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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03. 2020

외출 증명서라니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2

3월 17일(격리 2일째) 화요일 흐림


오전 9시 15분에 자동차 정기검사가 예약돼 있었다. 어제 아침에 전화해서 약속을 수요일로 하루 늦출 수 없겠느냐고 물었을 때, 수요일부터는 공장 문을 닫을 예정이기 때문에 화요일 오전에 오든지 아니면 취소하고 나중에 다시 약속을 잡으라고 했다. 나는 그냥 원래대로 화요일 오전에 가겠노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일찍 공장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부터 공장 업무가 중단됐으니 올 필요 없다는 내용이었다. 본격적인 통행금지령이 시행되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안내 문자가 왔다. 집 밖으로 나오지 말고, 나와야 한다면 증명서를 지참하라는 것이었다. 집에 TV가 없는 관계로 뉴스를 보기 위해서는 인터넷에 일부러 접속하고 사이트까지 가는 수고를 해야만 하기 때문에 정확한 정부의 발표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 문자를 받은 뒤 정부 사이트에 가서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봤다. 정부가 내린 조치의 내용은 다섯 가지 예외사항이 아니라면 이동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그 예외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정부 사이트에 준비된 증명서<사진>를 출력해 인적사항을 적고 다섯 개 중 어느 항에 해당하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증명서를 지참하지 않고 길거리를 배회하다 적발되면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외출 시 지참해야 할 증명서

예외사항이란 첫째, 업무상의 이유이다. 재택근무를 할 수 없어서 꼭 이동을 해야만 하는 경우인데 이 때는 회사가 증명하는 서류를 한 장 더 가지고 다녀야 한다. 아래의 사람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A지점에서 B지점까지 이동해야 한다, 는 내용이 적혀 있다. 둘째, 식료품 등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물품들을 사러 가는 경우이다. 셋째는 건강 상의 이유로 병원이나 약국에 갈 때 해당된다. 넷째는 도움이 필요한 가족을 위해 긴급히 이동이 불가피한 경우이다. 다섯째 예외사항은 집 근처에서 운동을 하거나 애완동물 산책을 시키는 경우이다. 다만 단체 운동은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 집에서 멀리 보이는 큰 길은 평소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한산했다. 신호등에 멈춰선 차량의 수도 한 대 많아야 두 대에 그쳤다. 





차 정기검사는 없던 일이 됐으므로 오전부터 학교놀이를 하기로 했다. 오늘은 아내가 있어서 든든하다. 아내는 아이들 옆에 노트북을 켜두고 본인 학교의 아이들에게 줄 숙제를 정리하느라 바빴지만,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밤 사이 첫째 아이 학교의 통신문 사이트에는 새로운 숙제들이 올라와 있었다. 불어 텍스트 읽고 질문에 답하기와 수학 문제 풀기였다. 둘째와 셋째의 담임교사들도 메일로 숙제를 보내왔다. 둘째는 받아쓰기와 문법 연습. 셋째는 색칠놀이와 알파벳 쓰기 연습. 아이들은 선생님이 보내준 숙제라는 말에 두말 하지 않고 공부에 매달렸다. 평소에 하던 방식이기 때문에 익숙해서 더욱 반감이 덜했을 것이다. 내가 욕심을 조금 부려서 예정에 없던, 또는 선생님이 내준 숙제 외의 문제라도 내밀라치면 즉시 싫은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마지못해 한다고 하더라도 평소보다 시간이 다섯배 쯤 더 걸린다. 아무리 닥달해도 그 닥달하는 시간만큼 늘어날 뿐 문제풀이 시간이 단축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말을 호숫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억지로 마시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격리 생활로 바뀐 가족 일상의 풍경 중 하나는 삼시세끼를 집에서 먹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무게는 느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먹으면 되잖아... 로 해결될 수 없는 그 끼니의 일상성이 지닌 무게는 힘겹게 정상에 올려놓는 순간 다시 제자리로 굴러내려오는 시지프스의 바윗덩어리에 비유할 수 있다. 너무 거창한 비유인가.  아니, 결코 과하지 않다. 오늘 점심은 뭘 먹지 ? 저녁은, 내일 그리고 모레는, 그 다음날은 ? 그래서 나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 아니 일상의 끼니를 준비하는 모든 이들을 존경한다. 물론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자식 다섯에 남편과 시아버지까지 7명의 입을 해결했던 엄마이다. 학교에 도시락을 가져가던 시절이니 도대체 아침 몇 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했을까 상상하면 아득해진다. 도시락을 싸는 것도 아니고 원래 학교에서 먹던 아이들이 점심 한 끼를 집에서 더 먹게된 것 가지고 엄살을 피우는 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게다가 엄마는 온전히 혼자였지만 우린 둘이지 않은가. 


오후에는 잔디를 깎았다. 겨우내 방치해뒀던 잔디-라기보다는 무성한 잡초-가 볼썽사납게 자라 있었다. 해가 나와서 풀들이 적당히 말랐더라면 좋았을 것이지만, 해가 나올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뭔가를 해야하니까. 지난 겨울 아마존에서 산 무선 예초기를 제대로 써먹을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전체 기계의 무게는 그리 무겁지 않았지만 밧데리 무게 때문인지 몇 분 돌린 뒤 팔에 무리가 오는게 느껴졌다. 오늘은 예초기로 가장자리를 정리했으니 내일은 잔디깎기로 중간 부분을 마무리하면 된다. 장화를 신고 나온 아이들에게 예초기로 잘려나간 잔디를 끌어모아 정원용 손수레에 넣으라는 미션을 내렸다. 이런 날을 대비해 아이들용 목장갑을 사두었는데 오늘 제대로 써먹었다. 그것도 떨이상품이어서 기쁨이 배가 됐다. 오늘의 체육활동 끝. 


동네 중소형 슈퍼로 장을 보러 가기로 했다. 계란과 바게트가 필요했다. 어제는 대형 슈퍼로 가서 장을 봤기 때문에 통행금지라는 조치가 있은 뒤 동네 슈퍼로는 처음 가는 것이다. 자주 가던 곳이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지 궁금했다. 정부사이트에서 출력한 증명서에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를 쓰고 날짜와 사인을 한 뒤 차에 넣어뒀다. 집에서 슈퍼까지 가는 1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경찰이나 군인을 만날 일은 없겠지만 왠지 이렇게 해야 정부의 조치를 정확하게 따르는 모범적인 시민이 된 것 같았다. 슈퍼로 가는 동안 마주친 조깅하는 30대 남자를 보며 저 사람이 모범시민이라면 증명서를 출력해 다섯 번째 예외조항에 체크한 뒤 몸에 지니고 있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슈퍼의 주차장에는 차가 열 대 정도 있었고, 정문은 바리게이트로 막아 통로를 좁게 해두었다. 매장 안에 30명 이상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줄을 서서 직원의 안내에 따라 한 명씩 들어가야 했다. 오후 늦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나는 대기 시간 없이 바로 들어갔지만 오전에는 줄이 꽤 길었다고 한다. 바로 사흘전인 이전 토요일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던 곳이 정부의 발표 이후 이렇게 바뀌었다. 일행이 있다면 대표로 한 사람만 매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 일행과 함께 매장 안에서 떠들면 침 튀기니까 ? 


계란은 단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도 오늘 아침 길게 줄을 섰던 사람들이 싹쓸어갔을 것이다. 계란, 플레인 요구르트, 화장지, 버터, 밀가루, 파스타와 스파게티 등 사재기용 초인기상품을 득, 하기 위해서는 오전에 와야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줄 서는 수고 쯤은 해줘야 하는 것이다. 초인기상품의 조금 더 정확한 목록과 지정 사유에 대해서는 면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할 듯하다. 위에 언급된 상품만을 봐서는 어떤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다행히 바게트는 충분히 남아 있었다. 평소보다 빵을 덜 구웠는지 물었더니, 양을 늘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들 집에서 격리 생활을 하기 때문에 바게트 소비량이 늘어난 것이다. 


아이들과 하루종일 부대끼다 보니 신경질을 내는 횟수가 잦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특히 사춘기 초입의 사전 작업을 위한 기초 공사 쯤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첫째 아이와 자주 부딪혔다. 격리 생활이 2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만큼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가족들과의 원만한 관계가 중요하다. 오후에는 아내와도 살짝 불꽃이 튈 뻔 했다.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할지도 모르는, 모두가 다소 예민해진 상태로 보였다. 아니, 나만 그런건가. 확실한 건 하루가 정말 길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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