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롭게 질문하는 인간이 됩시다
대한민국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무언가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에 익숙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도 주입식 교육을 주로 하였고, 뭔가를 자꾸 물으면 버릇없거나, 이해도가 떨어지는 학생처럼 인식되기도 합니다. 저의 고등학생 시절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 입니다. 어떤 과목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데, 선생님께서 한참 설명을 하시는 중에 학급 친구 녀석이 도중에 불쑥 질문하였습니다. "왜요?". 선생님께선 그 친구를 노려보더니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왜요는 일본 담요지! 그냥 외워."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의 질문하는 방법도 조금 투박했지만 선생님의 답변도 그리 너그럽지는 않았다고 기억됩니다.
이러한 대한민국 공교육을 받고 학력고사를 치러 대학에 진학했던 저 역시 무언가를 질문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는데, 이런 저를 바꿀 수 있었던 기회가 다행히 저에게는 있었습니다. 저는 20년 정도의 시간 동안 소위 대한민국 20대 기업 내에 포함되는 회사를 다니면서 참으로 다양한 교육을 받아보았는데, 교육들 대부분은 당시에는 유용했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런 수많은 교육 중에 저의 회사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강의 하나가 강하게 기억에 남는데요. 진급을 한 후 기쁜 마음에 받았던 5일간의 진급자 교육 중 하나의 강의였는데, 그것은 바로 '물어보라!'라는 주제였었습니다. 영업사원이던, 연구원이던, 생산부서 직원이던, 스탭부서 직원이든 말이죠.
강의 중 강사님께서 예를 들어주신 내용은 이랬습니다. 어느 할머니가 A 과일가게에 가서 "레몬 있나요?"라고 물어보셨더랍니다. 하지만 레몬이 없었던 가게 주인은 "레몬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아무런 비즈니스가 일어날 수 없는 것이죠. 할머니는 그 옆의 B 과일 가게에 가서 다시 "레몬 있나요?"라고 물어보셨는데, 불행히도 이 가게에도 레몬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B 과일가게의 주인은 "지금은 레몬이 잘 안 나오는 계절인데 왜 레몬을 사려고 하세요?"라고 물었더랍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께서는 "며느리가 임신 중인데 신게 먹고 싶다고 해서요."라고 하셨답니다. B 과일 가게 주인은 "레몬은 없지만 신 과일 중에 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 싱싱한 바나나가 들어왔는데, 바나나가 다양한 영양분이 있어서 임신부에게 좋은 과일입니다."라고 하여 귤과 함께 바나나까지 판매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강의를 들으며 저는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났다면 제 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지는 못했을 텐데, 다행히도 이 강의 내용이 더욱 저의 뇌리에 박히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교육을 받고 나서 채 한 달이 안되어 해외출장을 갈 일이 생겼습니다. 저는 인천공항에서 출발할 때 면세점에서 와인을 한 병 사가지고 갑니다. 이슬람 문화권으로 출장 갈 때만 빼고요. 비행기 3등 칸에 마구 구겨진 채로 오랜 시간 동안 이동하고 나서 마침내 숙소에 도착하면, 몸은 피곤한데 시차나 여러 문제로 잠들기 어려울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 와인 한 모금 마시면 숙면을 취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해외 출장 패턴 같은 거죠. 하지만 와인을 드셔보신 분들은 모두 아시다시피 와인병은 대부분 코르크 마개로 입구가 막혀있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대의 일부 와인들만 금속제 스크루캡 형태의 마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것이 제게는 문제가 되었는데요. 숙박하는 숙소가 고급 호텔이라면 와인의 코르크 마게를 제거할 수 있는 소믈리에 나이프를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만, 출장 비용 결제로 회사의 눈치를 봐야 하는 말단 졸(卒) 직장인 신분으로 숙박하는 숙소에서, 더구나 늦은 저녁시간에 체크인 한 상황에서는 소믈리에 나이프를 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장 시 가져가야 할 짐이 많은 경우라면 차라리 집에서부터 소믈리에 나이프를 위탁수하물에 넣어서 가져갈 수 있습니다만, 짐이 많지 않고 신속한 이동을 위하여 핸드캐리 하는 경우라면 그마저도 불가능합니다. 소믈리에 나이프를 가지고 공항의 보안검사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저는 항공기 출발 전에 인천공항 면세점에 들러서 스크루캡으로 되어있는 와인을 한 병 구매하고는 하였습니다. 포도 품종, 가격, 생산 지역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뚜껑만 보고 와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날따라 매번 갔던 인천공항의 면세점들을 아무리 둘러봐도 스크루캡으로 된 와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점원 분들께 물어봐도 코르크 마게로 된 와인밖에 없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애매한 시간에 체크인하게 될 숙소에서 제발 소믈리에 나이프를 구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어쩔 수 없지만 코르크로 된 와인 중 적당한 가격대의 제품을 한 병 사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비행기 탑승 게이트 근처 조그만 주류 매장에 들어갔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다라는 생각으로 키도 크고 잘생긴 직원분께 스크루캡으로 되어있는 와인이 있냐고 물었지만 대답은 역시 '없다.'였습니다. 어깨가 축쳐저서 매장 바닥에 끌릴정도의 상태로 와인을 둘러보는 저에게, 잘생긴 점원 분이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물어보시더라구요.
"코르크로 밀봉처리 되어 있는 와인 중에 품질 좋고 합리적인 가격의 와인들이 훨씬 많은데, 꼭 스크루캡으로 밀봉된 와인을 찾으시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아~ 제가 출장지 숙소에 도착하면 자기 전에 와인 한잔 마셔야 잠이 잘 오는데요. 숙소에 늦게 체크인하게 되면 소믈리에 나이프를 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점원분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하시더군요.
"그런 이유라면 문제없습니다. 저희가 고객들에게 사은품으로 드리는 소믈리에 나이프가 있는데, 이것을 구매하시는 와인과 함께 드리겠습니다. 면세점에서 받은 소믈리에 나이프는 비행기에 가지고 탑승하실 수 있습니다. 출장지에서 잘 사용하시고, 호텔방에 두고 오시면 됩니다."
저는 무릎을 한번 탁 치고 나서 와인을 두 병 구매하였습니다. 그동안 제가 구매했던 거에 비하면 꽤 비싼 가격대의 레드와인 한 병, 화이트와인 한 병을 말이죠. 비용을 결제하다 보니, 얼마 전에 회사 교육에서 들었던 레몬 할머니 이야기가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더군요.
그 이후로 저는 회사 생활에서든 가정생활에서든 한번 더 질문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상사가 업무 지시를 받을 땐 일을 지시하는 상사의 속마음을 한 번 더 헤아려보려고 합니다. 고객으로부터 어떤 요청이 접수되면 왜 이런 요청을 하는지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요청하면 왜 이것이 필요한지 진심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물론 질문할 때 "왜요?"처럼 건방지게 들릴 수 있게 질문하지는 않고, 그 상황에 따라 최대한 부드럽게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질문을 잘한다는 게 생각처럼 간단하지는 않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꽤 오랜시간 동안 슬기롭게 질문하는 것을 노력하여 습관화 함으로써 회사에서는 '일하는 센스가 있다.'라는 평가를 받고, 어떤 일을 하는데 두세 번 할 거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으며, 생각이 깊고 배려심이 있는 사람 비스므리 하게 흉내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벌써 일상생활에 스며들기 시작한 생성형 AI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질문이 중요하다고 하죠? 질문을 잘하는 방법이 이래저래 앞으로는 더욱 중요해질 것 같은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