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11
3월 28일(격리 13일째) 토요일 맑음
한국에 있는 가족, 친구들과 평소보다 더 자주 연락을 하게 된다. 묻는 질문은 비슷비슷하다. 지낼 만하냐, 힘들지 않느냐, 매일 뭐하고 지내느냐 등등. 내 답도 그리 특별할 게 없다. 지낼 만하다. 힘들 것 없다. 애들이랑 지지고 볶느라 더 바쁘게 지낸다 등등.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봤다. 격리 생활이 힘든 이유가 뭔지. 격리돼 있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하루에 한 번(매번 증명서를 새로 쓰면 되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나가도 사실 알 길이 없다), 적어도 한 시간(내가 직접 증명서에 기재한 산책 출발 시간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한 시간 정도 돌아다니다가 시간을 고치면 한 시간을 더 있을 수 있고 같은 방식으로 오래오래 산책을 할 수도 있다) 동안은 바깥공기를 얼마든지 마실 수 있고 또 장 보러 가는 것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장을 볼 수 있으니 먹는 건 문제가 없다. 아이들 공부는 재택수업으로 대체하고 있으므로 그럭저럭 해나가고 있다. 개인사업자인 나는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내 월급이 있어서 역시나 응급상황이라 할 수 없다.
무엇이 격리 중인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바이러스의 습격을 받은 우리에게 특별하게 금지된 것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이다. 가족 외에 타인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 격리생활의 가장 큰 고통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과 격리 생활의 차이가 무엇일까. 지난 2주 동안 우리 가족의 생활이 여느 방학 때의 모습과 가장 다른 것은 우선, 처가에 가지 않고 여기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처가로 갔다면 격리의 느낌이 훨씬 덜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시골로 갈 수 없는 처지이므로 아이들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지낼 수 없게 됐다. 가끔 페이스타임을 통해 화상통화를 하지만 그걸 할수록 왠지 더 멀리 있는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이 도시에 사는 다른 친구들을 전혀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방학인데 우리가 시골에 가지 않고 여기에 남았다면 첫째 딸은 우리를 졸라 친구를 초대하든, 친구에게서 초대를 받든 꾀를 내어 ‘베프’들과 파자마 파티를 두세 번은 벌써 했을 것이다. 우리 부부 역시 저녁식사에 친구들을 초대하거나 초대받는 시골 도시에서의 사교생활을 즐겼을 것이다.
격리돼 있으면서도 기본적인 생활은 가능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딱히 힘들 게 없어 보인다지만 어딘가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맛있는 밥을 해 먹고 산책을 하고 정원에서 뛰어놀아도 허전했던 이유는 어쩌면 타인과의 관계 단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오늘 산책에서 다녀오는 길에 받은 단상이다. 오후 한 때 22도까지 오를 정도로 햇살이 좋았다. 그냥 집에 있기 아쉬워 산책을 제안했다. 토요일이어서 아이들도 자유시간이 많은 터였다. 첫째는 나와 함께 걷고, 둘째는 킥보드를 타고, 셋째는 자전거를 타고, 넷째는 유모차에 타고, 아내는 유모차를 밀고 집을 나섰다. 새로 바뀐 증명서에는 분명히 ‘한 집에 사는 구성원들은 함께’ 짧은 운동에 나서도 좋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텅 빈 거리는 이 도시가 아직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산책로 아스팔트 옆에 정신없이 피어 있는 민들레와 데이지 같은 들꽃들은 따스한 햇살과 어울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에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격리되기 바로 전 토요일 다녀왔던 공원 이후 온 가족이 나선 건 처음이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햇살을 즐겼다. 아이들은 공터에서 탈것을 타거나 뛰어다녔다. 30분 정도 머무는 동안 내가 본 행인은 두 명이었다. 오랜만의 외출은 평화롭고 따뜻했다. 50분쯤 됐을 때 첫째가 말했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에요.” 돌아오는 길에 옆 집 이웃을 만났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60대 후반의 커플인데 어느 토요일 티타임에 우리를 초대한 적이 있다. 둘 다 은퇴를 했고, 도시 인근 시골에 살다가 좀 더 활발한 은퇴 생활을 즐기기 위해 도시 안으로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둘 모두 이민자 구호단체나 등산 동아리 같은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평소처럼 볼뽀뽀를 하지 않았고, 악수도 나누지 않았다. 아내는 이들과 1미터 이상 간격을 두고 서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 내용은 뻔한 것이어서, 이들이 정기적으로 돌보는 손주 뻘 아이의 학습에 도움이 될 인터넷 사이트에 대한 정보나 한층 따뜻해진 최근 날씨가 전부였다. 이웃이 오늘은 20도 넘게 오른 봄 날씨였어도 일기예보에 나온 것처럼 며칠 이내 최저기온이 영하로 내려간다면 올해 체리나무에 체리가 안 열리게 생겼다고 말하자, 아내는 재작년에 딱 그래서 우리 집 정원의 체리를 하나도 못 먹었다고 맞장구를 쳤다. 체리나무의 꽃들이 만발한 상태여서 지금 영하의 날씨가 되면 열매가 안 열릴 확률이 높다. 아내가 이웃들과 하나도 중요할 것 없는 일상적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격리 생활이 빼앗아 버린 우리의 일상이 바로 저거였구나. 우리를 허전하게 했던 것은 어쩌면 타인과의 관계였을지도 모르겠다. 외부와의 단절이 가장 효과적인 예방책일 수밖에 없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특징이 격리 생활을 더 힘들게 하고 있었다.
발코니에 나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이탈리아 시민들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의료진을 응원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지만 더 간절한 것은 타인과의 관계가 끊기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해질 무렵 각자의 잔에 가벼운 술을 채우고 발코니에 나와 옆 건물의 이웃과 눈인사로 건배를 나누며 원거리 아페로(식전주)를 즐긴다는 요즘 파리지앵들의 행동에도 마냥 비웃을 수만은 없는 애절함이 있었던 것이다. 아파트와 같은 공동 주택에 살지 않아서 나로서는 더더욱 알 수 없었던 것들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보고 싶어 졌다. 같은 도시에 사는 프랑스인 친구들도 덩달아 보고 싶어 졌다. 매주 일요일 성당에서 마주치던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내일도 우리 가족은 인터넷 미사를 보게 되겠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며 매일 마주치는 셋째 반의 조셉 아빠, 까미유 엄마, 쌍둥이 엄마, 루이즈 엄마, 자맹 선생님은 물론 둘째의 담임인 들레땅 선생님, 둘째의 단짝인 마티유, 첫째의 베프인 콩스탕스와 샤를롯이 잘 지내는지 궁금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로부터 빼앗은 것은 이동제한의 자유가 전부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그 일상이 파괴돼 버렸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날 그 일상은 예전과는 다른 일상이 돼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너무나 소중한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