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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Mar 21. 2024

과연, 선택과 통제의 문제인가?

악마와 미스 프랭

'그리고 일곱 번째 날' 3부작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 이은 완결 편. 


한적한 산골 마을 베스코스에 낯선 이방인이 나타난다.

그는 호텔 직원 미스 프랭에게 금괴와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두고 내기를 제안한다. 그리고 베스코스 주민들은 선과 악의 심판대에 오른다. 

그러다 마을 사람들의 표적이 된 노부인 베르타는 아뱅과 사합의 이야기를 해준다.

선(善)과 악(惡)을 대변하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결국 서로가 같은 사람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소설의 주제가 표면에 떠오른다.

"모든 것이 통제의 문제, 그리고 선택의 문제일 뿐, 다른 그 무엇도 아니었다." 

선이냐 악이냐 하는 문제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한 후의 현상일 뿐이라고 받아들여도 될까. 

그렇다면, 선과 악은 현상일 뿐 동기는 아니라고 말하는 걸까. 


스스로의 선택의 시간은 삶의 어느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다. 
난관에 봉착해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없다며 슬그머니 내빼버리는 짓은 어리석다. 
도전은 기다려주지 않고 삶은 뒤돌아 보지 않는다


작가는 선택이라는 도전 행위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한다.

그렇다면 프랭은 도전에 성공했다.   

작품에서는 선과 악을 동일시하는 듯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그 어떤 것에도 둘을 분리하지 않지만, 

'주님의 종으로서 내가 악의 도구 역할을 하겠다'는 신부를 통해서 악에 눈이 먼 사람의 합리화를 보여준다. 

이 구절에서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뭐 이 정도 갖고' , '누구나 다 그래'라는 합리화로 선택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과 악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작가의 말은 진부하지만 큰 공감을 이끌어낸다. 

내가 속해서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작가의 말처럼 "최상의 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안에 있는 최악의 것을 이끌어내야만 하는" 경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대학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학생들부터 승진하고 퇴출당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직장인까지, 모두들 자신들이 속한 사회 안에서 내가 올라서기 위해 타인을 탈락시켜야 하는 '필요악'을 떠안고 있다.  


생각해 보니 코엘류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11분>에서 남자들은 고작 11분을 위해 여자에게 돈을 내고 1시간 동안 함께 있었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도 자신과 다른 사람을 미쳤다고 분류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었다.

선택의 문제라며 성무선악설이나 백지설에 가까운 논지를 펴고 있지만 선택의 기로에 서서 선의 입장에 설 사람이 얼마나 될까.

또한, 선택의 문제라는 말은 결국 성악설에 가까운 듯 보인다. 

도덕 책에서 맹자와 순자가 뛰쳐나와 격론을 벌일 일은 없겠지만 우리의 세상은 성악설에 가까워 보이긴 한다.

이제 남은 건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 선택의 도전에 얼마나 용기 있게 맞닥뜨릴 것인가 하는 준비의 문제다.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이기적인 선택을 하더라도 부디 남을 더 배려할 수 있길 바란다.

아, 정말 말도 안 되는 표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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