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결국 죽음을 맞을 존재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죽음을 가깝게 느끼며 사는 것은 아니다.
예측하지 못 한 사고나 큰 질병에 맞닥뜨릴 때야 비로소 우리는 죽음을 가까이 느끼게 된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상태, 더는 오감으로 세상을 지각할 수 없는 상태, 더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없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
그것이 죽음이다.
셸리 케이건은 예일 대학의 유명한 교수라고 한다.
책 제목을 보자니, 출판사에서 '~란 무엇인가'로 지어 판매에 꽤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자, 각설하고 이 책은 전혀 새롭지 않다.
결국 죽음은 오는 것이고 전혀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모든 것이 순환하는 커다란 질서 속에 있으니 죽음도 결국 생을 향한 선순환의 하나라는 것이 교수님의 주장이다.
저자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궁금증이 생긴다.
애초에 죽음과 사후를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교수님 말대로 하자면, 우리는 곧 언젠가 끝날 기계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사후와 영혼은 잊어버리고 죽음을 기다리며 삶을 살면 된다.
그리고 삶으로 말할 것 같으면 즐거움이 수반되는 생활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즐겁지 않은 삶이라면 그 죽음을 앞당겨도 되는 걸까?
셀리 교수님의 논리는 전혀 달갑지 않은데 영혼에 대한 물리적 증거가 없으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이다.
교수님, 영혼이 존재한다면 전혀 물리적이지 않은 것일 텐데 어떻게 물리적인 증거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교수님은 고집이 꽤 세어 보이는데, 영혼이 없어도 인간이란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그렇다.
그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의식'이라는 문제가 남지 않나.
우리의 육체가 어떤 방식을 통해 지각하고 의식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이성이 생겨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설명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육체가 진리라고 외치고 있다.
상상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해놓고선 영생을 꿈꾸는 사람을 비웃기도 하고, 영혼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플라톤의 영혼 불멸 사상을 전제로 하지 않음에도 그것을 주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다.
오히려 나는 우리가 죽음과 영혼, 사후세계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대로, 아닌 건 아닌 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될까?
어떤 영역에서는 여전히 논리적으로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순간이란, 결국 죽음을 맞은 순간이거나 죽음을 맞은 사람을 대하는 순간뿐 일 거다.
죽음을 맞는 순간, 우리는 영혼과 사후세계에 대하여 알 수도 있겠지만 말할 수 없다.
죽음을 맞은 사람을 대하면서도 역시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죽었고 이젠 육체의 기능이 다 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우리는 결국 죽는다는 것이다.
수많은 삶의 장면은 결국 단 하나의 종착점, 죽음을 향해 달리고 있다.
죽음으로 가기 위해 사는 삶. 그렇게 말해도 과하지 않다.
자, 생각해 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걸까?
우린 정말 그것들에 대하여 알고 말하는 것일까?
나에게 있어 삶은 가볍고 순간적인데 반해 하루는 길고 너무 무겁다.
그런 갑갑한 순간들을 난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내 삶은 살아지고 있을 뿐이다.
가벼운 깃털 같은 이 삶이 끝나면, 곧 마주할 죽음이란 얼굴이야말로 무겁고 무거울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녹취록>
이주희, 박영선, 임세례, 김예람
세 :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비교하면 이 책은 아주 철학 책다웠어요.
읽기에 힘에 부쳤어요. 정독보다는 발췌하면서 읽었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는 되었지만 작가의 주장에 동조는 못 하겠습니다.
주 : 죽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수준에 머물렀다는 건가요?
세 : 아직은 죽음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주 : 죽음은 항상 가까이 있는데요?
(웃음)
세 : 난 절대 죽지 않는다, 이런 느낌? 아직까지는요.
주 : 우리가 내일 눈을 못 뜰 수도 있잖아요?
세 : 어우 그러지 마요, 무서워요.
주 : 자, 예람 씨 갈까요?
예 : 전 책을 읽으면서 영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읽었어요.
귀신이나 이런 이야기들이 그냥 나온 것들은 아니지 않을까 싶어요.
이 책에서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따지니까 근거가 불충분한 부분에서 제 생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세상 모든 것들을 논리적으로 다 이끌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주 : 그럼, 이 저자가 죽음에 대해서 자기가 철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부분에 대하여 죽음이 과연 그렇게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에 대하여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는 건가요?
예 : 이성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야 맞겠지만 아직 죽음에 대해서는 과학적 접근이 어렵지 않을까요? 확실히 제 생각은 변한 것 같아요.
주 : 그럼 이전에는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었나요?
예 : 사후세계에 대해서 죽음 후에 영혼은 있을 수도 있겠다, 육체와 정신이 다를 거라는 믿음이 강했지만 이젠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주 : 이젠 죽음 후에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변한 건가요?
예 : 네, 그렇죠.
영 : 이 저자의 주장이 약간은 억지스럽기도 하다,라고 생각이 들긴 해요.
주 : 잠깐만요, 영선 씨. 그럼, 우리에게 이 책을 추천한 이유가 뭐예요?
(웃음)
영 : 사람들이 많이 읽어서요.
주 : 책 자체는 괜찮았어요. 전 영선 씨가 저번에 했던 ‘플라톤의 대화’의 복수로 이걸 골랐구나 했죠.
(웃음)
주 : 어떤 점에서 억지스러웠나요?
영 : 그러니까 음, 제가 아직 정리가 안 되어서요...
주 : 혹시, 이 책 다 읽고 온 건 나밖에 없는 건 아니죠?
(웃음)
주 : 괜찮아요. 두루뭉술해도 좋으니 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영 : 반대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드는데...
세 : 맞아, 나도 반론을 펴고 싶어. 그런데 이 작가처럼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가 없어.
(웃음)
영 : 맞아요, 언니.
(웃음)
주 : 그럼, 이 질문부터 해볼게요. 우리가 종교를 믿고 있는지.
종교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식이 아예 다르니까요.
세례 씨는 이름만 들어도 종교가 있을 것 같아.
세 : 네, 전 개신교예요. 전 신도 있고 사후세계도 있다고 믿어요.
다만,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에요.
주 : 제가 모임을 하며 영성신학에 심취한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주로 명상과 요가를 통해서 다른 세계 혹은 내면의 자아와 대화를 한다고 했어요. 그분에게 죽음이란 무어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죽음이란 완벽하게 나누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것 같아요.
영 : 친하셨...
주 :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은 분인데...
(웃음)
영 : 전 사후세계에 대해서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주 : 그러면 안 돼요.
세 : 주장을 들고 와야지.
영 : 아, 그러면 안 돼요?
(웃음)
주 : 영선 씨, 우리 잠깐 볼까?
(웃음)
주 : 조금 더 마음이 가는 쪽으로 와 봐요.
영 : 전 윤회는 있는 것 같아요.
주 : 아, 윤회를 믿는 거예요?
영 : 네.
주 : 윤회를 믿는다면 영혼이 있다고 믿는 거죠?
영 : 네.
예 : 전 제 직관으로는 영혼을 믿고 싶어요.
주 : 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이유는 내 안의 어떤 두려움이 사후세계가 있기를 바라게 하는 게 하고...
예 : 아.
주 : 제가 생각하기엔 시간은 직선으로만 달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윤회라기보단 제가 어떤 시간에 했던 행동들은 영원히 그 간격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제가 운명을 하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운명하는 그때는 영원히 운명만을 하고 있는 거죠.
세 : 음, 영원회귀네요.
주 : 그렇죠. 제가 이 저자에게 질문을 할 수 있다면 이 질문을 꼭 하고 싶어요.
논리적이고 물리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영혼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싶어 하세요, 이 분이.
그런 부분들이 애초에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영역이지 않나요? 하는 질문. 과학적인 영역이 되지 않는 부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해서 반발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죠.
예 : 아.
세 :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영역.
주 : 영선 씨가 이 책을 추천하면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내주셨어요.
영 : 저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알고 싶어서 질문했어요.
영혼, 인격, 육체 이 세 가지가 모여서 제가 되었다고 생각을 해요.
주 : 영혼, 인격, 육체.
영 : 네.
주 : 제 대답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웃음)
주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질문이 정말 어려워.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직책은 실장이고 업은 관세이고 타인에게는 동네 아저씨일 테고.
나를 가리키는 무수한 이름들이 있지만 딱 설명하기에 너무 어려워요.
세 : 그렇죠. 우리를 말하는 많은 이름들.
주 : 우리가 철학을 읽으면서 니체의 니힐리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잖아요.
니힐리즘의 허무함과 죽음은 어떤 면에서는 맞닿아 있지 않을까요?
세례 씨는 아직 죽음과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니에요.
세 : 그러지 마요.
(웃음)
주 :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여기 이렇게 모여서 토론을 벌여도 진리라는 것에 도달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저는 저를 설명하기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예 : 전 정말 모르겠어요.
영 : 전 그 세 가지라도 없으면 제가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요.
주 : 조금 더 설명해 줘요.
영 : 만약 어떤 사람의 인격이 바뀌면 우리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을 하잖아요.
바뀐다면 원래 알던 제가 더 이상 아니게 되는 거죠.
주 : 우리가 생각하기에 인격이란 영구불변한가요?
예 : 그렇진 않죠.
세 : 음, 변하죠.
주 : 그럼, 세월이 흐르면서 변한 인격만큼 5년 전의 영선 씨와 지금의 영선 씨는 다른 사람인가요?
영 : 아니죠. 같은 사람이죠.
주 : 인격이 변했잖아요.
영 : 전 인격이 아니라 성향이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주 : 네, 더 말씀해 주세요.
영 : 기계로 치면 겉이 똑같아도 속의 부품이 다르면 다른 제품이잖아요.
세 : 영선 씨의 말은 속성은 그대로라는 거죠?
예 : 유전자는 변하지 않는다?
세 : 여기서 말하는 인격에는 과거의 경험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전 자아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자기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다고 봐요.
주 : 과거의 경험이 포함된다는 건 인격은 바뀔 수 있다는 속성을 지녔다는 걸까요?
세 : 그렇죠. 바뀌지 않을 수도 있지만.
주 : 그럼, 자아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사람은 인격의 존재로 보기에 미달일까요?
세 : 그렇다기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기 힘든 사람이 되겠죠.
주 : 멋있다.
(웃음)
주 : 그럼, 사람의 자아정체성은 언제 확립이 될까요?
영 : 자신의 의지가 생길 때?
주 : 영선 씨가 갈수록 말씀을 잘하지 않아요?
우리 처음 모였을 때와 비교하면.
세 : 맞아요. 말을 잘해. 얼굴은 여전히 빨간데.
(웃음)
주 : 안면 홍조증은 나도 있었는데 금방 나아요. 괜찮아.
의지라고 하셨죠?
영 : 의지가 생길 때요.
주 : 사족이지만, 우리가 이 모임을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내가 나의 생각을 제대로 말하자’ 에요.
그런 사람이 된다면 삶에서 직장에서 더 나은 환경을 꿈꿀 수 있을 거예요.
조금 더 설명해 주세요.
영 : 음, 글쎄요.
세 : 청소년기에 절반 이상이 생성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살면서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가감이 되어 형성되지 않을까요?
주 : 정신분석학에서는 유아기 때 성격의 형성이 이루어진다고 해요.
세 : 프로이트?
주 : 네, 프로이트. 주로 성性적인 설명이라 지금에 와서는 사장된 부분도 많아요.
예 : 전 생각을 해보니, 그냥 난 인간이다,라고 설명을 해야겠어요.
호모 사피엔스다.
주 : 설명이 어려우니 역시 종種으로 밖에 설명이 안 되는 거죠.
예 : 네. 맞아요.
주 : 육체가 고장이 난 나는 여전히 내가 알던 나일까요?
시한부 인생의 나와 건강했던 나는 다르지 않을까요?
영 : 전 같은 나예요.
예 : 전 다른 나라고 봐요. 육체가 고장 났으니.
주 : 그럼 이런 예를 한 번 들어볼게요.
내가 영선 씨한테 20억을 빌려줬어. 그런데 영선 씨가 날 배신했네?
빚쟁이들한테 쫓기면서 영선 씨에 대한 원망과 미움만 가득 찼어.
지금 이렇게 영선 씨를 응원하는 나와 원망하는 나는 분명히 다르지 않을까요?
인격이 달라졌으니.
영 : 아니에요.
주 : 여전히 같은 나일까요?
영 : 네. 나의 역사가 이어져 온 거니까요.
주 : 아, 삶의 굴곡을 따라 지금의 내가 탄생했으니 여전히 나라는 거죠?
영 : 네.
세 : 급격히 변하지 않고 차츰차츰 변하는 인격의 특성상 내가 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주 : 어릴 적의 어떤 친구가 생각이 나요. 그 친구는 본래 말이 적고 내성적이었어요.
10년이 넘게 지나서 그 친구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친구들과 만나러 갔어요.
그런데 거기엔 내성적인 그 아니가 아니라 쾌활하고 잘 웃는 전혀 다른 사람이 있더라고요. 전 인격이 달라지면 그 사람의 자아도 변한다고 생각이 들어요.
정말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내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 : 그 친구는 꼭 저 같아요.
주 : 예람 씨도 내성적이었어요?
예 : 네. 그러다가 제가 영업부서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달라졌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직장을 가지기 전과 가진 후의 저는 확실히 다르네요.
주 : 정신병원의 환자도 그런 예가 될 거예요.
보호자가 보여주는 설명하는 남편의 모습은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병실에서 손톱을 물어뜯고 안절부절 못 하는 환자는 보호자가 말하는 남편의 모습은 아니죠.
육체와 인격의 변화로도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데 하물며 영혼이 변한다면 그건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닐까요.
이 작가는 영혼이 없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면 우리를 움직이는 건 뭘까요? 무엇이 우리를 여기로 이끌었을까요?
예 : 전 태생적인 기질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영혼이라기보단 어떤 세포와 육체의 작용으로 움직이는 거죠.
주 : 그럼, 생명활동의 일환이라는 거네요?
예 : 네.
주 : 그럼 예람 씨의 기호는 타고난 유전자에서 따른 것이고 활동과 생각은 생명 반응이네요?
예 : 네, 그렇죠.
주 : 예람 씨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해요. 문과적 인간만 있으면 안 돼.
(웃음)
예 : 저 공대 나왔어요. 산업공학과.
영 : 전 컴퓨터공학이요.
세 : 와 정말?
주 : 오, 다들 멋진데?
세 : 전 문과.
영혼이 없다고 하면 설명하기 어려워지는 부분들이 많아서.
주 : 우리의 기억은 어디서 관장할까요?
예 : 뇌요.
주 : 그렇죠. 해마가 기억을 담당하는데, 사실 뇌만이 기억을 하는 건 아니에요.
사고로 뇌의 70 퍼센트를 잃은 수학교사의 경우, 일상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해요.
기억도 잃어버리지 않았죠. 물론 특별한 경우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경우가 종종 있기에 연구를 하였고 그 결과로 나온 학설이 ‘세포 기억론‘이에요.
뇌뿐 아니라 세포들도 기억에 일조를 한다는 거죠.
영 : 세포도 기억을 한다?
주 : 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든 상식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이 다 가능하다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예요.
영혼이 있기에 우리는 사랑을 하고 아끼려고 하고 배려한다고 생각해요.
단지 생명활동이고 반응이라면 우린 사회적 교착상태에 있어야 해요. 사실 알고 보면 우린 30만 년 전부터 생존을 위해 경쟁하던 사이잖아요. 그 생명 반응만이 DNA에 새겨져서 우리의 활동을 조정한다면 우린 사랑하기 쉽지 않을 거예요. 희생을 해야 하는 이유가 사라지죠.
세 : 이기적 유전자?
주 : 네, 거기선 이타성도 유전자의 생존본능이라고 하지만.
우리 그럼 조금 쉬고 다시 할게요.
(쉬는 시간)
주 : 자살도 삶의 선택 중의 하나일까요?
영 : 본인이 살기 힘들다면요.
주 : 힘든 삶이라면?
예 : 기본적으로는 자살도 자의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는 게 힘들다고 죽는 건 옳지 않아요.
주 : 예람 씨의 말은 본인은 절대 자살을 인정하기 어렵지만 다른 사람의 선택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죠?
예 : 네. 맞아요.
주 : 이 저자가 말하는 선택하는 자살이 안락사에 가깝다고 느껴져요.
만약 의연한 죽음을 위한 안락사의 선택이라면 전 찬성합니다.
의료적 안락사일 경우에 만요.
세 : 음, 자살과는 확실히 다르죠.
주 : 전 자살을 반대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다른 생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에요.
여기보다 더 나은 삶, 혹은 다음 기회를 생각하는 다시 태어난 인생을 바라고 자살을 선택하지 않나 싶어요.
하지만 없을 거예요. 삶에서 도망을 가도 소용없을 거예요.
세 : 꼭 그렇게 다른 삶을 꿈꾸며 자살을 하나요? 세 모녀 사건도 다른 것 같아요.
주 : 너무 힘들어서 이 삶을 끝내고 싶었다?
세 : 네. 거기까지 생각을 안 하고 단지 이 삶이 싫은 거죠.
영 : 제삼자로 인하여 또는 사회적 문제로 힘들어서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물론 다음 생은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이 대부분일 거라는 생각은 들어요.
주 : 만약 사람들이 자신을 관조적인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자살을 많이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문제지.
세 : 저 역시 저의 주된 시점으로 봐요.
예 : 전 좀 더 나를 멀리 보려고 해요. 나를 좀 떠나서.
주 : 그건 유체이탈?
(웃음)
세 : 누구나 한 번쯤은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생각을 했을 텐데 우린 어떻게 그 수렁을 극복하고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 사람들은 왜 자살의 생각을 멈출 수 없었을까요?
주 : 전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 번 있었어요.
세 : 오 정말요?
주 : 네, 그래서 옥상에 올라갔는데, 거기 딱 올라서 한참을 생각했어요.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거 죽을 일은 아니다’
(웃음)
주 : 진짜 죽는다는 게 무서웠어요.
세 : 맞아.
주 :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수치심이라고 생각해요.
두려움까지도 몰아내는 수치심.
또 다른 이유는 충성심.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무라이의...
세 : 할복
주 : 네, 할복. 죽음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
주 : 영원히 살고 싶으세요?
세 : 전 건강하게 영원한 삶으로. 제 손자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의...
(웃음)
주 : 건강해야 하는 전제가 있네요.
세 : 그럼요. 건강해야죠. 그게 아니라면 구차하게 사는 거 같아서.
예 : 전 그냥 기본적으로 적당히 살고 싶어요. 대충 80?
제가 하고 싶은 목표들을 이룬 다음의 삶은 좀 길다고 느껴지기도 해요.
주 : 전 대충 65세. 제발 부탁이니까 자다 갔으면 좋겠어요.
예, 세, 영 : 저도요.
주 : 그럼 제가 먼저 가서 사후세계가 있는지 얘기하러 갈게요.
(웃음)
무섭다고 문만 걸어 잠가 봐, 아주.
(웃음)
예 : 십자가 막 있고
(웃음)
주 : 제가 이 책을 읽고 죽는다는 게 무엇일까 고민을 했어요.
그러다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는 사유의 결론이었죠.
두려운 건 죽음, 그 자체, 사멸에 대한 공포에 가깝죠. 원하지 않는 건 아직 내가 할 일이 더 있다,
혹은 이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라는 거죠.
결국에는 ‘원하지 않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는 결론이 내려졌어요.
그리고 그게 인간인 거죠.
세 : 음, 그럼 죽음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고 있는 거네요?
주 : 그렇죠. 그게 단순히 종種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세 : 제게 죽음은 두려워요. 그 후의 세상을 모르니까요.
주 : 이 방이 불이 꺼지면 캄캄해질 텐데, 그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향을 잃을 테니까요.
세 : 네. 어둠이 그대로 내 인지능력조차 뺏어갈까 봐 겁이 나요.
영 : 전 언제고 잠든 채로만 간다면 좋겠어요.
주 : 자연사 이외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 거네요?
영 : 네, 고통이 싫어요.
주 : 전 임종을 꼭 하는 죽음이고 싶어요.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다가 고혈압으로 돌연사하고 싶진 않아요.
바지 올릴 시간은 줘야지.
(웃음)
이외의 녹음은 잘 들리지 않아서 기록하지 않음.
작가가 죽음도 삶의 과정이라고 주장한 부분에 대하여 당시 모인 우리들은 반감을 가졌었다.
주장이 문제가 아니라, 그 주장에 대해 작가가 내세운 논리의 타당성이 약했던 까닭이었다.
이 책은 나중에 한 번 더 다룰 예정이다.
죽음이란 우리가 살면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