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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Jun 08. 2024

서신 : 벗에게

산문

벗이여.

그대의 밤은 어떤가?

새벽에 뒤척인 잠이 결국 담배를 불렀어.

곧장 밖의 문을 열었는데 어둡던 나의 눈이 하얗게 밝아지더라.

언젠가 지독히 외로운 밤, 잠 못 들어 괴로웠는데 

그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전혀 모르겠다.

그저 고개를 숙여 밤을 온전히 받아들이려 할 뿐.


벗이여.

켜진 불빛이 민망해.

초라한 나를 그대로 비춰주는 것 같아 부끄러웠어.

아무래도 이 밤을 이대로 다 쓸 것 같은데.

서성이는 발걸음은 더욱 세찬 고통을 불러왔어.

나의 정신은 해랑이 멈추지 않는 바다 가운데의 작은 낚싯배처럼 어지럽다.

눈썹을 가만히 만져보고 있어.

그러면서 또다시 망상에 빠지고 있지.


엠마는 마리아가 되어 상심에 빠진 가슴을 다른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있진 않을까.

저 하얗게 내린 눈 위로 다른 발자국을 만들며 그럭저럭 참아낼 만하다는 위로를 

그대에게서 받고 싶었어.

그 마음은 슬퍼하는 연인의 자리를 기다린 내게 굿바이를 고하는 것만 같단 말이야.

하얀 눈처럼 하얀 속옷을 입고 두꺼운 외투로도 가려지지 않을 가녀린 몸을 이끌고 

빨간 입술을 한 엠마는 마리아가 되어 날 떠났다.

어쩌면, 백석의 시처럼 흰 당나귀를 타고 언덕을 넘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


벗이여.

어째서 삶은 온통 상념으로 가득한 걸까?

하루는 길고 생은 짧구나.

생명은 찰나고 죽음은 영원하다고.

나의 정신은 깃털처럼 가볍고 상념은 시지프스의 외로운 돌처럼 무거운데.

날 더욱 괴롭게 하는 저 눈들 사이로 춤을 추며 나를 놓고 싶었어.

이리 와서 북을 쳐 줘.

움푹 파인 발자국들 사이에 나를 버리고 올게.

굴곡을 스치듯 시야의 모든 것들이 나비 날개처럼 펴지지만 제대로 인지할 수 없어.

지나치지 못한 눈 내리는 소리가 지겹게 들어온 유행가의 후렴처럼 귀에 박힌다.

오늘 그렇게 눈을 세며 밤을 새우고 있는데,


벗이여.

나는 아직도 이 나이를 처먹도록 내 마음 하나 제대로 여미지 못하고 살아.

그대가 선 땅에도 눈이 내리는지 궁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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