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찌질한 사람이다. 될 수 있으면 사람들에게 나의 멋진 부분만 보여주고 싶고 솔직함이란 가면 뒤에 내가 가진 찌질한 것들은 다 숨기고 싶은 그런 사람이다.
이런 나의 이야기라도 괜찮다고 말해준다면..
마음속 깊이 간직한 나의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다.
내가 살았던 곳은 고등학교 수가 적어 고등 입학고사의 문턱이 높았다. 딱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던 나는 내가 살던 시내권의 고등학교에 떨어졌고 대신 시골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 학교에 다님으로써 나는 공부 못하는 학생, 시내권 고등학교에 가지 못한 낙오자가 되어 버렸다.
다 알지는 못했지만 나를 보는 사람들이 그리고 나를 알던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3년 간 그런 기분을 느끼며 지낸 것 같다. 그래서 더욱 대학만큼은 잘 가고 싶었다. 그런데 뒤늦게 발동 걸려 공부한다 한들 그간의 공백을 다 매우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그때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어느덧 20살이 되었고, 수시 점수가 좋았던 나는 수시 2차전형으로 지역 국립대에 합격을 하게 되었다. 꿈도 없고 딱히 가고 싶은 학과도 없었던 나는 친언니의 '일단 국립대에 합격해'라는 말에 따라국립대에 지원을 했고 덜컥 합격을 하게 된 것이다.
일단 대학에 합격해서 좋긴 좋았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만큼은 내가 입학하게 될 대학교의 평판이 꽤 좋았기 때문이다. 어디 가서 든 공부 좀 했네 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꿀리지 않는 대학이었다. 또 농어촌지역 학생이라 1년간 장학금까지 받을 수 있게 되어 분명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나는 내 학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지원한 학과는 바로 농업경제학과인데 농대라는 이유로 또 무시를 당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친척들이 어디에 합격했냐고 물을 때면 더욱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나는 친척들이 어디 합격했냐고 물었을 때 농업이라는 단어는 빼고 '경제학과'라고만 말해주었다.
그런데 친척 언니 친구 중에 내가 다니는 대학의 경제학과에 다니는 친구가 있었나 보다. 친척 언니는 자기 사촌동생이 거기에 입학했다며 잘 부탁한다는 식으로 말까지 해놓은 상황, 그런데 나중에 명단에 내 이름이 없자 이름이 없다고 이상하다고 그렇게 이야기가 오갔던 모양이다. 이에 친척 언니는 나에게 "이름이 없다는데?" 라며 묻기 시작했고, 이에 나는 당황했지만 애써 모른 척 "왜 없대?" 이런 식으로 시치미를 뚝 땠다.
그러다 어느 날 일이 발생했다. 친척 언니네 집에서 놀다가 내 지갑을 놓고 돌아온 것이다. 바로 학생증이 들어있는 지갑을 말이다. 나는 다음날 서둘러 친척 언니네 집에 가서 지갑을 갖고 왔는데 이미 친척 언니는 내 지갑에 있는 경제학과가 아닌 농업경제학과라고 쓰여있는 학생증을 보고 난 후였다. 친척 언니는 나에게 화를 냈다. 왜 거짓말했냐고, 너 때문에 내가 뭐가 되냐고. 나는 그 말에 미안하다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어영부영했던 기억이 난다.
으 참 못났다. 지금 와서 되돌아봐도 왜 이렇게 어리석었는지. 그런 내가 참 부끄러우면서 또 한편으론 그렇게 말한 내가 안쓰럽게 느껴진다.
졸업 후 나는 라디오 리포터로 일했고 그 일을 시작으로 지역 방송국에서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일했다. 일을 할수록 열악한 근무환경과 조건에 회의감을 느껴 퇴사를 하고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아나운서 준비를 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아나운서 스터디를 시작했는데 그곳에서는 또 다른 학벌주의가 존재하고 있었다.
한 번은 스터디가 끝나고 인 서울대학을 졸업한 스터디원이 자기는 어느 지역에서 올라왔는데 지방대학에 다니기 싫어서 여기(서울권) 대학으로 왔다며, 이 말에 자기도 그렇다고 지방 대학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대화를 들은 것이다. 들을 수밖에 없는 게 스터디룸 한 공간에서 하는 이야기가 어떻게 안 들리겠나. 그런 대화 속에서 지방대학을 졸업한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또 어떤 날은 한 스터디원이 아는 오빠가 있다며 소개팅 자리가 있다는데 그 사람의 조건이 인 서울 4년제 대학이라는 말에 속으로 기겁을 한 적이 있었다. 외모나 키, 직업도 아닌 인 서울 4년 제라니. 물론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이런 게 서울 사람들 인가라는 생각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스터디를 하면서 나에게는 아나운서 합격이라는 목표 외에 한 가지가 더 생겼다. 바로 대학원 진학이었다.아나운서 준비생 중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간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그게 참 부러워 보였다.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꿈을 위해 도전하는 그녀들을 보고 있자면 생활고에 하루하루 허덕이는 나 자신이 더없이 초라해 보였다.
그럴 때마다신촌에서 스터디를 마치고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늘 '나도 언젠가는 신촌에 있는 대학원에 다녀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그러면서 캠퍼스를 누비는 상상을 했는데 그러면 꼭 나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외롭지 않았다.
5년 후, 그동안 나는 아나운서로 몇 번의 합격도 하고 퇴사도 하면서 결혼도 하게 되었다. 결혼 후에는 남편의 든든한 지지를 안고 그간의 방송 진행 경험을 살려 스피치 강사로 일했고, 조그맣게 아카데미도 운영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수익이 나오자 나는 잊고 있었던 대학원 생각이났다.
남편과 상의 끝에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고 신촌에 있는 대학원 두 곳에 지원했다. 결과는 두 곳다 합격이었다. 여러 가지 비교 끝에 Y대학의 대학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마침내꿈을 이루게 되어정말 기분이 좋았다. 신촌역 부근은 자주 다녔지만 Y대학 안의 캠퍼스를 걸어 다닌 것도 처음이었고, 이방인이라 느끼던 서울생활이 이제야 나도 소속감이 생겼다는 뭐 그런 감정도 들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바라다 바래버린 꿈이었을까.. 막상 다니고 보니 내가 놓친 부분이생각났다. 바로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대학원이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 5년 전의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지만.. 결혼도 했고, 하고 있는 일도 있는 지금의 나에게는 더 이상 대학원이 필요 없던 것이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나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 학기만 다니고 그만두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이제는 내 학교는커녕 내 이름조차 불일 일이 별로 없는 지금와서 주위를 보니 각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은 꼭 학벌이나 외모가 잘난 사람이 아니라 묵묵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제는 나도 내 졸업장보다 그것을 뛰어넘는실력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다. 더 이상 나 자신이 나 스스로를 학교 때문에 작아지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그리고 그 시절 뭐하나 잘난 것, 잘 되는 것 하나 없던 상황에서도 묵묵히 잘 버텨준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찌질해도 괜찮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