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증명_을 읽고 [최진영]
나는 SF 장르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영화, 책, 드라마 중에서도 SF는 몰입이 힘들고 크게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여섯 살 때 ‘원더키디’라는 SF만화가 티브이에서 방영했었다. 특유의 회색빛과 음울한 세계관이 무척 무섭고 쓸쓸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구의 증명, 이 책 역시 팟캐스트를 통해 알게 되지만, 요즘 내 독서 생활은 알바 K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K가 직원 L에게 이 책을 빌려줬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자 나도 호기심이 생겼다. 언젠가 함께 글을 쓰는 친구에게 이 소설을 추천받아 펼쳐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내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람의 몸을 먹는 설정을 접하고는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손끝의 거스러미조차 입에 넣기 힘든데, 하물며 죽은 연인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먹는 장면이라니. 너무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덮어놓고 ‘이건 환상 소설이겠지’라고 지레 짐작하며, ‘이 책은 어렵다’고 마음을 결정하고 일찌감치 읽기를 포기했었다.
그럼에도 왜, 나는 다시 이 책을 펼쳤을까?
나는 함께 일하는 L과 K의 감상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둘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K가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싶은 그 마음이 어디서 비롯된 건지, 또는 나도 그 감정 안에 속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아쉽게도 직원 L은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다고 했다. 왜 그만뒀는지 물었지만, 뚜렷한 답을 듣지는 못했다.
다시 펼친 ‘구의 증명’. ‘구’와 ‘담’이라는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이미 소설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음을 다잡았다. “먹던지 죽이던지, 어차피 소설이니까.”
TTS를 켜놓고 귀와 눈으로 동시에 따라 읽었다. 눈으로 읽기는 여전히 버거웠지만, 귀를 동원하자 훅 빠져들었다. 잠자기 전에 잠시 읽으려던 계획은 무너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한 시가 되어 있었다. 아이패드를 덮으며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그날 이후 나는 담이 구를 조금씩 뜯어먹듯 밤마다 이 책을 조금씩 꾸준히 읽었고 그 주 휴무에는 끝까지 읽었다. (구와 담은 어떻게 서로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하나가 되어 서로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 둘을 둘러싼 시련은 당사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담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 볼 수 있는 이유 였을 것이다)
나는 가끔 정서적 결핍과 물질적 결핍 중, 어떤 것이 더 힘들까 하고 생각하곤 한다. 대체로 사는 게 좀 버겁게 느껴질 때, 월 말마다 통장 잔고가 바닥 일 때 위로하는 방식으로 저울질한다. 나는 아직 삶의 한계를 가를 만큼 극심한 결핍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외로움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하지만 구처럼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결핍은 외로움보다 훨씬 깊고 무서운 것임을, 견줄 수도 없을 정도로 삶을 흔드는 것임을 안다. 적당한 외로움이나 적당한 결핍이 아니라, 극단적인 외로움과 결핍을 겪은 이들의 사랑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구를 둘러싼 세계에 분노했다. 그리고 끝없는 외로움에 사무칠 담은 어쩐지 내 마음 한 구석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살아낼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처연하게 느껴졌다. 희망이라고는 품기 힘든 삶을 사는 구, 처절한 외로움 속에 살아내는 담과 사랑을 구걸하는 진주의 마음 마저도 모두 내 안에 있는 감정 중 하나였기에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K와 나눌 이야기가 기대된다. 슬프겠지. 슬픈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각자 타인을 알아가겠지.
사람대접받겠다고 평생을 싸우느니 그냥 이쯤에서 청설모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 <구의 증명>, 최진영 지음 - 밀리의 서재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것들이 빠져나왔대. 근데 거기 희망은 왜 있었을까. 희망은 왜 나쁜 것을 모아두는 그 항아리 안에 있었을까.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이 말을 왜 해주고 싶었냐면, 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 <구의 증명>, 최진영 지음 - 밀리의 서재
근데 걔들 사귀는 거 보면 좀 유치해. 자전거가 이번에는 왼쪽으로 휘청 쏠렸다. 넘어지려는 자전거 핸들을 구가 잡았다. 그래서 너는 누구랑 유치해지고 싶은데? 구가 놀리듯 물었다. 노마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나한테 친절하면 좋겠어. - <구의 증명>, 최진영 지음 - 밀리의 서재
담은 나와 달랐다. 평온한 들판에 산책이라도 나온 듯 나를 만나는 것 같았다.
그 점이 서운하기도 다행스럽기도 했다. - <구의 증명>, 최진영 지음 - 밀리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