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15
4월 2일(격리 18일째) 목요일 맑음
프랑스인들의 휴가 사랑은 거의 종교 수준이다. 신념이라는 말로 바꿔도 될 것 같다. 휴가를 떠나기 위해 일한다는 말은 그냥 수사가 아니라 프랑스인들의 휴가에 대한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보통의 월급쟁이들이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휴가는 최대 8주까지이다. 이 8주를 1년 동안 잘 쪼개서 사용한다. 여름에 3주, 12월 말에 있는 크리스마스 방학에 2주, 4월 부활절 방학에 1주, 2월 말 스키 방학에 1주, 10월 말 만성절 방학에 1주 대충 이런 식이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 부모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초중고교생들의 방학이 있는 기간에는 휴가지의 물가가 오르기 때문에 미혼자나 아이가 없는 사람들은 이 기간을 피해서 휴가를 떠난다. 각급 학교의 방학 스케줄은 학기가 시작하는 9월 이전에 이미 공식 발표된다. 그래서 여름휴가 계획은 1년 전부터 잡을 수 있다. 날짜를 조정해 다른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떠나자면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도 이런 식의 리듬으로 살고 있는데 익숙해지니 꽤 괜찮은 시스템이라고 생각된다. 9월에 학기가 시작되고, 10월 말에 2주 방학, 12월 말에 2주 방학, 2월 말에 2주 방학, 4월 말에 2주 방학, 7월 초에서 9월 초까지 두 달 동안 여름방학. 그런데 이렇게 방학의 주기를 정한 이유 중에는 꽤 과학적인 것도 있다고 한다. 내가 내 눈으로 직접 공문서를 읽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낭설일 수도 있지만, 연간 계획표를 자세히 살펴보면 약 7주 동안 공부를 하고 2주 동안 방학을 하는 패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생들의 집중력이 7~8주를 지나면서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한 번 쉬어가면서 집중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7~8주라는 시기 역시 과학적인 연구에 의한 기간이라고 한다. 그럴듯한 가설이다. 방학을 할 때나 개학을 할 때 한계효용이 최대치에 가까워 보인다. 아이들은 방학을 할 때도 기뻐하고, 개학을 할 때도 기뻐한다. 이상하게 나도 그렇다.
격리 조치가 길어지면 부활절 방학과 겹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고, 정부의 발표 내용에 따르면 그렇게 됐다. 크리스마스 방학과 여름방학을 제외한 방학들은 전국이 세 지역으로 나뉘어 기간이 각각 다르게 실시된다. 예를 들어 이번 부활절 방학의 경우 A 존이 4월 4일부터 19일까지, B 존은 4월 11일부터 26일까지, C 존은 4월 18일부터 5월 3일까지로 나뉜다. 시기가 한 곳에 몰려서 생기는 혼잡을 피하기 위해 처한 조치이다. 우리 도시는 B 존으로 A 존, C 존과 일주일 씩 겹친다. 파리가 속한 아카데미는 A 존, 즉 오는 주말 방학이 시작된다. 평소대로라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오늘 에두아르 필립 총리가 TV에 나와 “며칠 내에 휴가를 떠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인들의 휴가에 대한 경건함 또는 열정을 잘 알기에 매우 간곡한 표현을 쓴 것 같다. 풀어 설명하면, 이번 부활절 방학은 떠날 생각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그러나 격리조치를 지키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격리의 장소가 바뀌는 것뿐이라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있을 법하다. 총리가 강력하게 금지하지 않고, 저렇게 간곡한 표현을 써서 부탁한 것을 보면 아직 논란이 끝나지 않은 사안인 것 같다.
이번 사태가 프랑스인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휴가마저 없앨 정도로 심각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는 사람이 있을 테고 붙잡혀 벌금을 무는 경우도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사실 파리지앵 중 이번 부활절 방학을 이용해 떠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수도 있다. 3주 전 정부가 격리 조치를 발표하고 발효되기까지 2~3일 동안 수많은 파리지앵들이 파리를 떠나 지방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시의 아파트보다는 훨씬 넓을 시골의 부모 집으로 가는 경우이거나 지방에 별장 비슷한 제2의 거처가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남서쪽에 있는 보르도 인근의 한 휴양도시에서는 시장이 부활절 방학 때 휴가를 위해 오는 외부인에게 숙박시설 렌털 서비스를 중지해달라고 업체를 향해 호소했다. 격리조치가 이뤄지기 직전, 이미 3~4천 명이 이 도시로 와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공공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평소보다 많아 포화상태라는 것이다. 특히 의료서비스에 대한 불안감을 표시했다. 이 도시에는 의사가 9명뿐이다.
총리는 TV에 나와 휴가 관련 이야기 외에도 많은 말을 쏟아냈다.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이 궁금해하는 내용들이었는데, 격리조치의 해제는 전국적으로, 한 날 한 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고도 발표했다. 감염이 심각한 지역은 해제를 늦출 수 있다는 말인데, 만약 감염자 수가 기준이라면 우리 지역은 가장 먼저 해제될 수 있다. 우리 도(데파르트망)를 포함한 프랑스 중부 6개 도가 있는 상트르-발-드-루아르 지역의 확진자 수는 이날 현재 1759명이고 사망자는 85명이다. 프랑스 전체 확진자 수가 5만 9천105명이고 사망자는 4천503명이어서 우리 지역은 감염 정도가 심각하지 않은 편에 속한다. 또 총리는 이번 사태 이후 세금이 오르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본다고 했고, 바칼로레아가 정상적으로 치러지기는 힘들 것 같다고도 했다. 언젠가는 사태가 진정되고 우리 모두는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후유증은 상상 이상으로 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에서 최초로 완치됐던 한 남성이 어떤 매체와 인터뷰에서 한 말처럼 우리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럴수록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동네 슈퍼에서 바게트 빵을 사 오고 온 가족이 집 앞 공터로 산책을 다녀온, 평소 격리 생활과 다를 바 없는 평온한 일상이었지만 왠지 모를 무게가 나를 피곤하게 한 날이었다. 짐작이 가는 것은 있다. 한 달 후 돌을 맞이하는 넷째의 생활패턴이 조금씩 바뀌면서 우리 부부의 스케줄을 더 조여 오고 있다. 원래 넷째는 8시 기상, 식사 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조금 놀다가 10시경 취침,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 자고 일어나 12시경 점심, 또 조금 놀다가 1시 30분경 취침, 3시쯤 일어나 놀다가 4시경 간식을 먹고 5시 30분경 취침, 6시 30분쯤 일어나 씻고 잠옷을 입은 뒤 7시 30분에 저녁 먹고 8시에 취침, 을 반복한다. 세 번의 짧은 취침과 한 번의 긴 취침 그리고 세 번의 식사와 한 번의 간식이 하루 스케줄의 가장 중요한 뼈대다. 그런데 열흘쯤 전부터 짧은 취침 세 번 중 한 번을 빠트리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저항이 좀 심했다. 아이들이 24시간 집에 있으니 거실은 엉망진창으로 어지럽지, 빨래는 쌓여 있지, 주기적으로 청소를 하지 못해 방에 먼지는 쌓여 있지, 식사 준비는 해야 하지, 둘째와 셋째는 소리 지르면서 싸워대지… 여기에 넷째까지 징징대고 있으니. 나 혼자 이 모든 일을 하진 않지만 부담은 아내와 나 둘이서 똑같은 무게로 끌어안는다. 누군가 몸을 살짝 피하면 그 무게가 다른 사람에게로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아내가 동료 교사들과 화상회의를 하느라 꽤 오래 자리를 비우는 동안 넷째가 특히 크게 울었다. 달리 생각해서 넷째의 총 취침시간이 전보다 줄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쉽게 해결될 수도 있는 피곤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