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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16. 2020

지나 보니 한 달, 금방이다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27

4월 15일(격리 31일째) 수요일 맑음 바람


집에 갇혀 지낸 지 한 달이 됐다. 프랑스 정부의 이동제한령 공식 발표 시점은 3월 17일이지만 휴교령, 상점 폐쇄령, 집회 금지령 등은 직전 주말(15~16일)부터 적용됐기 때문에 만 한 달 동안 격리 생활 중인 게 맞다. 우리 가족이 마지막으로 다 같이 1시간 이상 외출한 것은 토요일이던 3월 15일 데메 공원 산책이다. 자전거 타고, 걷고, 탁구 친 것 외에 특별할 것 없던 평범한 주말 산책이었지만, 그 시간이 그립다. 


아침식사를 제외하면 아내와 나는 한 달 동안 60여 번의 식사를 준비했다. 바비큐도 있었고, 한식도 있었고, 프랑스식도 있었지만 매번 우리는 뭐 먹지, 를 고민했다. 앞으로 올 한 달도 이 문제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아내나 나나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캡슐이 나오길 간절하게 바라는 스타일의 인간이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기에 절망스러울 뿐이다. 다만 뚝딱 한 끼 해치울 수 있는 레시피의 리스트를 최대한 많이 저장해놓는 수밖에. 그걸 보통은 노하우라고 말한다. 


우리는 정원 정리의 진도를 꽤 많이 나갔다. 아직도 할 게 남았지만 격리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엄두도 내지 않았을 구역까지 보기 좋게 정돈을 마쳤다. 정원의 맨 구석에 가지치기를 할 때 나오는 나무 쓰레기들을 모아두었는데 이사 온 후로 3년 가까이 되는 동안 한 번도 정리를 하지 않고 쌓아두기만 했었다. 나무 쓰레기의 처리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시에서 운영하는 쓰레기장에다 버리든지, 태우든지. 쓰레기장에 버리기 위해서는 트럭 같은 운반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그래서 두 번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문제는 도심의 가정집에서 나무를 대량으로 태우는 게 불법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연기가 최대한 나지 않도록 마른 나무들을 적당하게 잘라서 바비큐 그릴에 넣고 태우고 또 태웠다.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불장난을 좋아하고, 정원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일석이조였다. 작업을 마친 뒤 몸 구석구석에 연기 냄새가 배어있는 단점이 있었다. 정원 정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젠 죽을 듯이 달려들어 하루에 다 끝내려 하지 않고 아주 조금씩 한다. 처제의 충고대로. 


아내는 그동안 방학을 앞두고 밀렸던 자기 반 학생들의 쪽지시험을 채점하고 성적을 취합해 통지표를 작성하느라 스트레스를 꽤 받았다. 아내가 일하는 학교의 교장은 매일 모든 선생님들과 화상통화를 하며 회의를 하길 원했다. 아내가 근무하는 곳은 교장을 포함해 전체 선생님 수가 6명에 불과한 초미니 학교인데,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하루에 최소한 2시간은 회의를 했다. 아내가 받은 두 번째로 큰 스트레스였다. 격리 생활이 2주째, 3주째로 접어들면서 아내에게는 요령이 생겼다. 화상통화 앱의 본인 카메라를 꺼놓고 가끔 목소리만 들려주면서 다른 일을 하거나 대충 흘려듣는 신공을 선보이기도 했다. 회의 내용의 90 퍼센트는 아내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아내는 학교의 동료들과 하는 화상회의 말고도 가족들과 화상통화, 친구들과 통화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첫째의 방 벽지를 뜯고 새롭게 페인트로 칠하는 공사를 단행했다. 우중충하던 벽이 화사한 색으로 바뀌자 첫째는 방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늘었다. 이전에는 숙제를 하더라도 굳이 거실로 내려와 하던 습관이 있었는데 지금은 노는 시간이 아니면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첫째는 격리 기간 중에 열한 번째 생일을 맞았다. 방의 페인트칠은 생일 선물이었다. 장인 장모와 처제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올해는 돈으로 생일 선물을 대체했다. 첫째는 요즘 인터넷 사용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아마존 서핑을 즐기고 있다. 전자책 기기를 갖고 싶어 했으나 기계 가격에 더해 매월 사용료를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하면서 뜻을 접었다. 대신 1000 조각 짜리 퍼즐을 찾고 있다.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퍼즐이 최고지. 첫째가 격리 기간이 되면서 게을리하는 것은 피아노이다. 평소에는 그렇게 빡빡한 일정 중에도 화요일 방과 후에 있는 피아노 수업을 위해 연습을 정기적으로 했는데, 수업이 없으니 연습도 없었다. 피아노 선생님과 화상 수업을 한 번 하긴 했는데, 직접 보는 것과는 다른 모양이다. 말을 냇가로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는 법. 아이들의 하루는 왜 이리 바쁜지. 


둘째는 선생님이 주는 숙제는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 끝까지 하는데 딱, 거기까지이다. 어쩌면 담임 선생님이 주는 숙제가 아이들이 하기에 적당한 양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둘째는 글짓기도, 그림 그리기도, 만들기도, 수학 문제 풀기도 선생님이 준 거라는 말만 하면 군말하지 않고 다 해낸다. 숙제가 끝난 뒤 조금 시간이 남아 다른 걸 들이밀면 그때부터는 하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딴짓을 하면서 그 남은 시간을 기어이 때우고, 어느새 자기 방에 가서 레고랑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둘째를 보면 확실히 원격수업은 한계가 있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셋째는? 손가락 빨기를 끊었고, 잘 논다. 사실 아이들은 격리된 생활이 그리 불편하지 않은 것 같다. 매일 엄마 아빠와 함께 지낼 수 있으니 학교에 가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있을 수도 있다. 특히 셋째의 경우는. 


마크롱 대통령의 ‘5월 11일 개학’ 발표와 관련한 각종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통령 담화 다음날인 어제 내무부 장관은 “대통령의 발표는 격리 해제가 5월 11일이라는 뜻은 아니다. 격리가 5월 11일까지는 이어진다는 뜻이다. 5월 11일 격리 해제는 목표이지 확실한 것은 아니다”라면서 한 발 뺐다. 오늘은 격리 기간 동안 일을 하는 의료진 등 공무원들에게 최대 1000 유로의 보너스를 준다는 기사, 학교가 먼저 개학을 하면 교사들에게도 보너스가 나갈 것이라는 기사 등이 나왔다. 학교를 먼저 격리 해제하는 것에 대한 반대 여론의 주된 이유는 무엇보다 전반적인 대비책이 없는 상황에서 나온 결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독일은 5월 4일 학교 문을 열겠다고 오늘 발표했다. 독일과 프랑스의 다른 점은 검사를 전격적으로 했는가, 아닌가 또는 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있다. 심지어 독일은 현재도 프랑스와 같은 전면적인 격리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자발적 격리에 가깝다. 만약 프랑스도 정부의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인식이 독일과 같거나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그래서 철저한 대책이 있다는 게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졌다면 5월 11일이 아니라 5월 4일에 개학을 해도 그렇게 심한 반발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은 선언과도 같은 대통령의 연설 내용만 있을 뿐 세부사항은 나오지 않아서 말만 무성하다. 


“학교에서는 아이들과 교사들이 마스크를 쓰고 수업하나요?”, “여름방학은 연기되는 건가요?”, “학교에 보내기 싫으면 안 보내도 되는 건가요?” “학생들 모두가 한꺼번에 개학을 하는 게 아니라 순차적으로 학교에 가게 된다는 말도 있던데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요?” 언론 사이트에는 수많은 독자들의 궁금증이 올라오지만 담당 에디터들의 답은 비슷하다. “아직 자세한 것은 알기 어렵습니다. 세부지침이 마련되는 대로 행정부가 발표할 예정입니다.” 


오늘 현재 피해상황은 전체 확진자 14만 7천863명, 사망자 1만 7천167명에 24시간 이내 확진자가 4천560명, 사망자가 1천438명이다. 여전히 일일 사망자 수는 꽤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지만 중증환자가 며칠 째 줄고 있고, 오늘은 3월 이후 처음으로 입원환자 수가 감소했다. 중증환자는 지난 4월 8일 7천148명으로 최고치를 찍은 뒤 계속 줄어 오늘 현재 6천457명이고, 입원환자는 어제보다 513명 줄어 3만 1천779명이 됐다. 수치가 나아지자 이제 끝이 보이는 게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오고 있다. 


우리가 겪을 격리 생활의 두 번째 한 달은 주로 이런 소식들로 이뤄질 것이다. 5월 11일 이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 프랑스의 코로나 사태는 언제 어떻게 진정될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뭘 먹지, 를 고민할 것이고, 가끔 근처에서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탈 것이고, 아이들은 레고와 플레이모빌을 이용해 자기들만의 세계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지나고 보니 한 달, 금방이다. 


추신. 오늘 읽은 잊지 못할 기사 하나를 기록한다. 대형 마트의 판매 실적이 연일 상승곡선을 그리는 가운데, 매출 하락을 겪고 있는 품목이 있으니… 그것은 샴푸였다. 격리 이후 3주간 샴푸 판매량은 전년 대비 21% 줄었다고 한다. 나갈 일도 없는데 매일 머리 감는 내가 이상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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