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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림 Jun 29. 2021

기록하는 삶을 시작합니다.

0. 준공 축사

“기록을 해보면 어때?”


내가 겪은 경험에 대한 감상이나 떠오르는 생각이 그저 휘발되어 나에게 남는 것이 없는 것 같아 불안하다는 고민을 친구한테 털어놓았더니 이런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우문현답. 나는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는 모든 것들을 기억할 수 있는 대용량 기억 저장 장치도 아니고, 그것들을 필요할 때마다 즉각적으로 꺼낼 수 있는 탐색 능력을 가진 기계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걸 머릿속으로만 하려고 했을까.


사실 답은 분명하다. 그저 귀찮았던 것이다. 그리고 번거로웠다. 기록을 하려면 도구가 필요하다. 펜과 노트가 되었든, 핸드폰과 손가락이 되었든, 혹은 휴대용 블루투스 키보드가 되었든 소지품이 언제나 구비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 물리적인 문제와 더불어 실제로 기록하는 행위는 꽤나 소실률이 높기도 하다. 우리의 손은 뇌의 회전 속도보다 훨씬 느리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생각의 갈래를 뻗어나가면서도 지난 생각을 되감으며 더듬더듬 추적해나가야 하고, 그러다 보면 이내 날아가버리는 생각의 끈을 놓치기 십상이지 않던가. 또 다른 이유를 솔직히 고백하자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그저 속기사처럼 써 내려가는 것도 껄끄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적어둔 무언가는 적어도 나의 기억보다는 오래 혹은 더 많이 살아남았다.



그렇게나 남겨야  것이 많은가,  순간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쉬운 사람인가, 생각해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다만 즐거웠던, 독특했던, 생각이 많아졌던 순간들이 나의 기억  어딘가에 스며들어 현재의 나를 구성하고 있을 텐데  자취를 남겨두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시간은 되돌릴  없고, 모든 만남과 경험은 일기일회. 기억은 색이 바랜다. 생각은 마모된다. 감정은 무뎌진다.


그저 적어두기만 하면 될까? 먹기 전에 찍어두고는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는 음식 사진처럼, 기록도 방치되면 아무 소용이 없을 테지. 그렇게 한참을 ‘기록으로 정리된 삶’에 대해 진심으로 원하는 바를 고민하자 머릿속을 하나의 거대한 도서관으로 만들고 싶다는 목표에 도달했다. 내가 가진 생각들을 개별적인 책의 형태로 엮어두고, 비슷한 것들끼리 모아 두고, 필요할 때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도서관. 그러려면 우선 책이 많이 있어야 하고, 그 책들을 잘 분류해야 하고, 필요한 책을 쏙쏙 뽑아 읽으며 생각하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야 한다. 필요하면 머릿속 도서관의 건물 자체를 건축해야 할 수도 있고, 외관을 멋대로 꾸밀 수도 어쩌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변할 수도 있겠지. 아, 재밌겠다! 이 머릿속 도서관을 후세에 온전히 넘겨줄 수도 없겠지만 적어도 남들에게 소개하고 구경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이 매거진에서는 앞으로 개별적인 책들을 엮는 과정을 차근차근 공개할 예정이다.




돌이켜보면 생각과 감정을 가장 생생하게 담아내는 기록은 언제나 일기였다. 새해가 되면 다이어리를 사서 올해엔 잘해보자고 다짐하고는 이내 시들해진 것이 벌써  년째 더라. 이 매거진에는 되도록이면 일기를 쓰는 마음으로 적어보려고 한다. 그야 애초에 내가 하는 생각과 경험한 것들에 대해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일기처럼 즉각적이진 않다. 때로는   과거의 일을 불러오기도  것이다. 방학 숙제로 쓰다 밀린 일기도 그랬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일기를 꽤나 열심히 쓴 덕분에 본가의 책장 한 칸은 어린날의 일기장으로 가득 차있다. 가끔 (당시에는 담임 선생님이 일기를 검사했으니까) 선생님이 한 마디씩 남겨주시는 코멘트가 재미있었다. 중학생 시절에는 좋은 기회로 매주 책을 한 권씩 읽고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환경과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쓰는 글을 유독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내 도서관은 제법 성황리에 책도 엮고 가끔은 외부인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고등학생일 때는 수험생의 본분에 충실했다(아마도). 대학생이 된 후로는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하며 나를 파악해갔다. 아직도 꽤나 미지의 영역이지만 자신의 기호, 성격, 가치관을 개척하며 탐구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성향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 하며 세계를 넓힐 수도 있었다. 직장인이 된 지금은 세상과 사람에 이리저리 치이기도 하며 또 다른 생각들을 한다.

층층이 쌓인 시간들은 사실 어딘가에서 나의 생각과 판단과 행동의 자양분이 되고 있을 것이다. 다시 땅을 밟아가며 여기저기 흩뿌려진 책의 기초자료들을 모아 먼지를 털어 제본하려고 한다. 이미 삭아서 못 쓰게 된 것도 있을 터이고 영영 찾아내지 못한 페이지들도 있겠지. 한동안 가동을 중단했던 인쇄기와 제본기에 기름칠을 하며 삐걱삐걱 돌려봐야겠다.




그러니까 이 준공 축사는 나의 인생에서 숱하게 날려버린 단편들에 대한 참회록이자 앞으로 쌓일 서의 서문이다.

 (일기처럼 가볍고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을 쓰겠다는 다짐과는 달리 다소 비장하게 써보았다. 한 사람의 삶은 다른 누구도 대신 써줄 수 없는 한 권의 책이라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과한 언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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