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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요 Jul 20. 2018

천국을 마주하는 우리의 자세

이영광 – 아픈 천국





  <아픈 천국>이라는 시집의 제목을 처음 보고 나는 오랜만에 심장에서 씨앗 하나가 움트는 것을 느꼈다. 문학을 문학시간으로 치환하고 싶지는 않지만 학창시절에 배운 몇 안 되는 문학적 지식에 의탁하기 위해 잠시 문학시간을 떠올렸다. 당시 유치환 시인의 <깃발>이 주었던 역설의 충격과 공포는 아직도 문학 과목에 대한 나의 기억을 대표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소리 없는 아우성’만큼이나 충격적인 역설을 이영광 시인을 통해 마주하게 된 것이다. 심장에서 움텄던 씨앗이 빠르게 가지를 뻗어나갈 만큼 나의 맥박은 충분히 뛰기 시작했다. 제목에서 느낀 충격은 시집을 읽는 내내 손끝과 발끝으로 고스란히 이어지며 자라났다.


   ‘천국’이라는 숭고한 단어를 시어로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은 종교적인 신비나 환상을 표현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깊게 엿볼 수 있었다. 시집에 등장하는 다소 과격하고 직설적인 시어에 시 읽기를 주춤하기도 했다. 1부에 실린 ‘무소속’이라는 시가 그러했다. 지배적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이미지 아래 정치나 사회 풍자 등의 인간의 삶이 반영된 현실세계가 눈에 들어왔다. 이 시에서 시인은 우리의 삶을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치인의 이미지와 결합시키며 종교적 차원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관념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신화적 속성의 종교색채를 현실로 끌어온 것이다. <아픈 천국>이라는 시집의 제목에서 보였던 충격적인 역설의 기법들은 시 곳곳에서 이따금씩 등장하며 사회 풍자의 기풍을 이어받았다. 그의 시가 ‘죽음’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타의 죽음을 소재로 다룬 시와 다르게 어둡거나 슬프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시어의 담담함이라는 형태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 풍자라는 내용적 측면이 곁들여진 시는 ‘죽음’을 사뭇 유쾌한 행위라고까지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초연한 태도로 시를 마주하는 우리를 볼 때 비로소 죽음은 한층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시인이 생각하는 ‘천국’은 어떤 곳이었을까? 이 시집에서 ‘천국’은 단지 사후세계와 현세를 연결하는 통로의 차원에서 머무는 것 같지 않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믿음으로 일관된 참된 신자가 죽은 이후에 영원의 축복을 누리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영광 시인의 시 안에서 ‘천국’의 의미는 조금 더 확장된 듯하다. ‘죽음’을 겪어야만 이룰 수 있는 차원이 아닌 현세의 굳건한 믿음으로 만들어지는 장소처럼 느껴진다. 그의 시 안에서 천국은 솔직하다. 결코 없을 것 같던 아픔도 고통도 모두 존재하는 곳이다. 어쩌면 우리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천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치유될 수 없는 슬픔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마치 현실세계에서도 외면당하는 고통과 아픔이 있듯이 천국에도 그러한 아픔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쩌면 아픔이 있는 천국을 인정하고 마주할 때 진정한 천국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 우리가 그렇게도 꿈꾸던 천국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죽음과 삶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과정의 일부로서 삶이 존재하는 듯하다.


   아픔을 외면한다고 해서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정하고 견뎌내면 다시 마주할 아픔에 조금 더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법이다. 이영광 시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천국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에서 천국은 절대적인 행복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안락함을 주는 장소가 아닌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익숙함과 편안함을 제공하는 것 같다. 이미 죽음을 경험한 이의 증언을 들어볼 수는 없지만 살아있을 때의 겪었던 아픔과 고통이 죽었다고 해서 어찌 한순간에 씻은 듯이 나으랴. 


   시집의 말미에 적힌 시인의 말에서 이영광 시인은 ‘뭔가를 믿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잊지 않은 광신도처럼’ 살고 있다고 자신을 묘사하였다. 마치 무엇인가를 믿을 때 그 가치에 무게를 두기보다 단지 믿음 자체를 믿으며 살아가는 목적이 전치된 우리의 모습을 꼬집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믿음이 깨질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어한다. 그래서 때로는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외면하기도 한다. 그러나 맹목적인 믿음에 가려 수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를 보지 못하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천국은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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