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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Jun 27. 2024

민주

공포 단편 쓰기

민주는 화사하게 웃는 사람이다.

회사 안의 그 누구도 그녀 만큼 웃지 않았으며 밝지 않았다.

업무가 힘들면 어두워질 만도 한데 그럴 때도 자신의 밝은 채도를 잃지 않았다.

보통 존이 만나는 사람들은 어두운 방향의 채도를 가지고 있었다.

잘 웃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날카로운 인상이 굳어진 표정을 지닌 사람도 많았다.

"누구도 타인에게 웃어주길 거부하는 시대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미리 방어기제를 펼친 태세란 말이야. 하지만, 민주를 봐."

그래서 존은 민주를 대단하게 바라보았고 한 편으로는 존경심이 피어오르기도 하였다.

자신이 가진 어두운 채도가 민주의 주변에 있을 땐 밝은 색이 추가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아니었다.

오직 민주의 주변에서만 밝아질 수 있었다.

존은 처음 입사하는 날에 민주를 만났다.

민주는 존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그를 환영해 주었다.

그때부터였다.

민주의 화사한 웃음에 존은 모든 시선을 빼앗겼다.

"아마, 처음 인사를 나눌 때였던 것 같은데? 그 사람의 얼굴이 참 재미있더라고.

그래, 나는 거기에 빠져들었던 것 같아."

본이 제대로 일상에 찾아오기 시작한 날이라서 그랬을까?

감상에 빠지기 쉬운 계절이란 이래서 위험하다.

퇴근하는 길에 지하철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두운 지하를 바탕으로 무표정한 자신의 표정이 보인다.

존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는다.

어두울수록 선명해지는 자신의 얼굴이 멋쩍었다.

그러다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오기 시작하며 존의 얼굴이 사라지고 창문 밖의 풍경이 유리를 꽉 채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강 위 철교로 올라서자 밝은 햇살이 찬란한 빛을 뿜어내었다.

따뜻했다.

창문엔 더 이상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밝고 따스한 바깥의 풍경을 보는 게 훨씬 좋았다.

존은 소리를 내지 않고 환하게 웃었다.

"우린 밝음을 향하는 존재들이야.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면 어두워져. 나는 선명해지지만 좁고 음침한 세상에 틀어박히게 되지. 차라리 밝은 세상에 동화되는 게 나을 거야. 이 기분 좋고 따뜻한 빛을 봐. 이런 게 바로 신성함이지."

존은 민주를 떠올렸다.

그녀는 우리 사이에 떠 있는 태양이었다.

단조롭고 거친 회사의 분위기를 부드럽고 환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지하철이 다시 땅 밑으로 향하며 햇빛이 잦아들었다.

아, 존의 눈동자 위로 민주의 얼굴이 떠오른다.

큰 눈은 하얗고 깨끗하다.

커다란 입은 활짝 웃을수록 더욱 매력적이다.

입술이 두꺼운 편은 아니지만 몸이 마르고 얼굴이 작아서인지 입술이 두툼해 보인다.

무언가를 닮았는데, 분명히 tv에서 본 것 같은데 단어가 입에서 맴돌기만 한다.

그래! 민주는 개구리 소년이 모험을 하는 만화의 히로인을 닮았다.

아르미? 아로미? 뭐가 됐든 그 캐릭터가 실사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단연 주인공은 민주가 해야 하지 않을까.


아침부터 무덥고 해가 쨍쨍하던 어느 날.

존은 아파트 단지에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 잠시 멈춰 섰다.

어제 미팅이 끝난 후에 본부장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사내에서 네가 특별히 민주에게 신경을 많이 쓴다고 불만이 조금 있더라. 소문 잘못 돌면 너만 피곤해져. 알 잘지?"

도대체, 뭘 잘 안다는 건지.

솔직히 그 말을 듣고 나니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이래서 아는 게 병이라고 했던가.

슬며시 앞으로 밀어내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다.

존 역시 그 바람에 몸을 맡기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감정을 남녀상열로만 여기는 군중의 심리가 괘씸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이성으로 느껴졌다면 오히려 뻔뻔하게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오래 함께 일하면서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이 손에 꼽아. 내가 먼저 한 것도 한 손에 꼽는다고. 차라리, 민주가 빨리 진급하는 게 질투 난다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낫지 않나?"

그렇지만 혼자 변론을 펼쳐봐야 허공에 흩어지는 먼지가 될 뿐이다.

이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시간이다.

존은 오전에 미팅을 마치며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민주를 따로 불렀다.

"혹시 이상한 소문을 들은 적 있어요?"

"네? 어떤 소문이요?"

"아니에요. 뭐 듣기 좋은 말이라고. 하여튼 이렇게 따로 부른 건 승진 고지 때문인데, 이상 자금 모니터링 팀장으로 가게 될 거예요.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축하하고."

그게 전부였다.

존은 엄지 손가락을 한 번 치켜올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하품이 나왔다.

밝은 태양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다시 어둡겠구나.

그저 그게 아쉬울 뿐이었다.

존은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 낸 사람들에게 영상이라도 촬영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참, 이상한 새끼들이야."


그동안 봄과 여름이 지나갔다.

존의 일상은 다를 게 없었다.

다만, 가을의 초입이 되자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존의 짜증이 쌓이기 시작했다.

업무의 과중함은 이전과 비슷했지만 문제는 항상 사람이었다.

민주가 떠나고 채워진 부팀장은 존과 맞지 않았다.

밝고 명랑한 에너지를 추앙하던 존에게 부팀장의 무표정한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행태에 지나지 않았다.

부팀장이 일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애초에 회사 일이라는 게 특별히 뛰어난 능력을 요구하지도 않을뿐더러 회사 일을 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만 입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개인이 가진 에너지와 성향은 천양지차로 다르다.

"예를 들면, 이렇다고. 예전엔 부서원의 동기가 강력하게 발휘돼서 같이 고생해서 많이 얻자는 목표 달성을 하기 좋았어. 왜냐고? 밝았으니까. 부팀장이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만들고 야근에 거부감 없이 솔선수범했으니까. 지금은 어떻냐고? 시발이야. 저 바밤바 같은 새끼를 좀 보라고. 법카가 아깝다 진짜."

이미, 존의 부서의 실적과 모델 수익은 이전과 비교해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부서의 성적에 관해서 고민하는 건 그 혼자뿐인 것만 같았다.

이놈들이 언제부터 월급 루팡이었던 거지?

그토록 회의에 진심이었고 업무에 달려들던 전사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부서를 다 정리하고 민주 하나만 다시 데려와도 지금 실적은 유지할 것 같았다.

존은 한숨을 깊게 쉬고 부팀장에게 부서원들과 맛있는 점심이라도 사 먹으라고 법를 건네주고는 혼자 복도를 걸었다.

니체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산책을 하면 생각이 정리된다고 말이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감정이 배꼽에서 피어올랐다.

역시, 햇살인가.

존은 따스한 온도를 손등으로 받아내며 걸음을 옮겼다.

걷다가 계단을 올랐고 또 걷다가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별장을 대신 관리하라는 지시였다.

존은 반사적으로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그곳은 강원도의 작은 도시에 있는 작은 별장이었다.

아버지께서 은퇴 후에 종종 이용했고 건강이 나빠졌을 때에는 요양하며 휴식을 취하기도 하셨었다.

다행히 건강이 나아져 이젠 댁으로 다시 돌아가신 것이다.

그곳을 청소하려면 상당히 귀찮을 것이다.

동물을 박제한 것이 몇 점 있고 바닥엔 인도네시아에서 고모부가 선물한 호랑이 무늬의 러그가 있어서 먼지를 털고 닦으려면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존이 한숨을 쉬다 문득 주변을 둘러봤을 때, 그는 익숙한 사무실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이상자금 모니터링' 부서였다.

존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다가 기왕 들른 김에 인사라도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왼쪽 검지를 대자 문이 열리고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 웃음소리를 찾아 귀가 움직였다.

"아니, 내가 웃는 얼굴로 페이스 인증을 해둔 걸 잊고 오늘 각종 표정으로 로그인을 시도했던 거예요. 하, 5번 모두 실패했어."

"팀장님, 디폴트가 웃는 표정이잖아요. 그러게 왜 오늘은 안 웃으셨습니까?"

"나는 항상 표정이 같은 줄 알았어요. 오늘은 조금 힘들었나 봐. 아마도? 하하하. 그래도 바로 다시 등록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민주는 팀장이 되어서도 여전히 밝은 모습이었다.

하긴, 타고난 품성이 어딜 가지는 않겠지.

존은 좋은 인재를 빼앗겼다는 사실에 새삼 짜증이 밀려왔다.

실적을 내지 못하는 부서의 성적표가 떠오르자 분하기도 하였다.

존은 인사를 하고 가려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아무 의미가 없는 행동 같았다.

게다가 민주는 팀원들과 함께 여행 이야기로 신나 있었다.

"팀장님, 라오스에 가신다면서요? 거기 가서 힐링하고 오세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요."

"고마워요! 정말 얼마만의 여행인지 모르겠어요. 가면 자연 속에서 푹 쉬다 올 거야."

"수영은요? 수영장에서 예쁜 사진도 많이 찍어서 오세요!"

존은 몸을 돌려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라오스라. 그곳은 존도 가본 적이 있다.

비엔티엔과 루앙 프라방에서 휴가를 즐겼었다.

그곳은 거리에서 탁발승을 만나볼 수 있는 경건한 나라이자 자연의 풍광이 멋지게 어우러진 고도였다.

물론, 골든 트라이앵글이라고 부르는 위험한 경제자유지역도 존재했지만 일반인들이나 여행객들이 그쪽으로 갈 일은 잘 없으니까.

그때, 누군가 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부서장님."

"아. 오랜만이에요."

존이 그냥 나가려는 시도는 그렇게 실패했다.

어느새 민주가 다가와 존에게 인사를 했던 것이다.

존은 그 밝은 표정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드는 민주의 에너지가 존의 굳은 마음을 바로 풀어버렸다.

이런 게 바로 잠금 해제인가?

존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 부서장님! 오랜만에 만나는데 그냥 가시게요? 커피라도 한 잔 하시죠! 저희 부서에 새로 머신이 들어왔는데 맛이 아주 좋아요."

민주는 하와이라고 부르는 휴게실로 존을 데려갔다.

그동안 민주는 이것저것 안부를 물어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정말 존이 반가워 말이 절로 나왔다.

자신이 열심히 일을 하긴 했지만 존의 지원이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진급하기는 어려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 욕심이 있는 여자로 살다 보면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사내에 수상한 소문이 돌기 전에 존이 먼저 소문을 차단하고 미뤄질 수 있던 자신의 진급도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도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날 존이 소문에 대하여 물었을 때 전혀 들은 바 없다는 대답은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어쨌든 고마운 마음이 밝은 성격에 더해져 존에게 전해졌다.

존은 어땠을까.

그는 짧게 대답하며 민주의 말을 듣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솔직히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이 자신을 향해 밝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존이 그토록 바라던 긍정적인 에너지였다.

존은 미팅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웅하는 민주를 뒤로 하고 오른손에 커피를 든 채 계단을 내려갔다.

민주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점심 약속이 없다면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결심은 이미 섰다.

저 밝은 에너지를 어떻게든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따로 답장은 하지 않았다.



존은 전등의 갓을 새로 만든 것으로 교체하며 매우 흡족해했다.

그것은 초롱불처럼 보이도록 아래로 늘어진 조명등이었다.

그리고 조명 인테리어 업자에게 특별히 주문하여 벽에 꽂을 수 있는 전등도 만들었다.

정확히 자신의 키와 동일한 높이의 1.82m의 지점에 하얗고 동그란 콘센트를 배선하여 책장에서 책을 찾거나 책을 읽을 때 은은한 느낌이 나도록 신경 쓴 것이다.

존은 전등의 머리에 갓을 묶어 설치를 완료하고 마지막으로 그 아래에 석고로 만들어진 두상 조각품을 놓았다.

그 조각상은 동그란 눈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그 위로 조명이 불을 비추자 그 표정이 더욱 살아났다.

존은 조각상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석고로 만들기 잘했어."

그때, 현관문의 초인종이 울렸다.

존은 거실로 나가 아내를 맞이했다.

아내의 양손엔 음식을 만들 재료가 가득했다.

"자기야 고생했어. 오는데 차는 안 막혔어?"

"전혀. 오빠, 아버님이 관리를 너무 잘하셨는데?"

"내가 돈 쓴 건 왜 생각 안 하니?"

둘은 웃으며 식탁 위에 장 본 음식을 펼쳤다.

양고기와 고수 등 쌀국수를 만들기 위한 재료가 잔뜩 있었다.

아내의 지시 대로 음식을 나누고 양고기를 냉장고에 넣은 뒤에 존은 LP 플레이어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안내가 좋아하는 디즈니의 음반을 찾아 올렸다.

아내는 아주 흡족하게 웃으며 익숙하게 앞치마를 둘렀다.

오늘은 부부가 별장에서 로맨틱한 밤을 보내는 특별한 날이라서 요리에 신경을 쓸 참이었다.

존 역시 아내의 요리를 도와 저녁 준비를 마쳤다.

"근데, 오빠. 저 조각상도 산 거야?"

아내가 전등의 조명을 받고 있는 석고상이 있는 방향으로 턱을 살짝 내밀었다.

존은 그대로 몸을 돌려 활짝 웃고 있는 석고상을 바라보았다.

"화사하지? 회사를 통해서 선물 받았어. 저건 작가가 그리스의 여신을 조각한 거야. 예쁘지?"

"정말? 되게 사실적이다. 조금 무섭기도 하고. 그래도 웃고 있는 조각상이라서 그런지 분위기가 잘 어울리는 거 같아."

존은 그 말에 활짝 웃으며 아내를 바라보았다.

"자기가 마음에 든다니까 나도 좋아."

아내는 양고기를 양념에 찍어 오물오물 씹으며 존에게도 고기 한 점을 주었다.

고맙다고 말하는 존에게 아내가 물었다.

"참, 그 직원은 어떻게 됐어? 찾았대?"

"아니. 실종된 지 한 달이 됐으니까 이젠 다들 지치는 분위기인가 봐."

"하긴. 외국에서 실종됐다고 하니까. 아휴. 오빠랑도 친했다며."

"맞아. 일을 잘하고 성격도 좋아서 진급도 빨랐어. 타 부서에 팀장으로 보내줬거든."

아내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 아내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존은 아내의 손을 살짝 쥐며 고기가 참 맛있다고 말했다.

둘만의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런 어두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존은 자리에서 일어나 LP 플레이어의 음반을 조금 더 밝은 피아노 연주곡으로 바꿨다.

물론, 아내가 좋아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테마곡이 담긴 앨범이었다.

디즈니의 연주곡이 은은하게 퍼지자 아내는 좋아하는 노래라며 밝게 웃었다.

맛있는 음식과 구미가 당기는 냄새, 흥겨운 음악과 아내의 밝은 웃음을 보며 존은 참으로 행복했다.

역시, 조각상으로 만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고상은 존과 아내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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