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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요 Jul 25. 2018

부재의 존재

김경주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시집을 펼치자마자 두 쪽에 걸쳐 작성된 ‘시인의 말’이 먼저 눈을 사로잡았다. 시집을 내는 시인의 마음이 꼭 자식을 낳는 어미의 고통과도 흡사하다고 하지 않는가. 김경주 시인이 첫 시집을 펴낼 때 역시 그러했던 것 같다. 어디에서나 처음은 더 신경이 쓰이는 법이다. 편하게 할 수 있는 것들도 괜히 '처음'이라고 의미부여를 하고 나면 낯섦과 두려움은 배가된다. 김경주의 첫 아이는 꽤나 애를 많이 먹이며 태어난 모양이다. 2006년에 작성된 첫 번째 ‘시인의 말’에 그가 얼마나 난산을 했는지 그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김경주 시인은 시가 ‘현기증’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그깟 현기증쯤이야 라고 가볍게 여길 수도 있을 테지만 시인에게 현기증은 자신을 흔들고, 정신을 흔들고, 이내 시를 흔드는 것이다. 시가 현기증이라는 것은 시 때문에 시를 쓸 수 없게 하는 고통의 경지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는 이 시집을 낳으면서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의 시집이 한마디로 경이롭게 ‘탄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양쪽에 실린 두 개의 ‘시인의 말’은 6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서로 다른 해에 쓰인 것이다. 그는 ‘시인의 말’을 다시 적으면서 이전의 것과는 다르게 마치 수필처럼 자신이 겪은 일화를 소개하였다. 출산의 고통을 나름대로 심오하게 묘사한 이전과 다르게 한층 가볍고 즐겁게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했다. 그러나 어쩐지 이전의 ‘시인의 말’ 못지않게 시에 대한 애정이 한껏 담겨 있음이 느껴진다. 시를 본격적으로 열기도 전에 시에 대한 시인의 애정에 사로잡혀 나는 앞으로 마주할 시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시인의 말에 한참을 머물렀다. 시집을 다 읽고 보니 김경주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이미 이 시집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전달해 놓은 듯하다. 시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도 전에 구태여 ‘시인의 말’에 이렇게 무게를 실어 이야기하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인의 말’처럼 그의 시는 출발부터 ‘다름’을 보여준다. 




  김경주의 시집은 한 마디로 경계가 모호해진 양극단 같았다. 분명 양극과 음극의 서로 반대된 성질을 지닌 것들이지만 신기하게도 그들이 하나의 조화를 이루며 시를 형성해나간다. 시집의 처음을 장식한 ‘외계(外界)’에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바깥 세계와 태초의 내가 존재했던 자궁의 이미지가 등장하며 안과 밖이라는 양극단이 혼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양팔이 없이 태어난 화가는 외부의 세계에 존재하는 바람을 그리고 그 그림은 결국 태초의 자신의 몸을 그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두 존재가 김경주 시인의 시 안에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외부세계와 내면의 연결은 ‘우주로 날아가는 방’ 연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주’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확장되며, 광범위한 외부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우주는 방 혹은 창문 등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내가 살고 있는 가깝고도 현실적인 내부 공간을 상기시킨다. 다가갈 수 없이 멀게만 느껴지던 우주라는 막연한 공간이 마치 내 방안에 존재하는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을 준다. 두 공간 사이의 범접할 수 없는 거리 차이는 시간과 관념의 초월로 이어진다. 태초의 탄생과 지금의 ‘나’라는 존재가 주는 괴리감, 삶과 죽음의 숙명적인 순환 등이 종교나 영혼과 결부되며 그려진다.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그 존재들이 조화를 이루며 김경주의 시 안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휘파람 소리’, ‘고등어 울음소리’등의 청각적 이미지도 부조화의 조화를 말하는 김경주 시인의 목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사실 시라는 것은 늘 조용히 존재하기 마련이다. 누군가 소리 내서 낭독하지 않는 이상 시가 직접 나서 목소리는 내는 일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김경주 시인은 보란 듯이 육성 없는 시 곳곳에 소리를 담았다. 다소 어색하고 불편할 수 있는 조용한 글자에 의도적으로 소리를 담아 그 소리를 상상하게 하고, 소리 내어 읽게 한다. 마치 화합될 수 없는 양극이 펼치는 작은 반항처럼 느껴진다.

 

  김경주의 시는 낭만적이다. 그러나 결국 그 낭만을 파괴하며 완성으로 거듭난다. 시집의 포문을 여는 두 개의 ‘시인의 말’부터가 그러하다. 그들은 마치 시집 안의 시와 연결고리를 이루는 것처럼 양극단에서 시집을 대표하고 있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라는 시집의 제목처럼 김경주 시인은 계절이라는 초월적인 자연현상에 ‘나’라는 내면의 존재를 투영시키고 있다. 그러나 ‘없는 계절’로 표상되며 결국은 부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고백한다. 나는 그가 말한 '부재'가 영원한 사라짐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자연현상 중에 그가 굳이 순환의 속성을 지닌 ‘계절’이라는 현상을 자신의 시로 삼은 것은 사라짐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 '없는 계절'은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를 계절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 역시 이 세상에 '있는 계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불안과 고통을 숨기며 살고, 신념과 확신이 부재한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는 '살아있다고, 존재하다고' 당당히 말해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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