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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04. 2020

코로나 명상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8

3월 24일(격리 9일째) 화요일 맑음


우리 집도 이젠 격리 생활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는 듯하다. 어렸을 때 방학이 오면 항상 그렸던 그 실력을 살려서 만든 격리생활 시간표는 아이들로부터 느슨하지만 나름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공부해!라고 소리 지르며 쫓아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9시 30분이면 양치와 세수를 마친 아이들은 옷을 갈아입고 책상에 앉는다. 물론 시간을 알려주고 재촉하지 않으면 잠옷 바람으로 10시, 11시까지 플레이모빌을 가지고 놀 수도 있다. 이제 9시 30분 거의 다 됐다, 라고 알려주기만 해도 공부할 준비를 하려고 서두른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다. 아내 또는 나의 역할은 그날그날 해야 할 숙제들을 주고 지켜보거나 틀린 부분을 고치고 모르는 것은 알려주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프랑스는 초중고교 학년제가 5-4-3이어서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인 첫째는 가정통신 사이트에 혼자 들어가 알아서 숙제하고 알아서 선생님에게 메일로 보내고 한다. 내년 9월 새 학기에 초등학교 1학년이 되는 셋째는 책상으로 데려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하루에 총 1시간 정도라도 책상에 앉혀 뭔가 쓰고 그리고 만들고 하게 하면 성공이다. 


나는 첫째 방의 벽 페인트칠 작업을 이어나갔다. 아직 본격적으로 색을 칠하기까지는 멀었고, 준비 작업을 하는 중이다. 벽지를 깨끗하게 때어내고 사포로 울퉁불퉁한 부분이 없도록 벽을 문질렀다. 먼지를 어찌나 먹었던지 목이 칼칼하다. 첫돌을 한 달 남겨두고 있는 넷째는 7번째 이가 나오는 중이어서 그런지 짜증이 많이 늘었다. 낮잠의 양도 전보다 많이 줄어서 아내와 나를 꽤 피곤하게 한다. 기어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냥 두면 가장 위험한 존재이다. 안으면 내려주라 내려주면 이것저것 다 만지고 놀이 공간에 넣어두면 안아달라, 안으면 내려주라… 끝이 없다. 최근에 종종 정원에서 노는 동안 우리가 발견한 것은 넷째가 풀에 닿는 걸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매트 위에 올려두면 절대 매트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바람이 있어 약간 쌀쌀하긴 해도 햇살이 좋아 나는 오늘도 넷째와 함께 정원에 매트를 깔아 두고 일광욕을 즐겼다. 모두들 격리생활에 각자의 방식으로 익숙해지나 보다. 조금 여유들이 생겼는지 주변 친구들과 문자나 전화로 안부를 묻는 횟수가 전보다 늘었다. 


젊은 시절 아프리카에서 10년 넘게 살았던 장인어른은 가족 채팅방에 장문의 글을 하나 띄웠다. 무스타파 달레브라는 차드의 문인이 쓴 글이라고 하는데, 무릎을 딱 치게 하는 구석이 있어 번역을 해봤다. 


쪼만한 거시기에 의해 인간들이 동요하고 사회가 무너져버렸다. 


코로나바이러스라 불리는 초미니 거시기가 전 세계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무엇이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뒤집어 엎는다. 모든 것들이 다른 방식으로 제 자리를 잡는다.

서양 열강이 시리아와 리비아, 예멘에서 이뤄내지 못한 것을 쪼만한 거시기가 해냈다.(정전, 휴전...)

알제리 군대가 해내지 못한 것을 이 쪼만한 거시기가 해냈다.(히라크(역주-알제리의 시민 혁명)가 끝났다.)

야당이 해내지 못한 것으로 이 쪼만한 거시기가 해냈다.(선거 기일 연기...)

대기업들이 해내지 못한 것을 이 쪼만한 거시기가 해냈다.(세금 환급, 면제, 무이자 대출, 투자 기금, 전략적 원자재 가격의 하락...)

노란 조끼와 노조원들이 해내지 못한 것을 이 쪼만한 거시기가 해냈다.(휘발유 값 인하, 사회보장 강화...)

갑자기, 우리는 서구사회에서 휘발유 가격이 떨어지고 공해가 사라지며 사람들이 시간을 충분히 갖기 시작한 것을 목격하고 있다. 시간이 너무 많아 뭘 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더 알게 되고, 자녀들은 가족들과 함께 집에 머무르는 법을 배운다. 일이 우선순위가 아니며 여행과 레저가 더 이상 성공한 삶의 표준이 아니게 됐다. 

갑자기, 침묵 속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연대와 취약성이라는 단어의 가치를 이해하게 된다. 

갑자기, 우리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 같은 배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우리는 우리가 마트의 진열대를 싹쓸이하고, 병원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된다.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 우리 모두는 인간이라는 같은 정체성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누구도 밖에 나갈 수 없기 때문에 고급 자동차도 차고에 멈춰 서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지구가 상상할 수 없었던 사회적 평등을 이뤄내기 위해 단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 

두려움이 모든 사람을 집어삼켰다. 가난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던 두려움은 이제 진영을 바꿨다. 그들에게서 떠나 부자와 권력자들로 향하고 있다. 두려움이 인간성과 휴머니즘을 상기시키고 있다. 

화성에 가서 살 궁리를 하고 영원한 삶을 위해 인간을 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취약성을 깨닫는 데 이번 사태가 도움이 되길 바란다. 

자연의 힘 앞에 놓인 인간 지능의 한계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확실성이 불확실성이 되고, 강함이 약함으로, 권력이 연대와 협조로 바뀌는데 단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프리카가 안전한 대륙이 되는데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 몽상이 거짓말처럼 현실이 돼버렸다. 

인류는 숨과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슨 가치가 있는가? 우리는 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섭리를 기다리며 사실을 직시하자. 

코로나 바이러스로 증명된 이 "세계화" 안에서 우리의 "휴머니티"에 대해 질문해보자. 

집에 머물면서 이 유행병에 대해 명상하자. 

살아 있는 우리 서로를 사랑하자!


내일은 페인트칠 작업을 하면서 코로나 19가 강제로 내게 안긴 이 시간들에 대해 명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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