 만들어진 시대 속에서 어쩌면 이렇듯 꺾인 사랑이야말로 평범하고 당연한 형태일지 모른다. 시대와 사랑의 어두운 단면을 보고 난 후에 마주치는 물리적 고통은 우리의 거짓됨을 가장 진실한 모습으로 돌아보게 했다.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것마저 겉으로 드러내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아파하는 사랑의 진짜 모습을 최승자가 보여준 것이다.
어느 순간 최승자의 시집 밖으로 나온 나는 시체가 되었고 시집 안에 갇힌 내 팔과 다리만이 생명으로 춤추는 꼴이 되었다. 꺾인 팔은 시 안에서, 그리고 치유할 수 없는 시대 속에서 더 자유롭고 더 사랑스러워 보인다. 이것이 최승자가 말하려던 이 시대가 품고 있는 사랑이 아니었을까? 끝으로 시집<즐거운 日記>에서 대적(對敵)의 한 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이윽고 아득하게 코피가 터져 흐르고
타오를 듯 푸르른 이 세계의 공포 속으로
내가 내려서기 시작한다.
안개의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며
마침내 나는 그를 너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이 시에서 최승자 시인이 나와 함께, 시대와 함께 바라보고 싶었던 ‘사랑’의 의미를 단적으로 느꼈다. ‘그’가 ‘너’가 되는 순간, 이 순간에 최승자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이 되고 우리의 사랑은 이 시대의 사랑과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아름다운 사랑도 내 사랑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최승자 시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쓴 ‘시대’의 일기장에서 나 역시 '내 사랑'을 엿보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