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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05. 2020

앙리 고모부는 훌훌 털고 일어날까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14

4월 1일(격리 17일째) 수요일 맑음


진짜로 달이 바뀌었다. 처음 격리 조치가 시작됐을 때 정부는 최소한 2주라고 발표했어도 달을 넘겨 4월까지 격리가 이어질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로 달이 바뀌니 기분이 묘하다. 바이러스 때문에 2020년 3월의 절반을 집에 갇혀 살았다. 오늘은 자영업자와 소규모 사업체를 위한 정부의 지원 신청이 시작되는 날이다. 개인사업자로 등록돼 있는 나에게도 해당이 된다. 종업원 10인 이하 사업체를 비롯한 개인사업자 가운데 지난해 3월 매출과 올해 3월 매출을 비교해서 70% 이상 매출이 하락한 경우 그 차이를 정부가 메워준다는 내용이다. 최대 1500 유로까지 지원해준다. 그런데 기준이 너무 높아서 신청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문이다. 격리조치가 있기 전인 3월 중반까지는 다들 정상 영업을 했기 때문에 70% 이상 매출이 낮다는 것은 코로나 사태 아니더라도 무슨 문제가 단단히 있는 회사라는 말이다. 당장 나의 경우만 해도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정부의 지원책 홍보 사이트를 닫았다. 


언제나처럼 둘째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메일이 와 있었다. 첨부파일을 열어보니 수영 수업에 대한 내용이었다. 프랑스 정부의 로고와 교육부 장관의 사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는 문서에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수영 수업을 원격으로 진행하기로 했다는 게 골자였다. 학생들은 수영복과 물안경, 수영모자를 꼭 착용하고 등받이 없는 의자에 올라가 수영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사진을 찍어 보내면 개학한 뒤 교실 한편에 전시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만우절을 기념한 메일이었다.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이 메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동안 웃었는데, 아내는 “우리 둘째가 거실에서 수영 연습을 하다 허우적거리면서 물을 먹는 바람에 급하게 구조하느라 사진을 못 찍었어요”라고 답을 보내야겠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오전 내내 물고기에 색칠을 한 다음 투명테이프를 이용해 나와 아내의 등 뒤를 토닥이며 돌아다녔다. 만우절이면 프랑스에서 하는 아이들의 놀이이다. 만우절을 뿌아쏭 다브릴(Poisson d’Avril)이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4월의 물고기'이다. 그래서 만우절이면 등에 생선 몇 마리 달고 다니는 어른들이 꼭 있게 마련이다. 


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시간을 보내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 중 하나는 만들기이다. 아내 역시 자기 반의 아이들에게 만들기 숙제를 잊지 않고 내준다. 그런데 숙제로 내줄지를 결정하기 전 나와 아이들이 종종 아내의 마루타가 되어 만들기를 직접 해본다. 만들기의 난이도가 초등학교 5학년 수준에 적당한지, 결과물이 미적으로 완성도가 있는지 등을 미리 보기 위해서다. 첫째 아이는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종이 접기용 색종이 뭉치를 꺼내왔다. 숙달된 조교의 시범은 온전히 나의 몫이어서, 둘째와 셋째는 자신들이 보기에 멋진 모델이 나오면 접어주세요, 여기서 어떻게 해요, 라면서 질문공세를 퍼붓는다. 그냥 처음부터 내가 만들어서 주면 훨씬 빠르고 속이 편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렇게 되면 시간을 때운다는 목적인 다루기 어려워지는 단점이 있다. 종이비행기로 희생돼 하늘로 날라가 버린 양면지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 자주 사용하는 것은 만들기 외에 또 있다. 보드게임. 결혼 후 틈 날 때마다 하나씩 사 모은 보드게임이 지금은 책장의 한 층을 다 차지할 정도로 많아졌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우리 가족을 위해 꼭 보드게임 하나 정도는 산다. 프랑스에서는 특히 형제가 많은 가족들의 경우 다 같이 모여 보드게임을 하는 게 일반화돼 있다. 지금도 처가에 가면 저녁 식사 후에 식탁에 둘러앉아 보드게임 한 두 차례를 한 뒤 잠자리에 들곤 한다. 다만 저녁 식사 후에 벌어지는 게임의 플레이어는 철저히 어른이다. 아이들은 이미 잠들고 없을 시간이므로. 아이들과는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게임을 이용해 낮 시간 동안 한다. 보드게임도 유행 같은 게 있어서, 꽂힌 게임이 있으면 한동안은 줄곧 그 게임을 하게 된다. 그러다 새 게임을 발견하면 옮겨 타서 또 한 동안 그걸로 즐기고. 보드게임은 대개의 경우 언어가 필요 없어서 한국이나 프랑스 어디에서 사든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사는 게 가격 측면에서는 확실히 유리하다. 그래서 내게 소포를 보내는 누나에게 최근 인터넷으로 찜해두었던 게임을 부탁했었다. 엊그제 도착한 소포에는 보드게임도 들어있었다. 나와 아내는 솔직히 마스크보다 보드게임을 더 기다렸었다. 트리오미노스와 큐빅스 레이스. 아이들은 큐빅스 레이스에 꽂혔고, 나와 아내는 트리오미노스에 꽂혔다. 트리오미노스는 4인까지 할 수 있어서 나와 아내, 첫째, 둘째 이렇게 넷이서 하는 중이다. 아마도 격리 생활 내내 즐기게 되지 않을까. 


학교 수업이 오전에만 있는 수요일은 원래 리듬으로도 느슨한 날이어서 아이들에게 영화 한 편을 보여주곤 한다. 격리 조치 이후에는 아예 수요일을 영화 보는 날로 정했다. 이렇게 요일을 정해놓으면, 아이들이 다른 요일에 영화를 보겠다고 할 수 없게 된다. 오늘이 격리 이후 세 번째 수요일인데 둘째가 영화를 고를 차례였다. 둘째는 프랑스인들에게는 고전으로 꼽히는 만화영화 <탱탱의 모험>을 골랐다. 아이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넷째가 낮잠을 자주면 우리 부부는 자유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런 행운은 아무 때나 오질 않는다. 잘 자던 아이도 영화가 시작될 무렵 또는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깨기 마련이다. 머피의 법칙처럼. 아이들이 소파에 앉아 노트북 화면으로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넷째와 발코니에 나가 볕을 맞으며 놀았다. 바람이 잦아드니 햇살이 따가웠다. 일기예보 상으로는 최근 며칠 매섭던 꽃샘추위도 사나흘 후면 자취를 감추고 기온이 꽤 오를 것으로 보인다. 


만우절이자 수요일인 오늘이 그렇게 평화롭게 끝나가는 것으로 보였다. 아이들을 재우고 한 숨을 돌릴 무렵 아내의 아빠 쪽 사촌들이 모인 채팅방에 장문의 문자가 하나 떴다. 고모의 큰아들이 쓴 글이었다. 70대 초반인 아내의 고모부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돼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내용이었다. 상황이 꽤 심각했다. 의식이 없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코마 상태라는 것이다. 다행히 좋은 의료진을 만나 상태가 호전되리라 기대하고 있다면서 다음 소식이 있으면 전하겠노라고 문자를 마쳤다. 고모는 15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고모부 혼자 파리에 살고 있다. 공직에 있었는데 62세쯤 은퇴한 뒤로 만날 때마다 부쩍 늙어버린 것이 한눈에 보였다. 1년에 한 번 정도 만나는 사이여서 더욱 그렇게 느꼈을 수 있다. 오랜만에 보면 아이들은 더 커 보이고, 노인들은 더 늙어 보이는 법이니까.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앙리 고모부가 한 달 전쯤 아내와 내 앞으로 엽서를 보냈다는 사실이다. 내용은 특별할 게 없었지만 엽서를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특별한 일이었다. “너희들 생각 자주 한다. 파리 오면 연락하거라. 내 전화번호를 남기마.” 나는 물론이고 아내 역시 그 고모부로부터 그런 류의 엽서를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엽서 고맙게 잘 받았고, 파리 가면 얼굴 뵈러 가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아내는 사실 엽서를 받았을 때 뭔가 안 좋은 기운을 느꼈다고 오늘 털어놓았다. 왠지 작별인사가 아닐까 했다는 것이었다. 여자의 직감 같은 걸까? 사촌들의 채팅방에 장문의 문자가 올라온 뒤 방에 있던 아내의 사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용기와 위로의 댓글을 달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주변을 점점 옥죄어 오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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