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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10. 2020

둘의 심오한 라이벌 관계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22

4월 9일(격리 25일째) 목요일 맑음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 아침, 아이들은 최대한 늦게 부엌으로 내려온다. 그렇게 “빨리빨리”를 외치는 나도 토요일과 일요일은 재촉하지 않는다. 배꼽시계가 꽤 정확해서 길어봐야 30분 후면 식탁에 마주 앉아 함께 아침을 먹게 돼있기 때문이다. 격리 생활이 길어지자 평소의 패턴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게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초기에는 아이들이 주중과 주말을 꽤 잘 구분해서 생활했다. 예를 들어 주중에는 아침에 뜸을 들이지 않고 곧바로 식탁에 앉아 함께 아침을 먹고, 씻고, 옷 입고 9시 30분쯤이면 책상에 앉았다. 이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는 말은 여러 번 재촉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그다음 순서로 알아서 넘어갈 줄 알았다는 이야기다. 대신 아이들도 나도 주말 아침에는 좀 여유를 부렸다. 그런데 격리 4주째를 지나오면서 그 구분이 애매해지고 있다. 


특히 둘째와 셋째는 우리 침대로 와서 아침 인사로 볼 키스를 건넨 다음 부엌으로 가는 대신 다시 자기네 방으로 돌아간다. 아내는 넷째의 기저귀를 갈고, 나는 부엌으로 가서 넷째의 젖병을 만들고 나머지 다섯의 아침을 준비한다.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굽고… 늦어도 커피가 다 내려질 때쯤이면 아이들이 내려와 우유와 주스를 꺼내고 시리얼을 볼에 담는 게 주중의 루틴이다. 며칠 전부터 둘째와 셋째의 방에 내가 다시 올라가서 밥 먹자, 는 말을 꼭 하게 된다. 그 아침부터 두 아들은 레고 놀이를 열심히 하고 있다. 그놈에 레고가 뭐길래. 오늘의 스토리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두 척의 배였다. 항구도 배도 모두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순수 창작물이다. 원래 제품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해체된 지 이미 오래다. 장난감을 부수고 다시 조립할 수 있는 것은 레고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두 척의 배가 정박해 있던 항구를 떠나고 있다. 

초등학생 정도 되는 아이를 둔 프랑스 가정의 부모들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레고와 플레이모빌의 심오한 라이벌 관계에 대해. 당장 우리 집만 하더라도 딸인 첫째의 방은 플레이모빌이 장악하고 있고, 아들인 둘째와 셋째의 방엔 레고가 쫙 깔려 있어서 제대로 걷기도 힘들 정도다. 특히 크리스마스가 되면 우린 고민에 빠진다. 레고냐, 플레이모빌이냐. 마치 부먹이냐 찍먹이냐, 양념이냐 후라이드냐, 비냉이냐 물냉이냐, 를 고민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게 그린 간단하지 않다. 사실 먹는 것은 부먹 반 찍먹 반 또는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아니면 넌 비냉 난 물냉 그리고 반반씩, 처럼 절충의 묘미가 있는데 레고와 플레이모빌의 관계는 그럴 수 없다.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쉽게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기 쉽지 않다는 의미에서 차라리 맥킨토시냐 PC냐, 고양이냐 강아지냐, 삼각이냐 사각이냐의 비유가 더 어울릴 것 같다. 어른이 된 뒤라 할지라도 처음 만난 사이에 너 레고야 플레이모빌이야, 라는 물음에 같은 답이 나오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술술 풀린다. 


레고는 블록형이어서 조립이 가능하고 플레이모빌은 완성형이어서 디테일이 살아 있다. 레고는 인물의 몸통은 물론 얼굴까지도 각이 져 있지만, 플레이모빌은 둥글둥글하다. 레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플레이모빌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걸 가지고 노는 것이어서 장난감 중 하수라고 폄하하고 플레이모빌의 팬들은 레고의 모형이 사실적이지 않다면서 깎아내린다. 어떤 연구결과에 따르면 레고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학적이고, 플레이모빌을 좋아하는 사람은 창의적인 성향이라고 한다. 또 다른 연구는 레고가 고독하고 빈틈없는 장난감이라면, 플레이모빌은 사교적이고 쾌활하다고 봤다. 내가 잡아낸 두 장난감의 공통점은 동그랗게 말린 손 모양이다. 물론 그 규격은 다르다. 


첫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족. 

호기심이 생겨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레고가 좋아, 플레이모빌이 좋아? 의외로 망설임이 없었다. 첫째는 플레이모빌, 둘째는 레고, 셋째는 나도! 였다. 그 이유도 그리 특별할 게 없었다. 첫째는 주로 집을 꾸며놓고 스토리를 만들어 노는데 집 안에 있는 가구 등이 매우 세부적인 점이 좋다고 했다. 레고에서는 피아노나 화장대 같은 것들을 플레이모빌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가 레고를 좋아하는 이유는 역시나 부수고 만들고를 반복할 수 있고, 생각한 대로 아무렇게나 만들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블록만 있으면 우주와 물속을 동시에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잠수우주선도 만들 수 있다. 셋째는 나도 나도, 한다. 우리는 테라스에 놓은 야외용 식탁에서 점심을 먹으며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갇혀 있는 우리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날씨는 어찌나 좋은지. 


이번 주 토요일부터 블루아를 포함한 이 지역의 학교들도 2주간의 방학에 돌입한다. 원래 학교에 가지 않고 있었는데 공식적으로 방학을 하든 말든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우리가 격리생활을 하는 동안 주중 모드와 주말 모드가 확실히 다르듯 방학 모드는 또 따로 있다. 주말 모드에 주중 모드의 오전을 살짝 끼워 넣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아내는 주말 모드로 쭉 가자고 할지 모르지만 나의 바람은 그렇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책상에 앉히지 않으면 아이들은 하루 종일 레고를 부수고 세우고, 플레이모빌로 이야기를 만들고 놀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괜히 불안하다. 나도 어쩔 수 없는 꼰대인가 보다. 아무런 벌이도 못한 채 지나가는 날들이 곧 4주를 채운다. 아, 살짝 지친다. 그러다가도 레고를 가지고 슉, 솨, 하는 두 놈들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든다. 


중증환자의 수가 어제 두 자릿수 늘어 주춤한 데 이어 오늘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7천148명에서 7천66명으로 82명 감소했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격리조치의 효과가 나타난 결과라는 분석이 있지만 아직은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프랑스 서부의 대도시인 낭트의 대학이 오늘 휴교령을 여름방학까지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대학이나 교육기관에도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다. 나를 포함한 프랑스의 모든 사람들은 격리조치의 끝이 언제일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아마 마크롱 대통령이 TV에 나서는 월요일 이에 대한 언급이 있을 듯하다. 다만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격리 중이거나 격리를 경험했다는 통계에 아주 약간은 위안이 된다. 나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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