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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Jun 09. 2024

서신 : 어머니

산문 쓰기

어머니.

나는 지금 눈이 온 길을 유랑하고 있습니다.

눈이 내린 밤이 아름다워 걸었는데 아직껏 멈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얕은 눈이 쌓인 길에서는 연필 깎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성에가 낀 유리를 가져와 편지를 씁니다.


내가 상처를 준 곳에서도 눈이 내렸을까요.

그렇다면 조금은 덮였을까요.

조금은 내려앉았을까요.

밤은 깊어가는데 길은 어둡지 않습니다.

생각은 어렵지 않으나 글을 쓰기는 버겁습니다.

지금, 음악은 끊기고 춤은 멈추었습니다.

영업이 끝난 선술집엔 간판만이 쓸쓸하고 미처 다 지지 않은 나뭇잎들은 여전히 계절을 붙잡고 있습니다.

길은 멀어지고 멀어지고 지나온 발자국들을 붙잡으려 자꾸 돌아봅니다.

어머니.

멀리서 쓰레기 타는 냄새가 들려옵니다.

생을 뒤척이던 것들은 버려지고 달은 항상 떠있으며 손을 떠난 삶을 말하던 것들은 제 몸을 토해 타들어 갑니다.

이제, 조용히 삶을 불러 봅니다.

왜 하필 내게로 와서

왜 하필 내 손을 잡아서

하필이면, 왜 하필이면 내 눈을 봐서


해는 밀려나고 별은 태어나고 달은 항상 떠있으며 쓰레기는 타들어 갑니다.

길은 멀어지고 멀어지고 발길을 붙잡습니다.

삶이 무언가 말할 것 같아서 삶이 어떤 말이라도 해줄 것 같아서.

그것은 집착 아니면 환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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