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 오르한 파무
어떤 책은 읽고 난 후에 질문으로 가득해질 때가 있다.
독서 후에 생긴 질문을 생각할수록 재미있고 대답을 찾아내는 묘미가 있기 때문이다.
주로 철학적인 물음을 담은 작품을 읽고 난 후에 그러는데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도 딱 그런 소설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의 질문을 계속하게 된다.
나는 왜 나인가.
나는 네가 있어서 나로서 존재한다.
네가 아니므로 내가 되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근원이 정말 내면에 있을까? 나는 밖에 있다는 생각으로 기울었다.
나를 내가 정의할 수 있다면 초인이다.
나를 정의하는 건 나를 둘러싼 세상이며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만큼의 언어이다.
이 질문에 어느 정도 틀이 잡히는 대답을 할 수 있게 되면 다시 질문으로 이어진다.
정체성이란 스스로 확립되는가, 타인이나 사회의 영향으로 확립되는가.
정체성은 타력으로 확립한다.
외부의 영향 없이 외연의 확장이 일어날 수 없다.
동경하는 것을 닮으려는 모방으로 시작된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닌가.
결국 삶이란 지구 안의 어느 곳에서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렇게 연결된 다음 질문에도 어느 정도 대답을 할 수 있게 되면 소설이 끝난다.
작가는 독자에게 무한한 질문의 계단을 만들어 놓고는 '나는 모르겠다'라며 줄행랑을 치는 것이다.
이제 대답은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았다.
게브제의 집에서 이 이야기의 방점을 찍은 사람은 호자일까, 베네치아人일까.
나는 베네치아人을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터키人 호자의 이야기라고 믿고 있다.
호자는 이제는 거울이 아닌 글로써 베네치아人과 맞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파디샤는 의외로 현자였는지도 모른다.
호자가 이제는 들켜버렸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