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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08. 2020

갇혀서 할 수 있는 것들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20

4월 7일(격리 23일째) 화요일 한때 흐리고 맑음


첫째의 열한 번째 생일 아침이 밝았다. 보통은 아내가 직접 케이크를 만드는데 원격수업 때문에 평소보다 더 바빠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나는 다른 식구들이 내려오기 전 케이크를 사기 위해 빵집으로 향했다. 증명서를 지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제부터 디지털 증명서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전까지는 종이에 매번 날짜와 시간을 고쳐서 사용했었다. 덕분에 화이트 수정액으로 지운 흔적이 덕지덕지 남아 있다. 이제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별 것도 아닌 디지털 증명서 하나 새로 도입하는데 3주 넘게 걸렸다. 대단한 프랑스인들이 아닐 수 없다.


"누구 집이야?" "아빠 너, 어렸을 때 살던 집이잖아. 한국에."

부엌의 식탁에 둘러앉아 케이크에 초를 꽂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셋째는 파아란 하늘에 큼지막한 무지개가 구름에 걸쳐 있는 그림을 선물했다. 둘째의 도움을 받아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예전에 비하면 셋째의 그림 실력이 많이 늘었다. 우리가 고른 생일 선물을 받아 들고 첫째는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둘째는 나도 빌려주라, 며 벌써 찜을 해두었다. 소박한 생일 의식을 마치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일상을 시작했다. 괜히 첫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평소에도 생일이라고 해서 뭐 대단한 것을 선물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첫째가 특별히 서운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우연히 1년 전 오늘의 사진을 보게 됐는데 그때는 케이크 옆에 선물꾸러미가 서너 개 놓여 있었다. 그게 다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갇혀 있어서 못하는 게 있는 반면, 갇혀 있어서 할 수 있는 것도 있다는 걸 오늘 알게 됐다.


첫째의 생일을 가장 먼저 축하해준 것은 뽕도라에 있는 장모였다. 초 열한 개를 꽃은 생일 케이크와 첫째의 사진을 가족 채팅방에 올렸더니 곧바로 전화기가 울렸다. 한 시간쯤 후에는 서울에 있는 첫째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가족이 서울에 살 때 친하던 친구인데 지금도 연락을 하며 지낸다. 둘은 꽤 오랫동안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통화했다. 다음은 지금 다니는 학교의 삼총사 친구들 두 명이다. 하나씩 차례로 전화가 와서 생일을 축하해줬다. 첫째는 파리에 사는 아내의 막내 이모에게서도 축하인사를 받았다. 이모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완치돼 다시 병원에 출근하고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사는 아내의 작은 고모가 전화를 해 첫째에게 축하를 전했다. 작은 고모와 고모부 역시 격리된 상태와 지내고 있었다. 프랑스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이동제한령이 시행 중이라고 말했다. 장 보러 가는 것도 금지돼 있고, 쓰레기를 버리러 잠깐 단지 내에 나갈 때도 마스크 착용이 필수라고 했다.


스페인 고모부는 내가 아내와 결혼해서 장인 측 가족들을 처음 만났을 때 나를 특별히 따뜻하게 맞아줬던 사람이다. 나에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더니 “이 집안에서 내가 유일한 외국인이었는데, 네가 나타나서 너무 반갑다. 환영해”라고 말해줬다. 장인은 9남매 중 다섯 번째이다. 내가 가족들을 모두 만난 것은 십여 년 전,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구순 잔치였는데 거기 모인 가족 구성원의 수가 70명이 넘었다. 새롭게 가족이 된 나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이름표를 가슴에 부착했고, 벽에는 가계도를 그려서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배려해줬다.


다음은 스위스 제네바에 살고 있는 첫째의 대부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국의 가톨릭에서는 세례식을 할 때 여자는 대모가, 남자는 대부가 있는데 프랑스에서는 여자 남자 모두 대모와 대부가 있다. 첫째의 대부는 파리에 사는 막내 이모의 큰 아들 로맹이다. 결혼을 아직 하지 않은 젊은 남자들이 그렇듯 로맹도 대녀인 첫째에게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우리는 더욱 놀랐다. 아마 엄마인 막내 이모가 로맹에게 전화하라고 부추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마운 일이었다. 나도 덕분에 로맹과 통화할 수 있어 좋았다. 몇 달 전 여자 친구랑 우리 집에 다녀간 적이 있는데 그 친구와 내년 9월에 결혼하기로 했다는 따끈따끈한 소식도 전해줬다.


아내 외삼촌의 가족들은 단체로 짧은 비디오를 찍어서 보냈다. 그들은 첫째를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줬다. 한국에 있는 첫째 또래의 사촌들에게서도 축하 사진이 도착했다. 불어로 쓴 피켓을 들고 조카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독일의 처제 식구가 전화를 했다. 곧 세 살이 되는 루이즈가 독일어 억양이 섞인 불어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줬다. 첫째가 맞은 열한 번의 생일 중 오늘처럼 많은 축하를 받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다 격리 덕이다. 아마도 첫째의 기억에 다른 어떤 생일보다 오래 남는 날이 될 것 같다. 격리생활이 꼭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이 다른 방법으로도 확인됐다. 아내가 반 아이들에게 작문 주제로 ‘격리 생활의 장점과 단점’을 던졌는데 오늘 과제물을 몇 개 받았다며 소개해줬다. 평소 아내는 이렇게 통제 안 되는 아이들은 정말 처음이라면서 올해 맡은 5학년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 반의 한 아이는 격리의 장점으로 “학교와 달리 공부에 집중한다. 조용해! 떠들지 마! 같은 말을 안 들어도 된다. 엄마 아빠와 함께 공부하고 놀 수 있다. 영화도 자주 볼 수 있다…” 등을 꼽았다. 단점은 “없다”고 적었다. 이 아이는 심지어 학업 성적이 최하위권인 통제 안 되는 그룹에 속하는 학생이었다. 아내는 살짝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그 아이에게는 학교가 불필요한 곳이었나 보다. 나는 “아마 시골에 사니까 그럴 거야. 집도 정원도 넓어서 맨날 뛰어놀 수 있잖아. 학교보다 좋을 수밖에. 만약 파리 같은 도심지역 학생들에게 같은 걸 물어봤으면 다른 답이 왔을걸.”라고 말하며 위로를 시도했다.


어느새 정원의 풀들이 많이 자라 있었다. 내가 잔디를 깎으러 가려는데 둘째가 본인이 하겠다고 나섰다. 나는 대충 구역을 일러주고 정원의 반대편에서 아내와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절반 정도 한 뒤 둘째가 기계를 멈추고 우리 쪽으로 돌아왔다. 왜 도중에 오느냐고 물었더니, “저기 고슴도치 있는 쪽은 안 할래요.” 란다. 엊그제 체리나무 옆에서 봤던 그 고슴도치를 말하는 것이었다. 풀을 잘라주면 고슴도치가 좋아하지 않을까, 했는데 “풀이 짧아지면 숨을 곳이 없잖아요.”라고 하면서 둘째는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프랑스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가 1만 명을 넘어섰다. 오늘 현재 1만 328명이 3월 1일 이후 희생됐다. 초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들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아직도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현실에서 마스크 착용의 중요성에 대한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격리의 해제는 "아시아처럼" 마스크 착용이 일반화됐을 때나 가능하다는 전문가의 의견이 소개됐다. 남쪽의 휴양도시 니스 같은 곳은 마스크 의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북부의 어떤 마을에서는 길거리를 포함한 공공장소에서 침을 뱉는 사람들에게 벌금 68 유로를 부과하기로 했다. 감염자의 동선 공개에 필요한 개인정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에 대해서도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부활절을 앞두고 양 축산농가가 울상이라는 보도도 보인다. 슈퍼마켓을 드나들며 느낀 건 양 축산농가 못지않게 초콜릿 제조업체도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 같다는 점이다. 명당자리인 매장 입구의 진열대에 산처럼 쌓여있는 저 초콜릿은 다 어디로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없는 이번 부활절에는 우리도 초콜릿을 거의 사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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