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덥지 못한 법과 쓸모 있는 주먹
지난주 몬테네그로 공항에서 ‘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핵심 인물인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와 그 측근이 체포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위조여권을 사용한 혐의로 몬테네그로 당국이 권 씨를 기소한 데 이어 한국과 미국, 싱가포르 등이 그의 송환을 위해 경쟁을 할 것이라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에 대한 댓글의 반응이 흥미롭다. 물론 기사를 읽는 이들 중 일부만이 댓글을 남긴다는 점에서 전체의 의견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상당수가 권도형의 미국 송환을 기원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그가 엄벌을 받기 원하는 마음이 깔려 있을 것이다. 그간의 경험상 한국보다는 미국에서 경제범죄에 대해 무거운 형량을 선고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과 미국의 법 체계가 다르고 중형에 대한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항변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의 고통을 충분히 구제하지 않는 판결을 우리는 이미 수없이 지켜봐 오지 않았던가.
최근 두 번째 파트가 공개된 넷플릭스의 <더 글로리>나 두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 SBS의 <모범택시2>의 인기는 우리 사회의 저변에 깔린 사적제재에 대한 욕망을 시각화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제공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사과조차 받지 못한 학교폭력 피해자가 18년간의 준비 끝에 복수를 마무리한다는 내용과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서 가벼운 처벌만 받거나 요리조리 피해 가는 범죄자들에게 대신 복수한다는 내용은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사적제재가 과연 정당한가, 개인의 처벌이 법 위에 있는가 등의 논의는 잠시 접어두자. 문제는 우리 사회가 왜 그토록 사적제재를 갈망하고 이에 열광하는가에 있다.
‘나이가 어리고 별다른 범죄 전력이 없다. 범죄를 반성하고 있다’
‘어린 시절 정서적·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냈고, (중략) 혼인을 하여 부양할 가족이 생겼다’
어딘지 익숙한가? 세계 최대의 아동성착취물 사이트를 운영하던 손정우가 겨우 1년 6개월형을 받은 것에 대한 이유다. 심지어 1심에서 집행유예가 나온 것을 2심에서 원심이 너무 가볍다며 형을 늘린 것이 징역 1년 6개월인 것이다. 손 씨의 사이트에서 영상을 다운로드한 미국인들이 현지에서 10년 이상의 중형을 받은 것을 보면 여론이 분노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따라서 한국 법원이 손정우에 대한 미국의 범죄인 인도요청을 기각하고 추가 수사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때 사람들은 더욱 회의적인 태도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수사를 제대로 해도 과연 손 씨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사례를 더 보자.
<더 글로리> 현실판으로 여겨지는 정순신 변호사 아들 학교폭력 사건에서 우리는 누구보다도 법을 잘 아는 정 변호사가 법을 이용해 소송을 거듭함으로써 피해자에게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었던 것을 확인했다. 또 당시 고등학생에 불과한 아들이 고위검사였던 아버지에 대해 자랑하며 “검사라는 직업은 다 뇌물을 받고 하는 직업이다, 내 아빠는 아는 사람이 많은데, 아는 사람이 많으면 다 좋은 일이 일어난다, 판사랑 친하면 재판에서 무조건 승소한다” 등의 발언을 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법조인으로서 자식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보여줬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공적제재인 사법제도가 내리는 처벌이 종종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것.
법이 그것을 잘 아는 기득권층에게 지나치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사회가 사적제재를 꿈꾸는 이유일 것이다.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는 처벌의 수위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법이 공적제재로서의 권위를 가지려면 피해자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초범이라는 것은 단지 여태껏 걸리지 않은 것뿐일 수도 있다. 법정에서 하는 사과는 면피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반성문은 판사에게 내야 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에게 내야 하는 것이다. 만에 하나 정말 반성을 한다면 그것을 빌미로 선처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엄벌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 맞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이유로 관용을 베푸는 것은 법이 아니라 피해자의 재량이어야 한다.
법이 계속해서 그것을 이용하는 자들에게는 무기가 되고, 그 반대편에는 상처를 입히는 흉기가 되어 돌아온다면 사람들은 사법제도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무서운 일이다.
그렇다면 사적제재가 난무하는 사회는 정의로운가. ‘복수의 여정을 떠나기 전에 두 개의 무덤을 파라’는 공자의 말을 기억하자. 복수란 자기 자신을 걸지 않고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겨우 완성됐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폭력의 고리를 만들어낼 뿐이다. <더 글로리>의 문동은이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18년이 필요했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빛나는 시절을 그녀는 웃음도 잃은 채 기계처럼 살아야 했다. 따라서 가해자들에게 앙갚음은 했어도 그 대가는 자신의 18년이라는 시간인 것이다.
공적제재는 단순히 범죄자를 처벌하는 데 역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피해자에게, 또 그 판결을 지켜볼 다수의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국가는 여러분의 피해에 깊이 공감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해자를 엄벌에 처하고, 피해 구제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누구보다 국가를 믿고 싶은 것은 국민이다.
나는 꿈꾼다.
아무도 사적제재를 꿈꾸지 않는 사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