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너는?
"게이트 43번까지 가서 둘러봤는데 아무리 찾아도 손님이 안 보입니다."
비행기 출발 6분 전, 숨이 찬 직원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들려왔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다. 손님을 더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비행기 문을 닫고 정시에 출발시킬 것인지.
“손님 off load 하겠습니다.” 나는 무전기에 대고 짧게 답했다.
비행기가 제시간에 출발하는 것이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은 수많은 절차와 사람들의 호흡이 정확히 맞아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 항공사처럼 도착 후 60분 만에 다시 출발해야 하는 ‘턴어라운드’ 비행기는 특히 그렇다. 그래서 회사 매뉴얼에는 1분 단위로 쪼개진 TO DO LIST가 있고, 지연이 발생하면 그 리스트를 다시 분 단위로 검토해야 한다. 출발 6분 전까지는 무조건 문을 닫아야 정시 출발을 할 수 있다.
그날 off load 된 승객은 10세 미만 아이 1명을 포함한 세 가족이었다. 사실 off load 된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은 여로모로 불편하다. 보통 인천공항까지 오려면 아침 일찍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공항에 도착하면 체크인부터 시작해서 비행기를 타는 게이트까지 오기까지 매 순간 지루한 기다림의 연속이다. 손님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기다림의 미학을 견뎌 이제 비행기 탈 일만 남았는데 게이트 앞에 도착했더니 비행기가 이미 가고 없다고 하면 정말 황당하고 난감할 것이다. 그 허탈한 얼굴을 보는 것이 직원입장에서도 절대 좋을 리 없다. 거기에 더해 불같이 화를 내는 손님도 종종 있으니 긴장감까지 감돈다.
10분이 지나자 저 멀리 3명이 게이트로 걸어온다. 바로, offload 된 승객이다.
비행기표를 내밀며 다가오는 승객을 향해 죄송하지만 너무 늦게 오셔서 비행기 탑승을 하실 수 없다고 전달했다.
그 순간 아빠로 보이는 승객이
" 아 c, 18 장난하냐, 당장 문 열어. 문 열라고!!"
라며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소리를 질렀다. 게이트 주변에 있던 모든 승객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고요했던 내 마음에 이렇게 갑자기 또 벼락이 친다. 그 벼락을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승객을 응대하는 것은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다. 왜냐면 전혀 괜찮지 않기 때문이다.
그 뒤로 그 승객은 온갖 욕을 다 해가며 폭삭 속았어요의 학씨를 몸 소 시전했다. 모든 말 시작과 끝에 학!씨8이 라임처럼 따라붙었다.
그때 내 눈에 그 학씨의 딸과 아내가 들어왔다. 분노로 날뛰는 아빠와 남편을 무표정으로 보고 있는 딸과 엄마의 얼굴이 너무 똑같이 닮아 있었고, 그 무표정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의 평온함은 상당한 내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서 나오는 절망감이었다. 학씨의 말도 안 되는 저 분노와 폭력성이 저들에게는 일상인게 그대로 전해졌다.
지금 이 상황이 드라마라면 모든 카메라 포커스는 이 장면의 주인공인 학씨에게 맞춰질 것이다. 학씨가 욕을 할 때는 입을 줌인해서 튀기는 침까지 하나하나 다 잡아낼 것이고, 그의 분노를 극대화하기 위해 씨뻘겋에 충혈된 눈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 카메라가 딸과 아내를 잡는다면 이 드라마는 완전히 다른 장면을 담아낼 것이다. 표정하나 없는 얼굴에 빛을 잃은 눈동자, 그리고 절망에 가까운 무기력함이 담길 것이다.
나는 그 드라마의 단역에 지나지 않아, 그 드라마에 다시 나올일은 없지만, 학씨와 앞으로 드라마를 계속 찍어야 하는 그 어린딸이, 학씨모다 더 오래 내 마음에 남았다. 아빠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전부가 아니고, 앞으로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 찍을, 찬란하게 아름다운 드라마가 네 앞에 펼쳐져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설레임으로 가득차야할 가족여행이 순식간에 공포물로 변한것에 대해 그 어린승객에게 미안함을 전하고 싶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중에 최고를 선물로 주었다. 예약변경 수수료가 있는 티켓이었지만 가장 빠른 다음 비행기로 예약변경을 무료로 해줬고, 보통이라면 돈을 내고 구매해야하는 자리가 넓은 자리도 그 가족에게 무료로 지정해 주었다. 다음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말에 엄마와 딸이 그제서야 환하게 웃었고, 나도 함께 웃었다.
학씨는 비행기에 타는 순간까지도 "연봉 1억 밑인 사람은 나랑 말도 하지 마라!" 라는 두고두고 회자될 명대사를 남겼다.
그 말 덕분에 우리 직원 모두 학씨와 아무말도 하지 않...았.. 아니 못했다. 내 연봉이 1억이 안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